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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 - 인연 47

기자명 법보신문

제 9장 발심수행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저 간판이 당신 신심 깊은 것을 증명하고 있는기라. 저걸 떼어
마산역 광장에 갖다 세우자, 이 말이야.”
“아이구, 큰스님 부끄럽습니다.”
“신심에서 돈 낸 것인가. 간판 얻으려고 돈 낸 것이제.”

하안거 중에 특별위령제가 실시되기도 했다. 범어사에 전사자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으므로 지내는 특별위령제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하는 위령제인 탓에 철저한 경비와 동원된 부산 시민들 속에서 행사가 치러졌다. 범어사 스님들은 위령제 순서에 따라 천도재를 지냈다. 일타도 목탁을 치며 극락왕생을 염불했다.

이때 동산은 위령제에 참석한 국방장관에게 유골안치소를 옮겨주도록 건의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빠른 시일 안에 도량의 수행 환경이 정상화되도록 조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던 것이다. 사람을 훈훈하게 감화시키는 동산의 설득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군인들을 상대하면서 동산이 막지 못한 일도 하나 있었다. 전시(戰時)였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안거에 들어간 지 십여 일 후였다. 갑자기 1개 소대 병력의 군인들이 선방을 에워싸고는 단속을 했다. 누군가가 국방부에 군기피자들이 범어사에 많이 있다고 고발하여 들이닥친 사건이었다.

휴전 얘기가 오가는 시점이어서 아군과 적군이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삼팔선 부근에서 치열하게 격전을 치르고 있는 때였다. 군인들은 20세 이상 30세 미만의 선방 스님들을 강제로 차출했다. 그때 16명이나 가사를 벗고 군복을 입었다.

차출된 스님들은 군용트럭을 타고 포항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다시 LXA화물선에 실려 제주도 모슬포훈련소로 가 소총 사격술과 간단한 전투훈련만 받고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속가 형인 월현(月現)도 모슬포훈련소까지 가 군 생활을 잠시 했다.

일타는 월현 때문에 강제 차출을 모면했다. 월현이 일타를 선방 뒤 대숲으로 불러 조사받을 때 요령을 말해 주었던 것이다.

“월현스님, 입대하시기로 했다면서요.”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가야 하지 않겠는가.”
“왜 형님이 가십니까. 지금 나가시면 죽습니다. 삼팔선으로 나가면 다 죽는답니다. 형님은 속가 장남 아닙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월현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누군가가 대숲으로 다가오더니 오줌을 싸고 사라졌다. 그믐밤의 대숲은 서너 발짝도 분간키 어려울 만큼 컴컴했다.

“작은 소리로 말해. 군인들이 순찰을 도니까.”
“알겠습니다.”
“나는 이미 조사를 받을 때 내 나이를 사실대로 말했으니 일타스님은 절대로 주민증을 보여주지 말고 말해. 20살에서 30살까지 잡아간다고 하니까. 한 집에서 한 사람만 가면 됐지 두 사람이 모두 나가 다 죽을 필요가 있는가. 그러니 일타스님은 중노릇 잘해서 반드시 성불해야 해. 그 일도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니까.”
“월현스님, 제가 나가겠으니 그리 아십시오.”
“어허, 일타스님은 참선공부 잘해서 대도를 성취하라니까.”

두 사람은 옥신각신하다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일타는 동산에게 불려가 월현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동산이 먼저 말했다.

“월현수좌가 전선으로 나간다고 하니 일타수좌는 여기를 빨리 떠나게. 다만 나와 약속을 하나 하고 가게. 어디를 가든 참선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형님인 월현스님을 보내자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월현수좌 나이가 30살 부근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전선에 나가지 않고 후방에 남을지도 모르니 안심하게. 일타수좌는 나이보다 어리게 보여 17살이라 해도 군인들이 믿을 것이네. 그러니 어서 범어사를 떠나게. 범어사를 떠나더라도 참선공부만 해야 되네.”

일타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내년 이맘때 다시 들러 큰스님께 점검을 받겠습니다.”
“그래, 그래. 내 그 말을 듣고 싶었네. 반드시 내게 와 공부한 것을 점검받아야 하네. 일타수좌의 공부에 향상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속가 형인 월현수좌가 기뻐할 것이네.”

일타는 곧 군인들에게 조사를 받았다.

“스님, 본적이 어딥니까.”
“충남 공주입니다.”
“언제 스님이 됐습니까.”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절로 들어왔습니다.”
“지금 몇 살입니까.”
“17살입니다.”
“17살이라고 했습니까. 거짓말하면 처벌받습니다.”

