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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24. 연기①-오현 스님의 ‘아득한 성자’

기자명 법보신문

하루살이의 하루에서 삼세를 보다

<사진설명>수행자와 장애인. 아무 관계도 없어보이지만 이 두사람 사이에도 특별한 인과가 존재하고 있다.

불교철학에서 한 낱말만 남기라고 한다면 아마 많은 분들이 ‘연기’라고 대답할 것이다. 『잡아함경』의 말씀대로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니 저것이 일어난다.” 동쪽은 스스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서쪽과 ‘관계, 차이, 구조’ 속에서 “해가 뜨는 쪽”, “기세가 상승함” 등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실체를 보려 하지만, 모두 허상일 뿐, 거기 관계만 존재한다.

원인이 없는 결과란 없다. 개미가 기어가고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그 순간에도 온 우주, 온 우주의 생명체와 사물들이 관계한다.

하루라는 오늘/오늘이라는 이 하루에//뜨는 해도 다 보고/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죽을 때가 지났는데도/나는 살아있지만/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천년을 산다고 해도/성자는/아득한 하루살이 떼//

이것이 있어 저것도 있다

올해 정지용상을 받은 오현 스님의 ‘아득한 성자’라는 시다. 흔히 하루살이라고 하면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속성 때문에 ‘무상, 세월이나 인생의 덧없음, (하루 정도의 시야밖에 갖지 못하는) 소인배’ 등의 은유로 많이 활용한다. 하지만 위 시에서 ‘하루살이’는 성자의 은유이다. 하루살이가 어떻게 성자가 된단 말인가? 폴 리쾨르식으로 말하면 양자의 불협화음이 너무도 크다. ‘하루살이’와 ‘성자’ 사이의 불협화음을 연결하는 유사성은 “하루살이가 하루 동안에 해가 뜨고 지는 자연 운행의 시작과 끝을 지켜보면서 그 이상 볼 것이 없다며 안분지족의 풍요함 속에서 기꺼이 죽음을 택한다, 불에 달군 돌을 입에 물고 용맹정진하는 선사처럼 하루 동안에 탄생하고 성장하고 사랑하고 종족을 보존하는 등 일 분, 일 초에 모든 것을 다하여 압축적으로 하루를 산다.”라는 점이다.

표층적으로 읽으면 “하루라는 오늘”은 12시에서 24시간을 지나 다시 12시가 되기까지를 말한다. 하지만 이 ‘하루’를 ‘오늘’이 뒷받침하고 있다. 오늘은 지금 여기에 현재를 뜻한다. 불교의 시간관으로 보면 오늘에 과거의 과거로부터 미래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구세(九世)가 겹친다. 24시간을 하루로 나눈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분할일 뿐이다. 일즉다(一卽多)다즉일(多卽一). 이 하루가 중중무진의 시간을 담는다. 이런 시간관으로 보면 하루가 곧 전체의 시간이다.

초기 경전에서 연기론은 시간에 따른 인과관계를 뜻한다. 앞 장, 시간 편에서 제시한 구세론으로 이를 분석하자. 시적 화자가 지금 백담사에서 하루살이를 보며 깨달음에 이른 그 순간은 인연에 따라 구세가 한 순간에 겹쳐진 때이다.

과거의 과거는 예로부터 이 백담사에 부처가 상주하고 하루살이가 살던 일이며, 과거의 현재는 과거 성인이 부처가 되고 그 부처가 하루살이가 되었다가 다시 부처가 되는 그 순간에서 혹은 만해가 이곳에서 깨달음에 이른 순간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숱한 순간들이며, 과거의 미래는 이로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고 해탈을 이루는 어느 날이다.

현재의 과거는 지금 시적 화자가 성인의 삶과 깨달음, 자신의 삶에 대해 반추하는 일이요, 현재의 현재는 지금 여기에서 하루살이를 보며 깨달음에 이르고 그 깨달음을 시로 형상화하는 그 순간이요, 현재의 미래는 오늘 하루살이를 보고 깨달음에 이름에 따라 달라질 내일이다.

