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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경허성우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禪은 비정하고 고독한 절벽 끝에서 완성된다네

구한말 조선의 불교는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오랜 세월 유교질서와 이데올로기에 밀릴 대로 밀린 불교는 대중과 격리된 채 떠돌았고, 출가자는 천민취급을 받아야 했다. 이런 탓에 스님들은 수행과 교학에 대한 탐구보다는 기복과 왕권의 안전, 세간적인 복을 비는 신도들의 입맛을 맞추기에 급급한 나머지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승가의 본분사는 찾기 힘들었다.

이때 사바에 홀연히 나타난 불세출의 선지식이 바로 경허성우(鏡虛惺牛, 1846~1912) 스님이다. 그는 정법의 기치를 높이 들고 선(禪)을 향한 각고의 정진과 깨달음으로 꺼져가는 한국불교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이는 곧 칠흑 같던 한국불교에 여명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기복에 찌든 조선불교의 구습을 깨부수는 거대한 축제이기도 했다.

1846년 8월 전주 자동리에서 태어난 스님은 그 시대가 그러하듯 어릴 때부터 격동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후 9세 때 청계사 계허대사를 은사로 출가했다. 나무하고 물 긷는 일로 나날을 보내던 스님은 14세 때 절에 와 머물던 선비로부터 글을 배웠다. 그의 비범함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한 번 눈에 스치면 배우고 듣는 대로 문리를 해석할 만큼 뛰어났던 스님은 동학사에서 경전을 배우기 시작해 불과 1년 만에 동학사 강원의 강사로 추대됐다.

온갖 경의 오의를 꿰뚫으며 드높은 대장경의 하늘을 비행하던 스님에게 일대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그의 나이 34세 되던 1879년 6월이었다. 환속한 옛 스승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서 천안을 지나던 무렵 콜레라가 만연한 현장을 체험한 후 “이 생애가 다하도록 차라리 바보가 되어 지낼지언정 문자에 매이지 않고 조사의 도를 닦아 삼계를 벗어나리라”고 발원한 후 동학사로 돌아와 방문을 닫은 채 참선을 시작했다.

졸음을 이기려 턱 밑에 송곳을 받치고 허벅지를 찔러가며 불꽃 튀는 정진을 했던 스님은 그해 11월 15일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는 소가 된다”는 얘기를 듣고 대오했다. 이후 스님은 전국 각지를 돌며 만공, 수월, 혜월, 한암 스님 등 수많은 이들의 눈을 환히 밝힌 뒤 1906년 함경북도 삼수갑산으로 떠나 그곳에서 갓 쓰고 훈장노릇을 하다가 1912년 4월 지상의 마지막 그림자를 거둔 채 본원청정불(本源淸淨佛)의 세계로 떠났다.


▷은사 계허 스님을 찾아가던 중 한 마을에서 전염병의 참상을 경험한 후 돌연 참선으로 선회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그곳은 현실화된 지옥도였고 난 그곳에서 공포와 절망, 무능력한 내 모습과 직면했네. 오랫동안 강단에서 앵무새처럼 떠들어왔던 무상(無常)은 관념의 유희요, 해탈은 언어의 장난일 뿐이었음을 뼈저리게 느꼈네. 옛 조사들의 말처럼 내 마음 속 무진장한 보배는 찾지 않고 남의 보배만 세는 꼴이었지. 불교의 진면목은 앎이 아니라 깨침에 있었던 거였네.”

▷『월인석보』에 ‘무릇 글이 경전이 아니며 경전이 부처가 아니다. 도를 설하는 자가 바로 경이며 도를 깨달은 자가 바로 부처이다.’라는 구절과 연결되겠군요?
“깨달음이 없다면 그 웅장한 팔만대장경도 번뇌의 대백과사전일 뿐이네.”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驢事未去 馬事到來)’는 화두를 참구하면서 다리를 찌르고 머리를 부딪쳐서 수마를 쫓았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스님을 정진토록 한 것은 무엇인지요?
“진리에 대한 허기지. 은산철벽 앞에 부딪친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스승은 어느 곳에도 없네. 오직 세상의 끝에서 서서 자기 자신과 비정한 혈투를 벌여야 하는 것이지. 진정한 선이란 이처럼 참으로 고독하고 비정한 세계의 절벽 끝에서 완성되는 것이라네.”