일타는 난생 처음 해보는 거짓말이어서 움찔했지만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17살 맞습니다.”
“그렇습니까. 17살이 더 돼 보이지만 스님을 말을 믿어야지요. 좋습니다.”

일타를 조사하던 군인은 더 묻지 않고 조사필증을 끊어주었다. 일타는 자신의 나이를 속인 데다 조금 전에는 월현을 포함해서 16명의 스님들이 군용트럭을 타고 포항으로 떠났으므로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일타는 무력증에 빠졌다. 동산의 법문에도 차츰 신심이 떨어졌고, 운허의 강의도 이제는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일타는 또 범어사를 떠나 다른 절에서 동안거를 나기로 했다. 일타는 즉시 동산에게 자신의 심정을 말했다. 그러자, 동산은 따뜻하게 말했다.

“창원 성주사에 말과 행동이 똑같은 내 상좌가 있네. 그 스님에게 가보게.”
“어떤 스님입니까.”
“성철수좌라고 하네. 해인사 조실로 있을 때 나한테 출가한 스님이네.”
“송광사 삼일암에서 뵀던 스님입니다.”
“그런가.”
“어찌나 당당하고 위의가 넘치던지 말뚝 신심이 나 생식을 하는 스님께 공양 때마다 상추를 뜯어다 드린 일이 있습니다.”

일타는 성철을 소개한 동산에게 합장을 했다.

“삼일암에서 한 철을 같이 보냈던가.”
“아닙니다. 성철스님은 송광사 대중들과 살지 않고 곧 떠났습니다. ‘중이 가는 길은 혼자 가는 길이다’ 하고 말입니다.”
“중이 가는 길은 혼자 가는 길이라….”

동산은 미소를 지었다. 상좌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찾아와 의지하지 않는 수좌였다. 성철은 대도를 위해 무소의 뿔처럼 혼자 다닐 뿐이었다. 그렇다고 동산은 그러한 성철을 나무라거나 타이르지 않았다. 자신의 가풍이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데 있기 때문이었다. 일타는 범어사를 일주문을 나서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동산스님이 따뜻한 덕장이라면 성철스님은 냉철한 지장이라고나 할까.’

성철(性徹).

1912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아버지 이상언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지리산 정상이 보이는 경호강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청년이 되어서는 『하이네 시집』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등 80여 권의 동서양의 고전을 읽으며 영원한 자유를 갈망하게 되는데, 어느 날 탁발승에게 건네받은 영가선사의 『증도가』를 보고 캄캄한 밤중에 홀연히 등불을 만난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후 스님은 속인의 신분으로 지리산 대원사로 들어가 당시 권상로가 발간하던 잡지「불교」지에 실린 내용을 참고삼아 ‘무(無)’ 자 화두를 들고 참선하여 동정일여의 경지를 경험했다.

1936년 25세에 이르러 해인사 백련암으로 가 동산에게 출가하고 퇴설당에서 본격적인 참선공부에 들었다. 범어사에서 잠시 용성스님을 시봉하고 나서는 통도사 백련암, 은해사 운부암, 금강산 마하연사 등에서 화두를 들고 안거한 뒤, 마침내 1940년 29세 때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하안거 중 대오하여 오도송을 남겼다.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
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내리도다
문득 한 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 구름 속에 있네.
黃河西流崑崙頂
日月無光大地沈
遽然一笑回首立
靑山依舊白雲中

대도를 성취한 스님은 선지식을 찾아 점검에 나선다. 송광사 삼일암으로 가 효봉을 만난 것이나 간월암으로 가 만공을 만난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리고 스님은 법주사 복천암, 선산 도리사, 문경 대승사, 대승사 묘적암, 파계사 성전암 등을 돌며 8년 동안 눕지 않는 장좌불와 수행을 하였다.

1947년에는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답게 살자’는 결사를 하였는데, 이는 선종의 청정가풍을 확립하여 당당한 수행자상을 정립하고, 왜색불교를 불식시켜 흐트러진 조선불교의 정신을 되살리자는 취지였다. 결사에 참여한 스님들은 청담(靑潭), 우봉(愚峰), 보문(普門), 자운(慈雲), 향곡(香谷), 보경(寶鏡), 혜암(慧菴), 법전(法傳), 월산(月山), 종수(宗秀), 도우(道雨), 성수(性壽) 등 20여 명이었다.

그러나 봉암사 결사는 6.25전쟁의 발발로 와해되고 만다. 성철은 안정사 은봉암과 천제굴에서 잠시 산 뒤 창원 성주사로, 향곡은 월래의 묘관음사로, 청담은 고성 문수암 등으로 수행의 거처를 옮기고 말았던 것이다.

