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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 - 인연 48

기자명 법보신문

제 9장 발심수행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계율이 바로 서지 않으면 불교도 바로 서지 못해.
부처님께서 무엇을 지키라고 했는지 공부할 필요가 있어.
모르니까 엉터리 가짜 중들이 많지.”

해가 일찍 떨어지는 겨울이었다. 그러나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바다가 인접한 창원의 날씨는 포근했다. 그날도 눈이 오려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모래 덮인 경내와 요사 기왓장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초저녁부터 나직하게 들려왔다. 전쟁이 끝난 후의 어수선하고 남루한 분위기 속에서 오랜 만에 들어보는 정다운 겨울 빗소리였다. 방문을 열면 암막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도 ‘똑똑똑….’ 하고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가깝게 들렸다. 그날 밤에도 일타는 성철의 부름을 받고 조실채로 건너갔다.

“부르셨습니까.”
“이거 먹어 보래이. 마산 신도가 가져왔다.”

성철은 밀감 서너 개와 미군부대에서 나온 과자들을 내밀었다. 낮에 신도가 가져온 것을 먹지 않고 두었다가 일타에게 내놓고 있었다.

“귀한 것들인데 스님께서 드시지요.”
“나는 간식 같은 거 안 먹는대이.”
“보시한 신도가 알면 섭섭하겠습니다. 그러시지 말고 드세요.”
“중이 세끼 먹으면 됐지 간식까지 할 거 뭐 있노. 간식 좋아하는 중은 공부인이 아니다. 간식은 공부하는데 장애가 된다, 이 말이야.”

실제로 성철은 동안거 결제 전날 법당과 공양간에 있는 떡과 과일들을 모조리 마을사람들에게 내려 보내 없애라고 지시한 일이 있었다. 동안거 기간 중 단식하며 정진하는 가행정진 기간만큼은 모든 음식을 철저하게 금했던 것이다. 단식 기간이 지나고 나서도 성철은 세 끼 공양 외에 스님들이 삼삼오오 모여 간식하는 것을 싫어했다. 심지어 차를 마시는 것도 눈총을 주었다. 일대사 공부를 마치려면 잠을 자지 않고 해도 부족할 지경인데 중이 한가하게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질책했다.

“그런데도 왜 저에게 간식을 주는 것입니까.”
“일타는 예외다. 공부를 잘하고 있으니 상으로 주는기라.”

그러면서 성철은 자신이 제일 좋아한다는 중국의 조주선사 이야기로 법문을 대신했다.

조주스님의 공안 중에 이런 공안이 있다.

쇠부처(金佛)는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나무부처(木佛)는 불을 건너지 못하고
진흙부처(泥佛)는 물을 건너지 못하느니라.

스님은 남전 보원(南泉 普願)선사의 제자다. 법명은 종심(從)이다. 진부(鎭府)에 있는 탑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스님께서는 칠백갑자(120세)나 살았다. 무종(武宗)의 폐불법란이 있자, 저래산으로 피신하여 나무 열매를 먹고 풀옷을 입으면서도 승려로서의 위의를 바꾸지 않으셨다.’

스님께서 처음 은사스님을 따라 행각하다가 남전스님의 절에 이르렀다. 은사스님이 먼저 인사를 드리고 나서 스님이 절을 했는데, 남전스님은 그때 방장실에 누워 있다가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불쑥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서상원(瑞象院)에서 왔습니다.”
“상서로운 모습은 보았느냐.”
“상서로운 모습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만 누워 계신 여래를 보았습니다.”

남전스님은 벌떡 일어나 물었다.

“너는 주인 있는 사미냐, 주인 없는 사미냐.”
“주인 있는 사미입니다.”
“누가 너의 주인이냐.”
“정월이라 아직도 날씨가 차갑습니다. 바라옵건대 스님께서는 기거하심에 존체 만복하소서.”

이에 남전스님은 유나를 불러 말했다.

“이 사미에게는 특별한 곳에 자리를 주도록 하라.”

스님께서는 구족계를 받고 난 다음, 은사스님이 조주(曹州)의 서쪽 호국원(護國院)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돌아가 은사스님을 만났다. 스님이 도착하자 은사스님은 사람을 시켜 속가 부친 학()씨에게 알렸다.

“귀댁의 자녀가 행각 길에서 돌아왔습니다.”

학 씨 집안사람들은 몹시 기뻐하며 다음날 기다렸다가 함께 보러 가기로 했다. 스님께서는 이를 듣고 말했다.

“속세의 티끌과 애정의 그물은 다할 날이 없다. 이미 양친을 하직하고 출가하였는데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스님은 그날 밤 짐을 챙겨 행각에 나섰다. 이후 물병과 석장을 지니고 제방을 두루 다니면서 항상 스스로에게 말했다.

