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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22. 아와 무아②-이도흠의 ‘임진강에서’

기자명 법보신문

강물에 내린 눈은 기꺼이 강이 된다

메마른 강에
어김없이 눈은 찾아와
물길 따라 물향내 따라 나래짓하는데
어느 샌가 왜바람 한 줄기
눈송이, 송이 이 기슭 저 펄로
밀어내고 내쫓고 내동댕이치다가
아예 살얼음을 얼려놓았어도
눈은,
강가의 미관과 이별하느라 잠깐
파르르 떨었을 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한 마디 말도 없이
하나 둘 떨어져 강물을 이루누나.
 - 임진강에서 2

<사진설명>눈은 온갖 경계와 구분을 무너뜨려 하나로 만든다. 사진은 중국 항주 서호의 눈 내린 겨울 풍경.

필자가 임진강에서 지은 연작시 가운데 하나, ‘임진강에서2’이다. 자비 편에서 소개한 안도현 시인의 ‘겨울 강가에서’처럼 눈이 강물로 떨어져 녹는 것을 소재로 한 것은 같다. 하지만, 안도현의 시가 서양의 이항대립적 사고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면, 이 시는 불교의 사고로 양자를 바라보고 있다.

안도현의 시가 눈의 용해를 존재의 사라짐으로 유추하였다면, 이 시는 두 존재가 서로 원융(圓融)을 이루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기에 눈의 용해를 막는 용(用)을 행하는 얼음의 은유가 전자에서는 구원이지만, 이 시에서는 원융에 대한 방해, 곧 분별심이다.

메마른 강은, 주와 객, 자연과 인간 등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양자를 대립시킨 현상계의 현실이다(事法界). 그러니 메마른 강은 결핍된 존재이어도 좋고, 분단 상황으로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소모전을 벌이고 있는 남북이라도 좋고, 소외와 억압이 일상화하고 자연이 파괴된 현대 산업사회라도 좋다. 그러나 내가, 한국이, 산업사회가 지옥으로 변하지 않는 것은 거기에 어김없이 적용되는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로 돌아가는 우주의 법칙

“어김없이 눈은 찾아와”는 겉으로는 자연의 법칙이다.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강에 눈이 내린다. 눈은 내려서 저것은 밭이요 저것은 나무요 하던 곳을 덮어버려 온갖 경계와 구분을 무너트리고 하나로 만든다. 특히나 강물에 떨어지는 눈은 자신을 죽여 물과 하나를 이룬다. 눈이 되어 녹아 흐르는 물, 어느 것을 눈이라 하고 어느 것을 강이라 하겠는가? “어김없이 눈은 찾아와”에 담긴 깊은 의미는, 사법계에 내재해야 하는 이법계(理法界)의 원리, 모든 대립을 원융시켜 하나로 돌아가게 하려는 우주에 존재하는 당위의 법칙이다.

그 법칙에 따라 눈은 하나를 이루려 하나 모든 것을 경계를 짓고 대립하는 데 익숙한 존재들은 이를 방해한다. 허상을 실상이라 하고 원융하려는 모든 방편과 수단을 물리쳐 버린다. 그리고 이항대립적 서양 철학이나 계급사회처럼, 아예 모든 것을 분할하는 틀을 만든다. 그것을 확대 재생산한다. 하지만 눈은 우주에 존재하는 대원리에 따라 강물에 떨어져 하나를 이룬다. 눈은 존재 사이에 대화하고 소통하며, 남북의 이질적인 제도와 문화를 서로 닮으려 하며, 이성중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뛰어넘어 주체와 타자, 남과 북,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아우른다. 눈은 어떤 존재가 헤살을 놓아도 이를 초월하고 하나가 되어 장애를 극복하고 대자적 자유를 이룬다. 다만 완전히 해탈하기 전,  그 전의 삶에서 마주친 아름다운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 너무도 아쉽고 슬퍼서 잠시 머뭇거렸을 뿐.