▷그렇게 힘들게 수행을 해서 깨닫는 것이라면 저 같은 근기 낮은 중생들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겠습니다.
“물고기가 물에 빠져 죽는다는 얘기처럼 오염된 폐수 속에서 등이 구부러지면서까지 적응해 살아가는 물고기가 되어 그래도 행복하다고 믿으며 서로 삼독의 화살을 겨누면서 살아가는 게 중생의 삶이지. 선은 자기응시를 통한 해탈의 도라네. 어리석음의 독화살과 싸우는 맞서 싸우는 무사의 칼이 바로 선이네. 생사가 걸린 문제에 어찌 근기 운운할 수 있겠나.”

▷선에서는 ‘대분심(大憤心)’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자비’가 아니라 ‘분노’를 강조하다보면 깨달으면 모르겠지만 과정 중에 화를 내거나 분노에 휩싸이지는 않을까요?
“선은 모든 광석을 녹여내는 거대한 용광로라면 그것을 펄펄 끓게 하는 게 바로 분심이지. 참선에서 원한과 분노는 외부 대상에 대한 게 아니라 끝없는 생사윤회의 미혹을 가슴 깊이 새겨서 불타오르는 원한과 분노를 품고 삶에도 철저하고 죽음에도 더 없이 철저하라는 것이네. 자기 자신의 숙업을 원한과 분노로 불태우지 않으면 어떻게 유구한 생사의 짐을 벗을 수 있으리오.”

▷‘콧구멍이 없는 소’라는 말을 듣고 아승지겁의 어둠을 밝히셨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선의 으뜸 되는 원칙은 ‘몸으로 직접 부딪쳐 연마한다(體究鍊磨)’는 거네. 그대의 부처는 그대 스스로가 증득할 수 있을 뿐이지. 내가 팔만 권으로 이를 풀어쓴다고 이를 알겠나. 다만 소가 콧구멍이 없으면 고삐를 묶을 수 없고 그러니 이리저리 끌려 다닐 일이 없겠지. 이게 곧 자유고 해탈 아니겠는가.”

▷오늘날 일부 스님들은 음주와 육식 등 자신의 막행막식을 스님의 무애행으로 합리화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 스님은 시에서 ‘술도 때론 빛을 내고 색(色) 또한 마찬가지/ 탐내고 성내고 번뇌는 영원한 것/ 부처든 중생이든 그런 것 난 몰라/ 일생에 할 일이란 주정뱅이 노릇뿐.’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누가 안목을 갖춰 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나의 무애자재한 삶을 온전히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입맛 따라 무수한 상(像)을 만들고 또 그것을 칭송하고 비난하는 것, 이것이 나 경허만의 비극이자 영광 아니겠는가.”