“일곱 살 먹은 어린아이라도 나보다 나은 이는 내가 그에게 물을 것이요, 백 살 먹은 노인이라도 못한 이는 내가 그를 가르치리라.”

스님께서는 나이 80이 되어서야 조주성(趙州城) 동쪽 관음원에 머물었는데, 돌다리(石橋)에서 십리 정도 되는 곳이었다. 그때부터 주지를 살았는데 궁한 살림에도 옛 사람의 뜻을 본받아 승당에는 좌선하는 자리나 세면장 등도 없었고, 겨우 공양을 마련해 먹을 정도였다. 선상은 다리 하나가 부러져서 타다 남은 부지깽이를 노끈으로 묶어 두었는데, 누가 새로 만들어 드리려 하면 그때마다 허락하지 않았다. 40년 주지로 사는 동안에 편지 한 통을 시주자에게 보낸 일이 없었다.

관음원 주지로 사는 동안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연왕(燕王)이 스님을 찾아왔다. 그런데 스님은 문 밖으로 나가 맞이하지 않고 선상에 앉은 채 기다렸다. 연왕의 장수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분개하여 다음 날 아침 스님을 추궁하려고 달려왔다. 스님은 장수가 온다는 말을 전해 듣고 선상에서 내려와 그를 영접하였다. 놀란 장수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화상은 우리 폐하를 선상에 앉은 채 맞이하였다고 하는데, 오늘은 어찌하여 선상 밖으로 나와 나를 영접하는 것입니까.”

이에 스님이 답하여 말했다.

“노승은 하등인(下等人)이 오면 몸소 삼문(三門)까지 나와 영접하고, 중등인(中等人)이 오면 선상을 내려와서 영접하고, 상등인(上等人)이 오면 선상에 앉아서 영접한다오. 만일 그대가 왕이었다면 노승이 나와서 이렇게 영접하지 않았을 것이오.”
장수는 스님께 예배하고 곧 물러가버렸다.

“이것이 조주스님의 가풍이대이. 쇠로 만든 부처는 용광로에 들어가면 쇳물이 되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 속에 들어가면 재가 되고, 진흙으로 만든 부처는 물속에 들어가면 뻘이 된다는 것은 일상사에서 보면 너무 당연한데 무슨 법문이 되겠느냐 생각할지 모르나 여기엔 참으로 깊은 뜻이 있는 줄 분명히 알아야 하는기라.”

성철은 일타에게 이런 법문도 해주었다. 역시 남전과 조주가 남긴 공안의 이야기였다.

남전스님 회상의 동당과 서당의 두 수좌가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는데, 남전스님께서 승당으로 들어와서 고양이를 치켜들면서 말했다.

“말을 한다면 베지 않겠지만, 말하지 못한다면 베어버리겠다.”

대중이 말하였으나 아무도 남전스님의 뜻에 계합하지 못하였으므로 남전스님은 당장 고양이를 베어버렸다.

스님이 늦게야 밖에서 돌아와 인사드리러 가니 남전스님이 낮에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해주고는 물었다.

“그대 같으면 고양이를 어떻게 살리겠느냐.”

그러자 스님이 신발 한 짝을 머리에 이고 나가버리니 남전스님이 말했다.

“만일 그대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스님이 남전스님에게 물었다.

“다른 것(異)은 묻지 않겠습니다만 무엇이 같은 것(類)입니까.”

남전스님이 두 손으로 땅을 짚자 스님이 발로 밟아 쓰러뜨리며 열반당으로 들어가 소리쳤다.

“후회스럽다, 후회스러워!”

남전스님이 듣고는 사람을 보내 무엇을 후회하느냐고 물으니 ‘거듭 밟아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하였다.

“이것을 남전참묘(南泉斬猫) 공안이라고 하는기라. 내가 ‘모란꽃은 마노 계단에서 피고 백설조(百舌鳥)는 산호가지에서 운다’고 평하겠으니 이 뜻을 알 것 같으면 남전스님이 고양이를 죽인 것이나 조주스님이 짚신을 머리에 이고 간 그 도리를 여실히 알 수 있을 것이야.”

일타는 1953년 겨울을 어느 해 겨울보다 훈훈하게 보냈다. 신심이 모닥불처럼 활활 타올라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이다. 성철의 법문을 간간히 들으며 참선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던 것이다. 동안거가 끝나는 날 일타는 성철에게 인사를 드렸다.

“스님, 저는 통도사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일타수좌 덕분에 나도 겨울을 잘 보냈대이. 난 다시 안정토굴로 돌아갈끼다. 거기가 내게는 더 깊은 청산이다.”