미래의 과거는 멀리로는 부처가 백담사에 나투신 때로부터 오늘 이 순간을 비롯하여 미래의 어제에 이르기까지의 순간이며, 미래의 현재는 이 백담사에서 다시 하루살이를 보며 깨달음에 이르는 바로 그 찰나며, 미래의 미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아우러져 다시 달라질 미래의 내일이다. 과거의 과거가 원인이 되어 과거의 현재를 이루고 그것이 또 원인이 되어 과거의 미래를 만든다. 현재의 과거가 원인이 되어 현재의 현재를 형성하며 다시 이것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 미래를 이룬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130억년의 기억 몸속에 남아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는 것 같지만 지금 나의 육체와 정신에도 350만 년 동안의 인류 역사와 이의 기억이 집적되어 있다. 암의 근본 원인은 스트레스다. 담배나 탄 음식 등은 매개체나 촉매제일 뿐이다. 왜 스트레스를 받으면 암이 걸리는가. 인류 역사에서 문명의 역사는 1만 년에 불과하다. 349만 년을 인류는 비문명적인 삶을 살았다.

밀이나 쌀 농사를 짓기 전 인류는 수렵생활을 하여 생존하였다. 문명사회에서 스트레스 요인은 인간관계이지만, 수렵시대 때 스트레스 요인은 인간보다 더 강한 동물을 만나는 것이었다. 이 경우 대개 피를 흘리게 되고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피를 빨리 응고시키는 쪽으로 진화하였다. 그것이 지금도 남아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피가 응고되고 그러면 영양분을 특정 부위의 세포에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게 된다. 이 경우 세포가 살아남기 위하여 수명시계를 끊어버리고 돌연변이를 일으켜 자신을 영원히 사는 세포로 만드는 것이 바로 암세포다. 공포 영화를 보면서 땀을 흘리는 것도 강한 동물에게 잡혔을 때 빠져나가기 위해 땀을 방출한 진화의 선택이 기억으로 남은 예다.

더 생각을 넓히면 오늘 나의 몸에 우주 130여 억 년의 기억이 잔존해 있다. 이처럼 과거가 인과관계를 가지고 수백억 년의 시간을 초월하여 현재를 만들고 미래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과거의 과거에서부터 미래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구세를 하루살이를 통한 깨달음, 화엄의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시간관, 연기론의 진리가 인과관계에 따라 회통(會通)하고 있으니 이것이 십세(十世)이다.

“뜨는 해도 다 보고/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는 해가 뜨고 짐을 말한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는 자연의 운행의 환유다. 하루살이는 하루에 우주가 창조되는 순간에서 우주가 마무리하는 찰나까지 모두 지켜보았다. 현대 인간의 관점에서 하루는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살이의 시각, 혹은 화엄의 관점에서 보면 하루는 무시무종(無始無終), 우주의 창조에서 마무리되는 그 순간까지 아우르는, 또 내일 반복될 것을 생각하면 영겁의 순환이 일어나는, 찰나이면서도 영원무궁한 전체의 시간을 담고 있는 그 순간이다. 하루가 영겁이고 이 영겁의 하루 속에서 하루살이는 우주의 모든 운행을 통찰한 것이다.

이런 것을 모두 깨달았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에서 알 까고 죽는 것은 생의 환유다. 불에 달군 돌을 입에 물고 용맹정진하는 선사처럼,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암 환자가 1분 1초에 모든 것을 투여하여 사랑하는 이들에게 무언가 의미를 남기려고 온몸을 다 바치는 것처럼, 하루살이는 하루에 모든 것을 바쳐 성장하고 사랑하고 알을 낳는다. 인간의 수명인 백 년이나, 우주가 운행하는 수 억 년이나 하루살이의 하루의 시간이 똑같이 대등한 가치를 지닌다.

이런 하루살이에 비하면 인간은, 수행정진하고 있다는 선사 또한 부끄럽기 그지없다.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나는 살아있지만/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은 하루살이에서 성자의 모습을 발견한 자의 자기 성찰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야말로 “천년을 산다고 해도/성자는/아득한 하루살이 떼”이다. 뒤 구절의 하루살이가 앞 구절의 하루살이와 수미쌍관(首尾雙關)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의미는 정반대다. 앞 구절의 하루살이가 성자의 은유라면 뒷 구절의 하루살이는 소인배의 은유다. 하루살이와 성자 사이에, 큰스님으로, 살아있는 성자로 존숭받고 있는 인간과 하루살이가 도치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시에서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이 같으며 하나가 바로 전체인 화엄연기론의 진리를 엿볼 수 있다.

수행자는 ‘그 하루’가 아쉬워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나와 관계를 맺는다. 가까이 주변의 사람, 내 얼굴에 비치는 햇살, 코를 드나드는 맑은 공기와 볼을 스치는 바람에서 멀리 한 점으로 빛나는 별들과 그 사이로 떠다니는 우주 먼지에 이르기까지 전 우주가 오늘 나라는 존재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데 관여하였고 관여하고 있고 앞으로도 죽 그럴 것이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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