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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초의의순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차 한 잔 바람 한 줄기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네”

조선후기의 대선사이자 다성(茶聖)으로 일컬어지는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1866) 스님. 헌종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선사’라는 시호를 받을 정도로 폭넓은 사상과 삶의 모습을 보였던 스님은 정조 10년인 1786년 4월 5일에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났다.

당시 병조판서 신헌의 ‘초의선사탑비명’에 따르면 어머니가 큰 별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스님을 잉태했다. 또 다섯 살 때 강가에서 놀다가 급류에 떨어져 죽게 되었을 때 마침 부근을 지나던 사람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15세 되던 해 나주군 운흥사에서 대덕 벽봉 스님을 은사로 삭발 출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대흥사에서 완호대사를 계사로 구족계를 받고 초의라는 법호를 받았으며, 이후 쌍봉사로 옮겨 선을 배우며 참선에 전념했다. 이처럼 스님은 젊었을 때부터 제방의 선지식을 두로 참방하는 선승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선에만 치우치지 않고 교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눈 밝은 선지식을 찾아 천하를 주유하던 중 30세 되던 해 한양에 들러 여러 선비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다산 정약용과 절친한 교류를 했으며, 평생의 벗 추사 김정희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승과 속을 넘나들면서도 승속에 걸림이 없었고, 불경과 유학에 능통했으면서도 불교와 유교에 걸림이 없이 살았던 스님은 32세 때 경주 불국사에서 크게 깨달았다. 이 무렵 조선 말기의 불교계 2대 논쟁 중 하나였던 백파선사와의 선(禪) 논쟁이 있었으며, 특히 『선문사변만어』를 통해 부질없는 논쟁을 불식시키고 선가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9세 때 스님은 두륜산 중턱 울창한 숲 속에 단아한 암자를 지은 뒤 생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지내며 당대의 석학들과 교류하는 한편 후학들을 지도하고 올곧은 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산천초목 속에서 스스로 대자연이 되어 살았던 스님은 추사가 71세로 세상을 뜨자 그의 영전에 조문한 뒤 일체 문밖출입을 금하다가 1866년 8월 2일 세수 81세, 법랍 65세로 서쪽을 향해 가부좌하고 입적했다.

『초의집』, 곽의진 『초의선사』, 김영두 「초의의순의 선사상과 다도정신」, 종호 스님 「초의의순의 수행법과 선의 본질」, 이진오 「초의선사의 시세계」

▷초의(草衣)라는 법호 자체가 스님의 일생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 흔한 법명 같진 않은데 무슨 뜻이 담긴 걸까요?
“과일을 먹고 풀옷 차림이어도 마음이 달처럼 밝고 한평생 무념 무애하게 살아간다면 그런대로 자유로운 삶 아니겠소. 고려 야운 스님의 「자경문」에도 ‘나무뿌리와 나무 과실로 주린 창자를 달래고 솔잎과 풀옷(草衣)으로 벌거숭이 알몸을 가린다’는 구절이 있지 않소. 완호 대사께서는 내가 청빈한 선승으로 살기를 바라셨던 것 같으오.”

▷스님께서는 ‘경전과 선에 통달했으며 시, 글씨, 그림의 삼절이오, 특히 사라져가는 다도를 바로 세운 다성’이라는 칭송을 받습니다. 참선 하시던 스님께서 차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까?
“선(禪)이 수행의 길이듯 차 또한 그러하오. 내가 출가했던 운흥사 일대에 차나무가 많고 은사 스님께서 차에 깊은 안목이 있으셨던 것이 큰 인연이 되었겠지요.”

