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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頓·漸 다투며 서로 인정하지 않는 건 잘못”

기자명 법보신문
  • 선정
  • 입력 2007.09.22 11:06
  • 댓글 0

간화선 실참자, 고우 선사에 선을 묻다

조계종 교육원은 간화선 실참자들의 수행갈증을 해소할 답을 찾기 위해 매회 주제를 달리해서 세미나를 열고 있다. 지난 9월 20일 오후 2시 봉은사 보우당에서는 그 네 번째 차례로 현재 한국불교에서 대표적 선승으로 꼽히는 봉화 금봉암 고우 스님을 초청해 ‘간화선의 요체와 화두 수행의 바른길’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듣고, 실참자들이 궁금한 점을 물을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됐다.

고우 스님은 평소 대중법문을 통해 강조했듯이 “무조건 앉아서 화두를 든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 먼저 정견을 갖춰야 한다”며 “정견을 갖추고 지혜를 구족하면 형상에 매이지 않고 본질까지 볼 수 있다”고 했다. 또 “선은 무아를 전제로 하고 이것을 가이드 삼아서 수행해 나가야 한다”며 “정견을 갖추고 가치를 알아서 화두를 들 때 순일하게 들리고, 이렇게 공부해 나가면 설사 깨치지 못해도 절대 후회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고 간화선 수행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의가 이어지는 1시간 30분 동안 진지함과 웃음으로 호응했던 300여 실참자들은 문답이 시작되자 조금은 긴장한 빛을 띠기도 했다. 그러나 무차선회의 선문답 형식이 아니라, 평소 실참 과정에서 궁금했던 점들을 묻고 답하는 자리였기에 분위기는 곧 진지모드로 바뀌었다. 이날 문답은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 세 명의 질문자를 사전에 지정, 대중들의 궁금증을 대신 묻도록 하고 중간에 대중들이 평소의 궁금증을 물을 수 있도록 했다. 먼저 칠불선원 수좌 선법 스님이 질문에 나섰다.

일상생활 중 화두에 집중하다보면 일을 놓치게 되고 일에 집중하다보면 화두를 놓치게 됩니다.

저는 정중이나 동중이나 발심만 제대로 되면 어느 쪽도 다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중공부를 하는 것은 동중공부를 잘하기 위함인데, 동중공부가 잘 안되는 것은 정중공부도 잘 안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하게 알고 싶어하는 마음, 즉 발심만 잘되어 있으면 동중공부든 정중공부든 다 잘 됩니다. 화두 집중과 생활의 이원화에 따른 문제가 아니라 발심의 문제로 봐야 합니다. 우리의 의식이 그렇게 되어 있고 존재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설법만 듣고도 아라한과를 증득한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공부해서 금강경을 줄줄 외우기도 하고 실참을 10년 20년 하는데도 알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처님 당시에는 말 한마디에 깨친 분들이 많이 있었고, 육조 스님도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사고나 가치관이 단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가치관이 너무나 다양합니다. 스님들도 내면의 가치를 찾겠다고 출가를 합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지금 전부 밖으로만 추구하고 있어요. 밖에 있는 것이 좋아 보이니까 안 믿는 것이지요. 이 세상 분위기가 그래요. 그러나 내면의 가치를 모르고 밖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부, 권력, 명예를 가졌어도 인격이 없어요. 진짜 상근기는 믿는 사람입니다. 그럴 때 깨달을 확률도 높습니다.

여러 수행자에게 동시에 일률적으로 화두를 줘도 되는지요.

원칙은 스님 말이 맞습니다. 수행자가 유에 막혀 있는지 무에 막혀 있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 집착을 하고 있는지 살펴서 거기에 맞는 화두를 줘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정도를 선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선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벽 스님이 임제 스님을 대우 스님에게 보낸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실이 그렇지 못합니다. 이렇게 볼 수 있겠지요. 여행사 간판은 있는데 유명무실해서 사장도 직원도 어디가고 심부름하는 사람 정도가 남아서 겨우 금강산 가려면 돈 얼마를 내고 어디로 어떻게 해서 가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여행자는 시원한 답도 못 얻고 돌아가는 꼴입니다.

