정찬주 장편소설 - 인연 46
정찬주 장편소설 - 인연 46
  • 법보신문
  • 승인 2007.08.28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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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발심수행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공부하는 사람은 계행을 깨끗하게 해야만 한다. 계를 우습게 알지 말아라.
무명에 빠져 미혹에 머물러 있을 때 이를 반전시켜 본래 마음으로 회복하는
그때가 바로 계이다.”

일타는 전쟁 중이었으므로 응석사에서만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절 사정은 그만큼 궁핍했고, 금오 회상에서 정진하겠다는 수행자들이 줄을 서 있기 때문이었다. 일타는 응석사에서만 1년을 보냈으므로 이제는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다. 금오 회상을 떠나야 했다.

일타는 오락가락하는 봄비처럼 어디로 떠나야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일각은 진즉 통영 미래사로 떠나버렸고, 함께 동안거를 보냈던 노승 소천도 하안거 방부를 들이려고 이 절 저 절을 알아보고 있었다.

“노장님은 어디로 가시렵니까.”
“오라는 데는 많지만 전쟁 중이라 입을 하나 보태는 것이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네.”
“저와 함께 범어사로 가시지요.”

그러나 소천은 고개를 저었다.

“동산스님이 있으니 자네는 공부하기 좋을 거야. 하지만 나는 내키지 않네. 한 절에 용이 두 마리가 살면 되겠나.”
“정진하는 대중은 큰스님이 두 분 계시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허허. 모르는 소리. 편이 갈리고 시비가 생기는 법이야. 범어사는 동산스님 한 분으로 족해. 그만한 역량이 있으니까 범어사를 군인들에게 빼앗기지 않고 피난민선방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네.”

범어사 선방을 피난민선방이라 부르는 까닭은 피난 온 수좌들이 모여 대중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절은 군에 수용당해 전사자의 유골안치소로 이용되고 있었지만 그래도 동산은 절을 떠나지 않은 채 피난민선방을 운영하며 지키고 있었다.

“방부를 들인 모양이군.”
“아직 방부를 들이지는 못했습니다만 범어사는 저에게 출가본사 같은 곳입니다. 구족계를 받은 곳이니까요. 반드시 동산 큰스님 회상에서 한 철을 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어서 가보게. 동산스님을 뵙거든 내 안부도 좀 전해주고.”
“노장님, 그러겠습니다.”

일타는 내원토굴로 올라가 금오에게도 하직인사를 했다. 전쟁 중이라고는 하지만 산중에는 진달래꽃들이 무심히 피었다가 지고 있었다. 꾀꼬리도 숲속에서 낭랑한 목소리를 자랑하고 있었고, 뻐꾸기도 뻐꾹뻐꾹 하며 가는 봄이 아쉬운 듯 노래하고 있었다.

응석사에서 범어사까지 쉬엄쉬엄 걸어가려면 삼사일은 잡아야 했다. 다행히 가는 길에 절과 암자가 많아 탁발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일타는 고성 문수사에 청담이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그곳도 들를 생각으로 응석사를 떠났다. 청담은 속가 고향이 진주였고, 그런 이유 때문인지 진주 일대에서 이미 큰스님으로 소문이 나 있었던 것이다.

큰길 비포장도로로 나서자, 이따금 사복차림의 젊은 장정들을 가득 태운 군용트럭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었다. 훈련소로 입영하는 장정들인 듯했다. 논에서 김매기를 하던 늙은 농부들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일타는 그들에게 합장을 하면서 부지런히 걸었다. 범어사로 한걸음이라도 빨리 가 하안거 방부를 들이고 범어사 조실인 동산의 법문을 듣고 싶었다. 대학과 문학의 꿈을 접어버리고 난 뒤부터는 오로지 참선공부 생각밖에는 나지 않았다.

문득 금오가 자신에게 ‘수행자의 일생이란 선지식을 친견하는 일과 선방 좌복을 지키는 일’이라고 당부한 말도 떠올랐다. 일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다. 금오 큰스님의 말씀대로 나는 지금 범어사로 가 동산 큰스님을 친견할 것이다. 피난민선방에서 좌복을 지킬 것이다. 고성 문수사로 가 청담스님도 뵐 것이다. 전쟁 중이라도 수행자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선방으로 달려가 탐진치로 얼룩진 거짓 나(假我)에게 총구를 겨눌 것이다. 그리하여 거짓 나를 쓰러뜨리고 참나(眞我)를 되찾을 것이다. 참나를 되찾아 부처를 이루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일타는 산길을 잘못 들어 고성을 지나치고 말았다. 되돌아서 문수사를 갈 수도 있었지만 범어사로 빨리 가 방부 들이는 일이 급했으므로 그냥 길을 재촉하여 걸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비구계를 준 스승 동산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동산(東山).