▷그래도 선과 차를 동일하게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아닐까요. 마시는 행위로 어떻게 성불할 있다는 것인지 쉽게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더욱이 예로부터 권력을 가진 이들이나 돈 많은 선비들의 차 마시기로 인해 차 재배를 하는 농민들이 혹사당했고, 차 농사를 지어 모두 상납하고 나면 그들은 먹고 살 곡식이 없어 거렁뱅이가 됐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규보 같은 분도 ‘차밭 모두 다 불살라 차의 상납 금하면 남녘 백성들 편히 쉴 수 있으리라’는 시도 남기지 않았겠습니까?
“선은 일심의 극치로서 적멸에 이르는 것 아니겠소. 가부좌를 틀고 오래 앉는다고 성불할 수 없듯 차를 마신다고 다 적멸에 드는 것은 물론 아니오. 허나 한 잔의 차를 위해서는 차를 심고 가꾸고 때 맞춰 따고 좋은 물을 얻어야 하오. 또 차를 끓이는데 중정(中正)을 얻어야 하고 그래야만 체(體)와 신(神)이 서로 중화하고 건(健)과 영(靈)이 서로 어우러져 하나가 될 수 있다오. 그러니까 다도는 자연을 내 안으로 끌어들여 느끼고 하나가 되는 것으로 욕심과 번뇌 이전의 본래진면목과 마주하는데 있다는 말이오. 이렇듯 차 마시는 행위가 일심의 경지에 이를 때 비로소 다선일여(茶禪一如)라 할 수 있소.”

▷그렇더라도 당시 차가 귀하고 이로 인해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었다면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호사스런 찻잔, 호사스런 다실, 호사스런 의복은 맑은 차의 기운을 오히려 탁하게 하오. 차는 고도의 정신집중과 함께 정성과 검소함의 극치라오. 그래서 불가에선 자신의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노동을 요구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차를 키우고 덖는 정성을 기울였던 거 아니겠소. 또 좋은 차의 즐거움을 이웃이나 벗과 아낌없이 나누려 했던 것이기도 하지요.”

▷스님께서는 시, 글씨, 그림 뿐 아니라 불화, 단청 등 불가사의하리만큼 재주가 많았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한 두 개도 쉽지 않은데 스님께서는 무슨 특별한 노하우가 있으셨습니까?
“선은 일심이오. 또 그 선은 자신의 생활과 동떨어져 있지 않소. 나는 그저 삶을 선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았을 뿐이라오.”

▷스님께서는 산승인 동시에 당대의 내로라하는 석학들과 교류했습니다. 다산 정약용, 완당 김정희, 윤정현, 신관호, 신위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은 물론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유도 스님께서 키운 제자라고 들었습니다. 스님들이 천민 취급 받던 시대에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나 싶을 정도입니다. 불경스러운 질문이지만 혹시 명리 때문은 아니겠지요?
“내가 먼저 찾아간 적도 있고 그쪽에서 찾아온 경우도 많았지요. 이는 내가 부족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때문이오. 익혀야 할 학문과 시를 배우자면 그들의 도움이 없이는 책 한 권 구하기도 쉽지 않았으니까요. 또 불교를 모르는 그들이 나와의 교류를 통해 조금이라도 알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요.”

▷많은 분들 중에서도 특히 추사와는 특별한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두 분 간에 오고간 막역한 편지 내용이 그러하고, 특히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 갔을 때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까지 위로를 갔던 것이나 그에 대한 제문을 쓰면서 ‘아름다웠던 우정 잊지 마시고 저 세상에서도 오래도록 이어나가자’고 쓴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두 분 관계를 연인 수준으로 보기도 할 정도니까요.
“추사는 서른 즈음에 만나 40년의 우정을 나눈 벗이자 서로를 절차탁마할 수 있는 스승이었소. 그가 글과 학문에 대한 토론을 할 때면 우레와 같이 당당했고, 정담을 나눌 때는 봄바람처럼 다정다감하여 따스한 햇살을 만나는 것과 같았지요. 예술과 진리를 탐구하는데 있어 참으로 둘도 없는 도반이었지요.”

▷그래도 참 의아한 게 추사하면 불세출의 명필인데 그 분과 그 오랜 세월 교유하면서도 스님의 서체가 추사를 본받을 법한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스님께서도 정말 대단하시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허허, 그가 내가 아니고 내가 그가 아닌데 어찌 같을 수 있겠소. 남의 것이 좋다고 평생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건 허수아비고 꼭두각시일 뿐이지.”

