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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쟁이가 되고 싶은 당신에게

기자명 법보신문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최순우 지음 / 학고재

9월의 독서는 좀 헐겁습니다. 8월의 찐득한 습기와 열기 속에서 졸음과 더위를 쫓으려고 화풀이하듯 전투적으로 읽어간 것이 여름의 독서라면, 열기를 식히려고 찬찬하게 비가 뿌리는 9월에 책을 읽는 내 모습은 긴 병에서 막 회복한 환자처럼 한없이 느립니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신 혜곡 최순우 선생의 글은 회복기의 환자처럼 아주 천천히 읽어가야 합니다. 글마다 어찌나 감칠맛이 나는지 문장 하나를 눈에 넣고 오래오래 꼭꼭 씹으면 글의 즙이 눈시울에 배어나옵니다. 흘러나온 즙으로 눈을 씻고 맑아진 눈으로 선생께서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자니 아하! 수십 년 전 서울이 저리 멋들어 졌었구나… 새삼스러워집니다.

“이제는 헐려 버렸지만 반도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보랏빛 저녁노을이 물드는 덕수궁 서녘 언저리를 바라보면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중얼거린 한 외국 지성인이 있었다. 또 해방 직후 비행기로 서울에 내린 미군 고위 장성 한 사람은 하늘에서 굽어본 서울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기자들에게 말한 적도 있었다.”(p.16)

혜곡 선생의 글을 읽자니 내게도 오래 전 어느 초겨울, 대학로 마로니에거리에서 흐느꼈던 그 알싸한 저녁 풍경이 다시금 생생해져 옵니다. 샘터사 옆 건물, 지금은 사라진 밀다원 2층을 나는 가급적 저녁 무렵을 골라서 찾아갔습니다. 그곳에 앉아 커피를 거푸 마시노라면 그 큰 유리창 저 너머로 온 세상이 붉게 물들어 갔고, 나는 빈 나뭇가지들이 천천히 어두워져 가는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때는 많이 가난했고 많이 아쉬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내 지갑에는 신용카드 대신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이 겸손하게 자리하였고, 빈 주머니에는 빈 만큼 대상을 바라볼 틈이 트였던 것 같습니다.

혜곡 선생께서는 그림이나 도자기에 숨은 멋도 들려주었습니다. “손으로 쓰다듬고 가까이서 돋보기를 들이대야 하는, 그리고 냄새를 맡는 그런 따위의 근시안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느긋이 물러서서 바라보는 아름다움에 늘 초점을 맞추어 온” 옛사람의 풍류를 가르쳐주면서 그림 속 인물을 냉큼 떼어내어 하나하나 짚어주는데 선생의 설명 속에서 사랑해 마지않는 마음이 어찌나 진하게 흘러나오던지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리도 찬찬하게 들여다볼 수 없으니까요. 선생의 애정 어린 설명을 읽고 그림을 보니 평소 당최 아무 매력도 느끼지 못했던 신윤복의 풍속도 속 꽃미남 꽃미녀들이 박물관의 어둔 조명에서 걸어 나와 살풍경한 21세기의 도심을 생생하게 활보합니다.

정말 멋쟁이가 되고 싶다면 자기를 멋지게 가꾸기 보다는 멋지고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는 눈을 갖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제 한 몸을 아무리 가꿔봐야 세월을 거스를 수도 없고 시퍼런 젊은이들 속에서 주책이라는 소리만 들을 뿐일 테지요. 구태여 아름답게 꾸미려 애쓰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니 시간을 초월한 아름다움이 거기에 있더군요. 안목을 키우는 방법을 배운 아주 소중한 9월의 독서일기입니다.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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