1890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난 스님은 7세에 서당을 다니기 시작하여 15세에 사서삼경을 모두 익히고,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1910년 21세에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을 배우게 된다. 낮에는 의학 공부를 하면서 밤에는 흥사단 국어연구회에서 우리말 연구를 하고 독립의식에 눈을 뜬다.

스님은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용성의 권유로 범어사로 출가했다. 1913년 3월에 용성을 은사로, 성월을 계사로 삼아 혜일(慧日)이란 법명을 받았다. 출가 직후 범어사 강원에서 『능엄경』을, 그해 가을에는 운문선원으로 용성을 따라가 『전등록』, 『선문염송』, 『범망경』, 『사분율』을 배웠다. 다음해인 1914년에는 평북 맹산 우두암으로 가 한암에게서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을 조금씩 공부했으며, 1916년에는 범어사로 다시 내려와 『화엄경』을 2년 동안 수학했다.

1919년 용성이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되자, 스님은 거처를 서울 대각사와 도봉산 망월사로 옮겨 3년 동안 옥바라지를 했다. 이후 32세 때부터 스님은 참선의 길을 걷는데, 상원사와 마하연, 그리고 복천암과 각화사 선방 등을 거쳐 직지사 천불선원에서 3년 결사를 마쳤다.
마침내 스님은 천불선원 3년 결사를 마치고 범어사로 돌아와 하안거 결제 중에 선원의 동쪽 대숲을 거닐다가 바람에 서걱대는 댓잎 소리에 홀연히 눈이 열렸다. 1927년 7월 15일 대오(大悟)를 한 순간이었다. 스님은 새롭게 열린 세상을 향해서 소리쳤다.

“서래밀지(西來密旨)가 안전(眼前)에 명명(明明)하도다.”

서쪽에서 비밀스럽게 온 부처의 마음이 자신의 눈앞에 밝게 펼쳐져 있다는 뜻이었다. 동산은 그러한 경지를 게송으로 남겼다.

그림을 그리고 그린 것이 몇 해였던가
붓 끝이 닿는 곳에 살아 있는 고양이로다
하루 종일 창 앞에서 늘어지게 잠자고
밤이면 예전처럼 늙은 쥐를 잡는다.
畵來畵去幾多年
筆頭落處活猫兒
盡日窓前滿面睡
夜來依舊捉老鼠

이와 같은 오도송을 남긴 지 2년 후, 동산은 범어사 조실로 추대를 받아 젊은 수좌들을 지도했다. 그리고 1935년 봉점암에서 효봉, 청담 등과 함께 하안거를 보내고 범어사로 내려와 용성에게 전법게를 받았다.

부처와 조사도 원래 알지 못하여
가설로 마음을 전함이라 했도다
운문의 호떡은 둥글고
진주의 무는 길구나.
佛祖元不會
假說爲傳心
雲門圓
鎭州蘿蔔長

1936년부터 1940년까지는 범어사와 해인사 조실을 겸하였는데, 이때 성철이 해인사 백련암으로 동산을 찾아가 출가하여 제자의 인연을 맺었다. 용성에서 동산으로 이어지는 가풍은 경허에서 만공으로 흘러온 그것과 크게 달랐다. 동산은 파계와 무애를 구분 짓지 못하는 수행자들을 인정사정없이 꾸짖었던 것이다.

일타는 범어사 일주문을 보고는 가벼워진 걸망을 추슬러 등에 붙였다. 일주문은 정겨웠으나 주변의 풍경은 낯설었다. 전투모를 쓰고 총을 멘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고, 경내에는 군용막사가 여러 개 쳐져 있었다. 경내에 전사자의 유골안치소가 설치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실제로 와서 보니 살벌하기조차 했다. 검문검색도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

“신분증을 봅시다.”
“여기 있습니다.”