▷조선후기 남종화의 태두 소치 허유 선생은 그의 『소치실록』에서 평범한 세속의 사람으로 살아갔을 내 인생이 바뀐 것은 오로지 스님의 덕분이라며 ‘내가 비록 평범한 세속의 사람이지만 어찌 선사의 광채를 받아 그 빛에 물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빛을 받고서도 어찌 세속의 티끌과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스님께선 그 분을 어떻게 지도하셨나요?
“그가 나를 찾아왔을 때 그 초라한 모습 안에서 이미 비범함을 보았소. 소치는 그 스스로 능력을 드러냈을 뿐이오. 단지 내가 한 것이 있다면 그를 위해 늘 부처님께 기도를 드린 것뿐이라오.”

▷스님의 일생 중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백파선사와의 선논쟁일 것입니다. 백파선사의 조사선, 여래선, 의리선 등 삼종선에 문제제기를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깨달으면 교가 선이 되고 깨닫지 못하면 선이 교가 되오. 교와 선은 다른 것도 아니며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선이면 조사선, 교면 여래선이 되기 때문이오. 더 이상 무의미한 논쟁을 종식시키고자 했던 게 내 뜻이었소.”

▷마지막으로 요즘 사람들에게 당부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쥐려 말고 펴려 해야지요. 쥐면 쥘수록 사는 게 고단하고 각박해 진다오. 우리네 삶은 차 한 잔과 시원한 바람 한 줄기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찬탄과 공경

“그의 시는 놀랍게도 깨달음이 많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그 높은 품격이 마치 쟁반에 옥을 굴려 비스듬히 구르고 사뿐히 솟는 듯하여 밤톨을 떡가루에 묻힌 듯 능소화처럼 홀로 아름다웠다.”
 (조선조 문신 윤치영)

“19세기 초 무렵 대둔사의 명승 초의선사는 한국차의 중흥조이다. 초의와 추사는 서로가 서로를 드높여 이해하는 남다른 사이였다. 실로 다성(茶聖)과 서성(書聖)의 교유라고나 할까” (효당 최범술 스님)

“초의는 당대의 대선사였고 세상의 먼지와 소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소슬한 승려였다. 그는 사람이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긍정했다. 그는 지엄하고 단정한 선사인 동시에 멋쟁이 풍류 승려였다. 그의 다도는 감각적 세계의 아름다움을 선적인 자유의 경지로까지 이끌고 가는 마음의 행로이다.”
 (소설가 김훈)


초의스님 어록

“모름지기 모든 경전의 가르침과 달마조사가 서쪽으로부터 온 의미는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깨우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마음을 한 번 깨닫게 되면 자연히 차별됨과 이름, 형상들의 장애를 받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선종 문하에서는 닦음이 없음으로서 증득을 삼고 득을 버림으로서 증득하는 것이다. 닦음이 없기 때문에 곧바로 자기 마음을 보게 되고 증득을 버리기 때문에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게 된다.” 『일지암문집 중』

“북창에서 졸다 깨어 일어나니 은하수는 기울고 먼동이 트는구나. 온 산 높고도 깊은데 외딴 암자만 고요하고 한가롭네. 밝은 달빛은 누각에 비쳐들고 산들산들 바람 난간에 불어오네. 침침한 기운 나무를 덮고 차가운 이슬은 대 줄기에 흐르네.”

“들창에는 눈과 달이 밝게 비추는데 작은 선상 위에 몸을 세워 앉으니 옛이야기 요즘 이야기 세세히 더듬는데 놀라워라, 귀밑머리 하얗게 눈발 앉았구나. 온산이 흐려 기어이 눈 펄펄 날리더니 탑 주변에 사슴 발자국 찍혀 있네. 이쁘다, 그 슬기 누구한테 배웠는가 삶의 진리 너나 나나 다를 바 무엇이랴.” 『초의시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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