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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26. 연기③-‘똥처럼 살 일이다’

기자명 법보신문

밥의 순환 과정서 생사일여를 포착 누가 똥을 탓하랴

<사진설명>단 1초 사이에도 인간의 얼굴을 구성하는 세포는 헤아릴 수 없는 생멸의 변화를 갖는다. 그 속에서 너와 나를 구분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아주 오래 전 뒷산 관악 기슭 약수터에 갔다. 시간이 좀 허락하는 날이면, 약수터 옆 숲 속에 꽤 넓직한 바위가 있어 그에 올라 선정을 하다 가곤하였다. 그날도 여유가 있어 바위에 올라 가부좌를 틀었다. 얼핏 바람결에 모락모락 인분 냄새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냄새나는 곳을 향하니 풀 사이로 인분 앙금이 보였다. 누구인가 약수터에 왔다가 급했던 모양이다. 처음엔 머리를 돌렸다. 가만히 보니 인분에 뿌리가 닿아있는 민들레와 질경이가 다른 풀보다 키도 크고 때깔도 좋았다. 그때 느낀 것이 있어 지은 시다.

똥처럼 살 일이다./아무 데도 나서지 않고/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고/한 치 땅도 자기 자리가 아니라며/슬며시 사라지는,/똥처럼 살 일이다.//똥처럼 살 일이다./코를 움켜쥐고 내빼며 욕할수록/멀리 멀리 던져버릴수록/내리는 비에, 지나는 바람에/고요히 자신을 부수어/꽃을 피우는,/똥처럼 살 일이다.//똥처럼 살 일이다./다른 생명을 살리곤/죽어 황금색 덩이가 되었다가/다시 개나 돼지의 밥으로 태어나는,/똥처럼 그리 살 일이다.//내가 똥이 되고/네가 또 똥이 되어/밥이 똥이 되고/똥이 밥이 되며/삶이 죽음이고/죽음이 삶인/그런 세상에서 살 일이다.//

자신을 버려 식물을 키운다

몇 년 전만 해도 똥은 참 가치가 있는 사물이었다. 남의 집에 가서 놀다가도 대변이 마려우면 자기 집 변소로 쏜살같이 달려가야 했다. 이것을 가득 채운 똥장군 한 지게 값이 보리쌀 몇 되 값어치는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을 바가지에 담아 밭에 살살 뿌리면 죽어가던 채소들이 고개를 쳐들고 과일들은 열매를 주렁주렁 달았다.

이제 가장 더러운 것이 되어버린 21세기 중년의 창가에서 잃어버렸던 똥의 가치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그는 여러 미덕을 가졌다. 아무 데도 나서지 않고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꽁꽁 숨어 있으니 은일자중(隱逸自重)의 선비다. 자신의 능력이나 정체성에 대하여 지극히 작은 것조차 뭐라 내세우는 것이 없으니 겸양의 지존이다. 기껏 한 치 자리를 차지할 뿐인데 그 공간조차 자기 자리가 아니라며 내리는 비에, 지나는 바람에 자기를 해체하여 슬며시 사라지니 안분지족(安分知足)도 이 정도면 지나칠 정도다.

사람들은 이를 보는 순간 오감을 닫아버린다. 먼저 고개를 돌리고 일말의 냄새도 맡지 않기 위해 코를 움켜쥐고 될 수 있는 한 빨리 걸음을 재촉하여 멀리 내뺀다. 그럼에도 똥은 그 모든 수모와 비난을 온전히 자신의 가슴에 담는다. 자신을 보고 마음이 불쾌해진 이들에게 미안하여 비를 부르고 바람을 초청하여 자신의 몸을 통째로 해체해 달라 간구한다. 그리 자신을 산산이 부수어선, 온 식물들의 거름이 되어 꽃을 피우니 부처가 따로 없다.
 
똥과 밥이 하나 듯, 너와 내가 하나이고 삶과 죽음 또한 하나다. 내가 오늘 아침으로 먹은 쌀과 고기와 김치는 대상인데 어느덧 내 몸이 되었고, 몸이 되지 못한 것들은 똥으로 배설되었다가 식물과 동물의 양분이 되었다가 다시 내 몸으로 돌아온다. 나 또한 언제인가 죽어 묻혀 자연의 똥이 되어 어느 식물의 양분이 되었다가 훗날 어느 시인의 저녁 밥상에 오르게 되리라.