일타는 응석사에서 만든 도민증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군인이 일주문 안으로 출입을 허락했다. 일타는 부처님에게 삼배를 드리려고 법당으로 갔다가 또 놀랐다. 법당에는 한지에 둘둘 말린 유골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관음전이나 지장전도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사용했던 요사채의 방들에도 유골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일타는 조실채로 올라가 동산을 뵙고 인사를 드렸다. 동산은 자신에게서 비구계를 받은 일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어디서 오는가.”
“금오스님 회상에 있었습니다.”
“금오스님이라면 호랑이스님이 아닌가.”
“저희들에게는 아주 자상하시고 자비로우셨습니다.”
“오래되어 끝이 닳은 송곳을 노고추(老古錐)라고 하지. 금오스님도 노고추가 되신 것이네. 허나 금오스님의 기봉(機鋒)이 노련해졌다고 봐야지 무디어진 것은 아니라네.”
“스님, 금어선원에서 하안거를 나고 싶습니다.”
“1백 명쯤은 될 것이네. 참선을 하기보다는 피난을 온 수좌들이 많아. 그들 사이에서 한 철을 잘 보낼 자신이 있는가.”
“불퇴전의 각오로 정진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동산은 일타에게 먹을 갈게 했다. 잠시 후 동산은 모지랑붓을 들고 휘호를 하나 써서 일타에게 주었다.

堪忍待

한자 순서대로 풀이하자면 견디고, 참고,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먹이 마르는 동안 묵향이 일타의 코끝을 스쳤다. 동산의 인품이 묵향에 실려 오는 듯했다. 묵향의 여운은 일타에게 ‘잘살아야지’ 하고 발심을 격동시켰다.

“세 글자만 실천하게.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네.”
“참선하여 대도를 성취하겠습니다.”
“일타 수좌의 패기가 마음에 드는군. 내일부터 선방에 들어 대장부의 일대사를 해결해 보게나.”

다음날.

일타는 동산의 허락을 받아 피난민선방에 입실했다. 그런데 선방은 장터처럼 어수선했다. 1백여 명이 들어차 발을 디딜 틈도 없었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좌복에 앉자마자 포행을 하는 방선시간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동산의 법문은 일타의 가슴을 적셨다.

“공부하는 사람은 계행을 깨끗하게 해야만 한다. 계를 우습게 알고 불조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해(解)와 행(行)이 나뉘어져서는 안 되며, 무방반야(無坊般若)라 하여 망령되게 걸림 없는 행을 지어서는 안 된다. 참으로 공부를 여실하게 지어나간다면 저절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이 원만해진다. 무명에 떨어져 미혹에 머물러 있을 때 이를 반전시켜 본래의 마음으로 회복하는 그때가 바로 계이다. 그렇게 알고 나면 곧 정이 있게 되며, 정이 유지될 때 계가 나는 것이다. 혜가 있을 때 계가 나며, 혜를 통해서 도가 있는 것이다. 계와 정과 혜를 일치시켜 모든 상념을 정지하고 본질을 통찰하고자 했을 때 도를 얻게 된다.”

한편, 운허의 『능엄경』 강의도 일타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다. 중국의 초조 달마가 경전 중에서 의지할 만한 경전이라고 한 것이 『능엄경』이었다. 그러고 보면 전쟁 중이었지만 일타로서는 범어사에서 승려로서 공부할 것은 다 배우고 있는 셈이었다. 운허가 흰 두루마기를 입고 범어사로 피난 온 것은 일타에게는 행운이었다. 운허는 당대 최고의 학승이었던 것이다.

일타는 글 잘하고 머리 좋은 운허를 따랐다. 운허는 자기 집안 얘기를 일타에게 스스럼없이 했다.

“춘원 이광수하고 이학수인 나는 삼종제(三從弟) 팔촌이고 동갑이네. 허지만 내가 생일이 늦어 동생이 되지. 어릴 때 같이 컸어. 춘원은 반 고아였고, 우리 집은 먹고 살만했거든. 그래서 춘원이 우리 집에 와서 살았지. 춘원은 머리가 워낙 좋아 독지가가 나타나 일본 유학까지 갔고 나는 집에서 그냥 뭉개고 지냈어. 한문이나 하고 말이지.”

운허가 범어사로 온 것은 자운의 권유가 있어서였다. 불학을 깊이 익힌 운허에게 대처승 생활을 청산하고 참 중으로 살라고 권면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새 중노릇을 할 것이네. 좋아하는 술도 끊고. 다시는 한 잔도 안 하기로 청담과 약속했거든. 하하하.”

일타는 하안거 동안 피난민선방 좌복에 땀을 흘리면서도 가슴은 늘 뿌듯했다. 달변가인 동산의 구수한 법문과 운허의 『능엄경』 강의는 일타의 심혼(心魂)에 불을 당겨주었던 것이다. 인도의 험준한 능가산을 오르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불설(佛說)의 『능엄경』을 한글로 명쾌하게 풀어내는 운허의 강의는 어떤 강백도 흉내를 내지 못할 만큼 탁월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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