일타는 성주사에 도착한 즉시 성철을 찾아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성철은 일타를 기억해내며 누운 채 반갑게 맞아주었다.

“삼일암에서 봤던 일타수좌 아닌가.”
“그때 스님 뵙고 말뚝신심 냈던 일타입니다. 그런데 스님,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누운 채 인사를 받는 성철의 안색을 보니 생기가 없어 보였다. 성철이 손가락으로 앉은뱅이책상 위의 병을 가리켰다.

“저것 때문이라네. 공양 후 죽염을 한 숟가락씩 먹었더니 몸이 이래.”
“죽염을 과다하게 복용하셨군요.”
“아니야, 부산의 독일의사가 내 피를 많이 빼가서 그래.”
“왜 스님 피를 뽑은 것입니까.”
“보통사람들의 피와 다르다고 한기라. 맑고 깨끗한 피라면서 흡혈귀처럼 자꾸 빼갔어.”
“종합검사를 하느라고 그랬겠지요.”
“한두 번이 아니었어. 이 검사 저 검사 핑계 대고는 자꾸 뽑길래 내가 버럭 소리쳤지. 이놈들아 남의 피 다 뽑아가려고 그러는가! 하고 말이야.”

그랬더니 놀란 의사들이 조금씩 채혈하더라고 성철이 웃으며 말했다. 일타도 따라 웃으며 원주가 정해준 방으로 가 걸망을 풀었다. 원주가 잔뜩 주눅이 든 얼굴로 말했다.

“정말 큰일입니다. 왜 성주사로 왔습니까. 내일부터는 성철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입니다. 요 며칠 간은 절이 참 조용했습니다. 성철스님께서 부산의 기독교병원인가 어디에서 입원을 하고 계셨거든요.”
“스님이 퇴원하고 오셨으니 다행한 일이 아닙니까.”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한 번 한다고 했으면 고대로 해야지, 형편이 그렇게 안 되니까 못하는데도 전혀 봐주시는 것이 없습니다. 적당히 하다가는 날마다 불벼락이 떨어집니다. 노장님께 야단맞고 안거 중인데도 도망치는 스님도 더러 있습니다.”

신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타가 걸망을 푼 지 며칠 뒤였다. 건강을 되찾은 성철이 주지를 불러 말하고 있었다.

“법당 중창 시주가가 어디 사는가.”

법당 안에는 ‘법당 중창 시주 윤아무개’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그러자 주지가 말했다.

“마산에서 한약방을 크게 하고 있습니다. 신심이 아주 깊은 불자입니다.”
“그 사람 언제 여기 오노.”
“스님께서 오신 줄 알면 당장이라면 달려올 것입니다.”

주지는 한약방 주인을 불러 칭찬이라도 해주려나 싶어 원주에게 전화로 연락하라고 시켰다. 한약방 주인 역시 주지를 통해서 성철을 꼭 만나보고 싶어 했던 것이다. 과연 잠시 후, 한약방 주인이 승용차를 타고 달려왔다. 법당으로 들어온 한약방 주인은 성철에게 공손하게 삼배를 올렸다. 그러자 성철이 말했다.

“소문 들으니 당신 퍽 신심 깊다꼬 하대. 저 간판이 당신 신심 깊은 것을 증명하고 있는기라.”

한약방 주인은 몹시 쑥스러워했다. 무섭고 차갑다는 성철에게 칭찬을 들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곧 굳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간판 붙이는 위치가 잘못 된 것 같대이. 간판이란 남들이 많이 보게 하게 위해 세우는 것인데, 이 산중에 붙여두어야 몇 사람이나 보겠노. 그러니 저걸 떼어서 마산역 광장에 갖다 세우자, 이 말이야. 내일이라도 당장 옮겨야 한대이.”
그제야 성철의 마음을 알아챈 한약방 주인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이구, 큰스님 부끄럽습니다.”
“이제야 부끄러운 줄 알겠노. 당신이 참 신심에서 돈 낸 것인가. 저 간판 얻으려고 돈 낸 것이제.”

얼굴을 푹 숙인 한약방 주인이 용서를 구했다.

“큰스님, 잘못 되었습니다. 제가 몰라서 그랬습니다.”
“몰라서 그랬다꼬. 몰라서 그런 것이야 허물이 되나. 고치면 되제. 그라믄 이왕 잘못 된 거 어찌하면 될까.”

한약방 주인은 스스로 간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주지와 일타가 보는 앞에서 아궁에 넣고 불태워 없애 버렸다. 일타는 이러한 성철에게 더 의지하고 싶었다. 예전 삼일암 때나 지금이나 신심이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철도 일타가 마음에 들었는지 가끔씩 방으로 불러 짤막한 법문을 해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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