선법 스님의 지정 질문이 끝나자 봉은사 상주 대중이라고 밝힌 스님이 경전 상에 나타난 신적인 개념과 신앙적인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고우 스님은 “부처님은 능엄경에서 경전의 말씀은 손가락이고 금강경에서는 뗏목이라고 정의했다”며 “육조 스님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보았듯이 경전을 보고 얼마든지 견성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다시 서울대 철학과 강사 변희욱 박사(치과 의사)가 지정 질문자로 나섰다.

간화선을 정립한 대혜 스님은 공안집을 불태웠는데 그러한 공안집을 봐도 됩니까.

뱀이 물을 먹으면 독을 만들고 소가 물을 먹으면 젖을 만듭니다. 공안집은 조사어록이고 조사 어록은 법문인데, 우리가 법문을 거부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결론적으로 봐도 됩니다. 제대로 잘 보면 소가 물을 먹어 젖을 만들 듯이 공부에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못 듣고 사량분별로 따져서 이해하고 자기 잘난 척 하는데 써먹는 경우는 독사가 물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정견을 갖추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견을 갖추면 순수해지고 순수한 마음으로 법문을 보고 듣게 됩니다.

역대 선사들의 말처럼 간화와 반조를 병행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간화를 하게되면 내 의식이 성성적적으로 변합니다. 반조는 두 가지인데 지혜로서 반조하는 경우는 성성적적이 되고, 회광반조(빛을 돌이켜서 반조)를 하면 적적성성이 됩니다. 방법만 다를 뿐이지 적적과 성성이 둘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아우러지면 적적성성이 되던지 성성적적이 되던지 하는 것입니다. 목표는 같은데 하나는 성성으로 출발하고 하나는 적적으로 출발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사람의 근기가 다르니까 반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반조를 시키고, 간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간화를 하도록 했지 특별하게 한가지만을 고집한 것은 아닙니다.

<사진설명>재가수행자가 고우 스님에게 화두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묻고 있다.

변희욱 박사의 질문이 끝나고 또다시 좌중으로 마이크가 돌아갔다. 한 보살이 “공부하다가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고우 스님은 “오온이 개공이라는 것을 보면 완성된 반야가 개발이 돼서 체험이 되고 매일 매일 좋은날이 된다고 했는데, 공에는 과거·현재·미래가 없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것”이라며 그 말에 깨닫는 분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화두를 들어 말 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자리에 부딪치면 주관과 객관이 없어지게 된다고 했다. 주관과 객관이 벌어져 있는 상황에서 도통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속에 치구심이 남아 있어 도인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스님의 설명이다. 이어 조계종 간화선 입문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수행 중인 김준영 연화원 사무국장의 질문이 이어졌다.

화두 타파 후에 공부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심우도를 통해서 어느 단계를 간화선에서 말하는 견성이라고 할 수 있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저는 심우도에서의 견성은 마지막 원으로 봅니다. 다른 사람은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지만 저는 원을 견성으로 보고, 중간은 견성이라고 안 봅니다. 원, 그때부터가 견성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마저 잊고 교화로 나서는 입전수수를 도인의 세계로 보고 있고, 앞의 여덟 구절은 수행과정입니다.

화두타파 후에 도인이 하는 공부는 어떻게 합니까.

원상이 견성이고 그때부터 도인의 생활이며 그 이외에는 ‘선 것이 익어가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돈오돈수에서 하는 말입니다. 반대로 발자국을 본데서 부터 견성으로 보고 보림을 통해서 원상까지 가고 원상을 통해 입전수수를 해야 한다는 것은 돈오점수입니다. 그러나 어떤 수행을 하던지 적적성성 성성적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불교수행입니다. 그렇다면 돈오점수는 적적성성 성성적적이 안되느냐 하면 절대 아닙니다. 다 되고 돈오점수도 좋은 수행방법입니다. 다만 조사선이 돈오점수에 해당하는가 돈오돈수에 해당하는가 이것이 다를 뿐입니다. 결코 수행법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서로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서로 외도라 하고 인정을 하지 않는데, 그건 다 잘못된 것입니다.

이어 봉은선원 선감 성묵 스님이 한 마디 물었다. “부처님은 염화미소를 보이시고 달마 스님은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부처님을 어떻게 표현하시겠습니까.” 찰나의 침묵이 흐르자 고우 스님이 미소를 지었다. 옛 스님들의 말후구에 나름대로 소견을 붙인 것으로 답을 대신하겠다고 한 스님이 “소에는 뿔이 없는 것과 같고 호랑이에는 뿔이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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