강물에 녹기 전의 흰 결정체를 눈이라 한다. 하지만 강물에 녹아버린 것을 두고 눈이라 하지 않는다. 눈은 찰나에 존재할 뿐, 곧 강물과 하나가 되며 이를 모든 사람이 물이라 하지 눈이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사물이나 사람에 적용하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어떤 학자는 거울이 내 앞에 있어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내 얼굴을 비쳐주는 작용마저 하고 있는데 그것이 헛된 것이라는 것은 궤변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조금 불교에 긍정적인 사람들도 관념상의 생각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여기에 시간만 대입해도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시간이 흘러 거울을 받치던 나무가 썩어버리고 거울 뒤의 수은도 다 벗겨져 내 얼굴을 비추지 못하고 나중엔 그 유리마저 산산 조각이 나 석영 가루로 변하였어도 그것을 거울이라 하는가.

실체론과 관계론의 사유 차이

인간도 마찬가지다. 몇 분과 80여 년으로 시간 사이의 길이만 차이가 날 뿐, 인간 존재 또한 강물에 떨어지는 눈과 같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마음이 변하고 있으며 몸 또한 수 조개의 세포 가운데 수 만개 이상이 변하고 있다. 그러니 나라는 자성(自性), 혹은 동일성을 주장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찰나의 순간에도 변하고 있는 도중에 있으니, “있다”라고 할 수 없다. 하여 나란 없다. 무아(無我)다. 있다면 그것은 찰나의 순간 스치듯 존재하는 가유(假有)일 뿐이다.  

올해가 바로 페르디난드 소쉬르가 탄신한 지 150 주년이 되는 해다. 전세계적으로 기념 학술대회가 열렸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일반언어학 강의』는 20세기 인문학의 최대 혁명 가운데 하나였고 그의 사유는 라깡, 데리다, 들뢰즈 등에 이어져 지금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그동안 서양은 나무가 나무인 것은 그 존재가 나무다운 본질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소쉬르가 나타나 모든 것은 구조 속에서 의미를 드러낼 뿐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나무’는 스스로 본질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풀과 관계(구조, 차이)를 통하여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플라톤 이래로 실체론적 사유를 하던 서양에 관계적, 구조적, 차이적 사유의 지평을 활짝 연 것이고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스트나 탈구조주의자들에게 계승되고 있다.

그가 서양인에게 준 충격은 우리가 볼 때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서양 사람들은 실체 중심의 사유를 한다. 그들은 “너는 누구냐?”고 곧잘 묻는다. 하지만, 동양 사람은 다르다. “네 아버지가 누구고, 너의 선생은 누구고, 어떤 친구를 사귀냐?”라고 묻는다. 어항을 보여주고 그것을 다시 그리라고 했더니 서양 학생 대부분은 어항 속의 물고기를 그렸다. 하지만 동양 학생 대부분은 어항과 물고기와 물풀, 책상이 어울린 그림을 그렸다. 실체 중심의 사유를 하는 서양과 관계의 사유를 하는 동양의 패러다임 차이가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서양은 그리스 시대부터 존재 중심의 사유를 발전시켰고, 동양은 관계와 연기의 사유를 행하였던 것이다. 소쉬르도 하버드 대에서 불교 관련 글을 읽고 깨우치고서 그런 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나무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풀과 관계 속에서 의미를 드러낸다. ‘나무’ 옆에 ‘쇠’를 놓으면 나무의 의미는 쇠의 “금속성, 광물성, 문명” 등과 차이를 가져 “목질성, 식물성, 자연” 등의 의미를 갖는다. 다시 ‘소년’을 놓으면 나무는 “이상, 순수” 등의 의미로 미끄러진다. 나무를 뭐라 하지만 실은 나무는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리 잘난 체를 하고 욕심을 부리고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지만 나는 없다.

관계 속 천의 얼굴 지닌 인간

까르마 츠앙은 미국 대학의 교수로 있으면서 실체론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국 대학생에게 불교의 연기적 사고를 깨우치기 위하여 사람 옆에 숫자를 놓거나 대시를 하고 다른 이의 이름이나 낱말을 적으라고 시켰다. ‘노무현-1988’과 ‘노무현-2007’, ‘노무현-전두환’, ‘노무현-이라크전’은 얼마나 다른가. ‘노무현-1988’이 5공 세력에게 예리하고 논리정연한 질문을 던지던 청문회 스타라면 ‘노무현-2007’은 진보와 보수 양 진영으로 신뢰와 지지를 현저하게 상실한 지도자다.  모든 인간이 동일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천의 얼굴을 드러내는 허상들이다. 그러니 나의 자성이 있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헛된 것이다. 나는 없다. 나와 너의 관계만 있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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