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발생 당시, 인도의 종교계나 일반사회가 초목도 윤회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에 반해, 불교경전에서는 초목의 영혼을 인정하는 교리는 발견하기 어렵다. 불교의 초목에 대한 입장은, 초목에 관한 대표적인 율 조문인‘괴생종계(壞生種戒)’를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이것은 초목에 상처를 입히는 것을 금지하는 율인데, 빨리율에서는 이 율이 제정되기에 이른 인연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부처님께서 아라비라는 곳에 머무르고 계실 때 어떤 비구가 나무를 잘랐다. 그런데 그곳에는 수신(樹神)이 살고 있어 화가 나서 그 비구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수신은 마음을 진정하고 부처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하여 다른 나무를 살 곳으로 얻게 되었다. 일반사람들은 그 비구의 행동은 하나의 감각기관을 지닌 생명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라며 비난했고, 부처님께서는 세간 사람들은 나무에 생명이 있다고 하는 생각(有命想)을 지니고 있다고 하시면서, 초목에 상처를 내거나 자르면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고 한다. 이 인연담으로부터 보건대, 불교수행자가 초목을 해쳐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초목에 살고 있는 수신 등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자, 초목도 생명을 지녔다고 보는 당시 일반 사람들의 통념을 반영한 결과이지, 결코 초목에 대한 불교승단 자체의 교리가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는 아닌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위의 율 조문에서 초목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부따 그라마(bhUta-grAma)’라는 용어이다. 부따는 생명을 지닌 것, 즉 유정을 의미하며, 그라마는 촌락이라는 의미이다. 즉 유정이 사는 촌락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불교교단이 초목 자체를 생명을 지닌 것으로 본 것이 아닌 생명을 지닌 것들, 다시 말해 벌레나 곤충, 혹은 갖가지 정령들이 모여 사는 하나의 마을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점은 한역율의 기술로부터 더 명확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십송율』에서는 이 말을 귀촌(鬼村)으로 번역한 후,‘귀촌이란, 생초목(生草木)을 말하는 것으로 중생의 의지처를 말한다. 중생이란 나무의 신, 개울의 신, 강의 신, … 모기, 등에, 장구벌레 등이다. 이들 중생은 초목을 집으로 삼고, 마을·취락·도읍으로 삼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초목은 수신이나 모기 등이 사는 곳이므로 손상을 입혀서는 안 된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판단하건대, 불교에서는 원래 초목의 영혼은 인정하지 않았으며, 초목을 해치는 것을 금지한 근본적인 이유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작은 생명들을 중시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의 수행자들이 들에 핀 풀 한 포기, 나무에 달린 과일 하나, 나무 한 그루 함부로 뽑거나 따거나 벨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이는 그 안에 있는 작은 생명에게 해를 입히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기반에 있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욕심대로 함부로 해서는 안 되며, 항상 주어지는 모든 것에 감사하며 오로지 수행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양으로 만족하는 소박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후 발전한‘초목국토실개성불(草木國土悉皆成佛)’, 즉 초목이나 국토와 같은 비정(非情)한 것 역시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사상의 배경에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소중함을 일깨우려는 의도가 담겨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밥상 위에 올려지는 한 그릇의 나물이든 사과 한 알이든 그냥 생겨나는 것은 없다. 대지와 비, 계절의 변화와 같은 자연의 조화, 그리고 때로는 인간의 노력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어찌 함부로 하겠는가.
도쿄대 외국인 특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