▷그렇더라도 출가자가 자신의 방에 여인을 재우고 술과 고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은 계율에서 어긋난 게 확실치 않습니까? 또 법당 안에서 법문을 들으려 하는 어머니 앞에 알몸을 드러낸 것도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암 스님도 ‘화상의 법화(法化)를 배우는 것은 옳거니와 화상의 행리(行履)를 배우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했던 것 아닐까요?
“그렇지, 내 지음(知音) 한암이 그랬지. 바른 법일지라도 삿된 견해를 가진 사람이 행하면 삿된 법이 되고, 삿된 법일지라도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 행하면 바른 법이 된다는 얘길세. 허나 세속 윤리는 선악의 행위를 윤리적 기준으로 삼고 있지만 불교에서는 선악의 이분법적인 기준을 뛰어 넘어 악조차도 수용하고 정화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네. 허나 내 경지에 이르지도 못하고 내 흉내만 내는 앵무새와 원숭이들이 있다면 그 또한 내 허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스님께서는 1899년 11월 선과 미륵사상을 결부지은 신앙결사를 주창하셨습니다. 그토록 선에 철저했던 스님께서 신앙결사를 하셨다니 약간은 의외라는 생각도 드는데 어떤 내용이며, 또 어떤 연유로 하시게 됐습니까?
“모두 미륵의 화신이 되지 않으면 이 세상은 정토가 될 수 없네. 미륵신앙결사는 바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 함께 미륵의 정토인 도솔천에 왕생하며 함께 불과(佛果)를 닦자는 비원이 담겨 있었지. 또 대중적인 신앙과 선의 만남으로 선이 갖는 대중적인 한계를 극복해 보려는 노력도 있었네.”

▷1904년, 스님께서는 먼 북방으로 떠나셨습니다. 당시 불교계의 대선지식으로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굳이 그렇게 떠나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아는 것 없이 헛된 이름만 높아지니 어느 곳에 몸을 숨길지 알 수 없었다네. 하늘을 나는 새들의 발자국처럼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처럼 진리를 실현했다면 그처럼 사라져 가는 게 순리 아니겠는가. 또한 『대반열반경』이나 「심우도」 에서 강조했던 삶도 그런 것 아니었겠나.”

▷스님께서는 처절할 정도로 고독한 수행자의 삶으로 일관하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대중들이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할 게 있다면 무엇인지요?
“한 세상 보내는 인생은 천리마가 달리는 것처럼 빠르고 덧없으며, 풀끝에 매달린 이슬과 같아서 위태롭기가 바람 앞의 등불이라네. 참되고 바른 수행이 아니면 어찌 생사의 업력에 대적하겠는가? 촌음을 아껴 정진하고 또 정진하라.”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경허집』, 일지 『삼수갑산으로 떠난 부처』, 한중광 『경허, 부처의 거울 중생의 허공』, 김지견 「경허선사산고」 등


경허스님 어록

‘홀연히 고삐 뚫을 곳이 없다는 소릴 듣고/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나의 집이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 없는 들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경허스님 오도송)

‘세속과 청산 어느 것이 옳은가/ 봄이 오니 성마다 꽃피지 않은 곳이 없다네/ 누군가 성우의 일을 묻는다면/ 돌계집 마음 속 겁(劫) 밖의 노래라 하리라.’ (경허집 중)

“어찌 금만 귀하다고 쌓아 두는가. 참으로 귀한 것은 청한(淸閑)한 물질 밖의 삶인 것을. 소나무 잣나무 우거진 천 길 골짜기를 바라보니 안개구름이 점점 피어올라 만 길이나 뻗치는구나. 기묘한 꽃은 변하지 않는 청춘의 색깔이며 이상한 새들이 서로 태고의 소리를 전하네. 흰 머리 날리는 속진에 물든 이들 어찌 이런 곳에 깃들여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으랴.” (경허집 중)


공경과 찬탄

“그 누가 이 말법시대에 장부의 뜻을 갖추어 자성을 철저히 깨침으로서 첫째가는 공덕을 성취하여 큰 지혜에서 우러나온 광명의 뜻을 다음에 온 500세 뒤에 널리 유통시킬 수 있었던가. 다른 사람 아닌 우리의 선사 경허화상이 바로 이러한 분이시다.” (한암 스님)

“경허성우 선사는 우리 조선불교계에 대하여 선종부흥과 현풍선양에 막대한 공로가 있을 뿐 아니라 종취(宗趣)의 깊고 현묘한 것과 문채의 명려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라. 현재 우리 조선 수좌로서 선사의 가르침에 은혜 입지 않은 자가 있겠는가.” (만해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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