살자고 하는 행위인데 실은 죽자고 하는 짓거리가 밥을 먹는 행위다. 내 몸은 살지만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이 식사다. 살려고 먹지만, 먹는다는 것은 신진대사를 하여 내 몸의 세포를 죽음으로 내모는 과정이다. 이것이 삶의 역설이다. 밥과 똥을 매개로 우리는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인 이치를 깨닫는다. 현대화, 산업화, 도시화 이후 똥과 밥의 순환이 끊겨서인가? 삶과 죽음의 순환도 중단되었다. 사람들은 죽음으로 가는 완행열차임을 모르고 삶과 욕망을 향하여 치닫는다. 더 살려고 온갖 좋은 것을 구해 먹어대지만 적게, 덜 기름지게 먹는 것이 장수의 비결인 데서 알 수 있듯, 살려고 하면 할수록 죽는 것이다. 똥이 양분이 되듯이 죽는다는 것은 살리는 것이다.

무아의 장에서 말하였듯,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 인과관계를 형성하며 서로 의존하고 머뭄이 없이 찰나의 순간에도 변하기에 아(我)라 할 것이 없다. 공(空)하다. 연기와 공에 대해 두 관점이 맞선다. 중관학파의 청변(淸辯: 490~570)은 “세속성(世俗性)에 따르면 드러나는 것이 있고, 승의제(勝義諦)에 따르면 그것은 모두 공이다.”라고 말한다. 반면에 유식학파의 호법(護法: 530~561)은 “실법(實法)이 없다면 가법(假法) 또한 없다. 가법은 실인(實因)에 의거하여 시설(施設)하는 것이므로,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실유(實有)하는 것으로서 다른 것에 의지하여 시설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속유진공(俗有眞空)과 속공진유(俗空眞有)론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을까.

우리가 밥과 똥을 분별하여 보지만, 밥이 몸 안에서 양분이 되고 난 것이 똥이며 이것은 또 다른 몸의 양분이 되니 밥이다. 밥이 없으면 똥이 만들어지지 않으니 밥 없이 똥은 공하다. 똥으로 만들어져 냄새를 풍길 성분이 이미 밥에 있으니 밥이란 조건 없이 똥은 존재하지 못한다. 똥의 성분이 식물의 거름이 되어 식물이 되고 다시 밥이 되니 똥이란 조건 없이 밥은 존재하지 못한다. 그러니 속된 눈으로 보면 밥과 똥이 존재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바라보면 밥과 똥은 공하다. 이렇게 보면 속유진공(俗有眞空)론이 옳다.

승조(僧肇: 378~414?)는 모든 것을 공하다고 하는 본무론(本無論)에 맞서서 부진공론(不眞空論)을 편다. 모든 것이 자성이 없이 연기에 의하여 공이다. 그렇다고 없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연기에 의하는 것이지만, 가유(假有)의 형식으로나마 현상계의 사상이 존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완전히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인연을 따라 발생한 현상계의 사물은 가유이므로 실유(實有)는 아니다. 있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가유라도 현재 있는 것은 사실이므로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승조의 이런 논리를 속공진유(俗空眞有)론이라 할 수 있을까?

‘공’은 생멸변화의 조건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똥이 없으면 밥도 또한 만들어지지 않으니 밥은 똥 없이 공하다. 그러나 밥이 자신을 죽이면 똥이 되고 똥이 자신을 소멸시키면 밥이 된다. 원효(元曉)는 『금강삼매경론』에서 씨와 열매의 비유로 이에 대해 설명한다. 씨는 열매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공(空)하고 열매 또한 씨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이 또한 공하다. 그러나 씨가 죽어 싹이 돋고 줄기가 나고 가지가 자라 꽃이 피면 열매를 맺고, 열매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지만 땅에 떨어져 썩으면 씨를 낸다. 공(空)이 생멸변화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단 1분 1초 사이에도 인간의 얼굴을 형성하는 세포 가운데 수 백 개 이상이 변한다. 그러니 우리가 어느 사람을 볼 때 같은 사람의 같은 얼굴로 보지만 그것은 찰나의 순간에도 유사할 뿐 같지 않다. 그것에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착각이다. 공하다. 이에 대해 승조의 논리를 대입하면, 찰나의 순간에도 얼굴은 변하므로 공하지만 그 얼굴을 보고 누구라 부르고 그 또한 그 얼굴을 가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으니 가유라도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하고 서로 조건이 되고 인과관계가 되어 변하지만, 여기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람의 몸에 내재된 얼굴을 형성하는 원리다. 수 억, 수 조 개의 세포가 변하여도 이 원리에 따라 세포가 꼴을 짓고 작용을 하기에 그 사람의 얼굴은 유사성을 갖는다. 모든 것이 공하지만 이 원리는 존재한다. 우주 삼라만상이 공하지만 진아(眞我)는 있다. 이것이 바로 속공진유(俗空眞有)다. 그러니 분별심에서 바라보면 모든 것은 존재하지만, 연기의 사유로 보면 삼라만상이 공하다. 하지만 더 높은 차원에서 삼라만상이 공한 차원을 인식하면 그 모든 것을 공하게 하는 공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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