안정토굴이란 통영 안정사 계곡의 천제굴을 말했다. 성철의 도반들이 전쟁이 끝난 후 불교교단을 정화하겠다고 서울의 조계사나 선학원으로 올라갈 때 성철은 더 깊은 산중을 택했던 것이다. 왜색으로 물든 교단의 정화도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수행자로서 자기정화가 급선무라는 성철의 강철 같은 신념 때문이었다.

“저는 통도사로 가겠습니다.”
“그래, 전쟁도 끝났으니 출가본사를 찾아가는 것도 좋은 일이대이.”

일타는 성철과 헤어졌다. 성철은 천제굴로 떠났고, 일타는 통도사로 향했다. 그런데 휴전이 된 지 6개월이 넘었는데도 통도사는 전쟁의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일주문에는 ‘삼일육군병원’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경내는 적십자 마크를 그린 지프차들이 달리고 있었고, 요사채 방에서는 부상병들이 의무장교들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다. 어디서 실려 오는지 의무병들은 군용트럭에서 내린 환자들을 들것에 실어 나르고 있었다. 스님들이 차지하고 있는 법당은 보광전 뿐이었다. 일타는 자운(慈雲)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자운은 율사로서 통도사에 천화율원(千華律院)을 설립해 놓고 율장을 연구하고 있었다.

“스님, 적멸보궁까지 군인들이 차지하고 있다니 기가 막힙니다.”
“곧 철수한다고 하니 조금만 참고 지내세.”
“운허스님께 스님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속가에 묻혀 있던 운허를 설득하여 범어사로 내려 보낸 사람이 바로 자운이었던 것이다. 자운이 운허를 범어사로 보낸 것은 불학에 대한 그의 해박한 학식이 언젠가 종단의 큰 자산(資産)이 될 것으로 믿었던 까닭이었다.

“나야 뭐 아는 것이 율장 밖에 더 있어야지. 일타스님도 오늘부터 나와 함께 율장을 공부해 보는 것이 어떨까.”

자운은 일타에게 율장공부를 권하면서 그 이유도 말했다.

“계율이 바로 서지 않으면 불교도 바로 서지 못해. 부처님께서 무엇을 지키라고 했는지 잘 살펴보고 공부할 필요가 있어. 그래야 부처님 제자답게 중노릇을 할 수 있는 게지. 모르니까 엉터리 가짜 중들이 많지.”

일타는 자운의 얘기를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머릿속에는 성철을 만나 다졌던 참선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탐구심이 강한 일타는 빠른 시간 안에 율장을 열람하고 나서 참선공부에 전념하기로 했다.

“이왕 스님이 됐으니 율장도 한번 보겠습니다. 한두 달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일타는 자운의 얘기를 듣고는 놀랐다. 계율이 사미십계, 보살계, 비구계, 비구니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율도 제대로 공부하려면 몇 년이 걸리지. 사분율(四分律) 60권에 십송율(十誦律) 61권, 오분율(五分律) 30권,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40권 등 모두 천부대율(千部大律)이나 되지.”
“스님, 율장이 이렇게 다양한 줄 몰랐습니다. 저는 참선공부를 하겠습니다.”

일타가 참선공부하겠다고 하자. 자운이 야단을 쳤다.

“참선공부도 율장을 모르고서는 사상누각이야. 일타스님처럼 머리 좋은 사람이 율장을 보지 않으면 누가 보겠는가. 똑바로 보려면 통도사에 남고 그렇지 않으려면 아침 먹고 얼른 떠나게나.”

결국 일타는 토굴에 들어가 화두 들고 장좌불와 하겠다는 생각을 접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율장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왠지 율장이 일타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마음은 늘 통도사를 떠나 산중 토굴을 헤매고 있었다.

‘어느 세월에 율장을 다 보고 앉아 있을까. 이번에는 꼭 아침 먹고 통도사를 도망쳐야지.’

그날도 새벽예불을 마치고 난 일타는 좌선을 하면서 통도사를 떠나기로 몇 번이나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운이 또 나타나 일타 무릎 앞에 책을 놓고 갔다.

“이거나 보고 가게.”

『사미율의증주술의(沙彌律儀增註述義)』라는 책이었다. 결국 일타는 한 달 만에 『사미율의증주술의』를 다 공부하고, 또 자운이 건네주는 계율에 관한 책을 읽곤 했다. 그러기를 햇수로 2년을 지내다 보니 자운의 율맥(律脈)을 전수받게 되었고, 훗날 평생 어디를 가나 율장에 대해서 물어오면 자문에 응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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