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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27. 연기④ -충담사의 ‘안민가’

기자명 법보신문

‘왕-신하-백성’ 가족에 비유 화엄 이념 제시

<사진설명>경주 남산 삼화령 연좌대. 직경 2m에 이르는 이 연좌대 위에는 커다란 미륵불상이 있었고 신라 경덕왕 24년인 765년 3월 3일 충담사는 여기서 다공양을 한 후 서라벌 시내로 향하다 반월성 귀정문 앞에서 경덕왕에게 불려가 안민가를 부르게 된다.

임금은 아비여/신하는 사랑하시는 어미여/백성은 어린 아이라 할 때/백성이 사랑을 알리라//탄식하는 뭇 창생/이를 먹여 다스릴러라/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하실진대/나라를 보존할 길 아노라//아,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나라 태평하리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대에 백성들의 삶은 곤고하였다. 가뭄, 지진, 태풍, 혜성, 메뚜기 떼 출현 등 신라 역사상 가장 천재지변이 심한 시대였다. 이에도 불구하고 경덕왕은 구휼은 커녕 불국사와 석불사 조영 등 대형공사를 강행하여 백성들에게 엄청난 조세와 부역의 짐을 지게 하고 중국식으로 제도를 개혁하는 등 전제왕권을 강화하는 데만 골몰하였다.

애민 못하는 경덕왕 풍자

굶어죽게 생긴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까지 탈출하는 일도 빚어졌다. 경덕왕은 왕 24년인 서기 765년 3월 3일 경주 남산 삼화령 미륵불에게 차 공양을 하고 서라벌 시내를 향하던 충담사를 불러 백성들을 편안히 할 방략을 구하였다. 그러자 충담사는 이 노래로 화답하였다.

‘안민가’는 제목 그대로 백성들을 편안히 하는 노래이다. 그간 이 노래를 두고 향가 유일의 유교적 노래라는 설이 강하였다. 노래의 내용이 유교의 이념인 안민(安民)과 부합하고, 결구가 『논어』 ‘안연(顔淵)’ 편의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君君 臣臣 民民)”라는 구절과 거의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충과 효가 유교만의 덕목은 아니다. 안민은 불교에서도 중요한 이념이자 덕목이다. 또 그와 같은 논리라면 위 노래는 신라 당대에 호국 삼부경이었던 『금광명경(金光明經)』의 ‘사천왕호국품(四天王護國品)’과 『인왕경(仁王經)』의 ‘호국품(護國品)’ 문구와는 거의 전편이 유사하다.

『금광명경』 ‘사천왕호국품’에 “우리들 사천왕은 이제 이 나라의 왕 및 국, 인민으로 하여금 일체 안온구족(安穩具足)하고 근심과 재난이 없게 할 것이로다”라고 적고 있다. 이의 서장어 역본은 노래의 승구와 거의 같이 “이들 인왕(人王)의 모든 국토에 거주하는 일체 인민을 수호하라”라고 말한다. 『인왕경』‘호국품”에도 “나라가 어지러우면 귀신이 먼저 난을 일으켜 백성이 혼란에 빠지니…대왕이 이 경전을 읽는다면 호국할 뿐만 아니라 호복(護福)할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또 『승군왕소문경』에는 ‘안민가’의 초구와 거의 같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여러 인민을 보기를 꼭 자식같이 하며, 그의 인민 또한 왕을 부모와 같이 하라”라고 말하고 있다.

낱말 몇 개로 ‘안민가’를 불교의 안민호국사상(安民護國思想)을 반영하고 있는 노래로 단정 짓는 것도 안민가를 유교노래라 한 주장과 같은 오류, 즉 실증주의의 오류를 답습하는 꼴이다. 이 노래는 의상과 원효를 중심으로 당대를 풍미하였던 화엄철학의 연기론에 입각하여 치밀하게 구성된 노래다.

충담사는 가족의 비유를 통하여 안민(安民)의 대방(大方)을 펼치고 있다. 아니, 그러지 못하는 경덕왕을 풍자하며 충간을 하고 있다. 이 노래에서 사법계(事法界)는 삼산오악신의 출현으로 상징되는, 가뭄과 홍수 등이 거의 매년 끊이지 않는 데도 전제왕권 강화에만 혈안이 되어 중국식 제도개편, 불국사와 석굴암 조영, 황룡사 종 주조 등으로 백성의 삶을 압박한 경덕왕대의 백성이 절대 편하지 않은 현실이다. 이런 사법계를 보고서 충담사는 안민의 대방과 화엄을 이법계로 떠올린다.

충담사는 각자 별(別)인 백성과 신하와 왕이 상즉상입(相卽相入)해야 한다는 것을 이법계(理法界)로 유추하며, 이런 인식에 머물지 않고 이를 언어기호로 드러내고자 한다. 그대로 표명하면 서사의 양식이기에 사법계와 이법계를 드러내기 위하여 가족을 비유의 바탕으로 하여 이법계에서 느낀 이념들을 가족관계과 유사한 것으로 은유화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백성을 사랑하고 자식을 돌보듯 백성을 다스린다면, 나라가 보존된다고 외치고 있다.

‘임금은 아비여/신하는 자애로운 어미여/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할 때/백성이 사랑을 알리라’는 가족과 가정의 비유를 통하여 국가와 구성원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의상 등 당시의 화엄 사상가들은 화엄의 육상원융(六相圓融)을 곧잘 집으로 비유하는데, 기와와 서까래, 지붕이 세워지는 순간에 집이 세워지고 집이 서는 순간 기와와 서까래, 지붕도 의미를 드러내듯, 별(別)을 떠나서 총(總)이 없고 총(總)을 떠나서 별(別)이 없다. 백성, 신하, 임금을 떠나 국가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국가를 떠나 신하, 임금, 백성 등은 또 존재하지 않는다.(總卽別 別卽總 總中別 別中總)

국가도 사랑으로 맺어져야

사물이 연기원리에 의하여 생겨나듯 가족은 서로가 사랑으로 받쳐주어야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국가 또한 가족처럼 임금과 신하, 백성이 서로 사랑으로 맺어져야 하는 것이다. 임금과 신하, 그리고 백성은 서로 연기되어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으며 서로 조건이 되고 있다. 임금은 백성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 임금 스스로는 아무런 자성(自性)이 없다. 백성에 의해 성군도 되고 폭군도 된다. 신하와 백성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여기서 이들을 연기시키고 있는 원리는 사랑이다. 사랑에 의해 서로는 연기되고 있고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동인인 것이다.

‘탄식하는 뭇 창생/이를 먹여 다스릴러라/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하실진대/나라를 보존할 길 아노라’는 동(同)과 이(異)의 관계를 나타낸다. 대들보의 바치는 성질, 기와의 비와 햇빛을 막는 성질, 벽의 한기와 바람을 막는 성질이 모여 집이 무게를 이기고 유지되면서 한기와 바람, 비, 햇빛 등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주고 또 반대로 집이 이런 성질을 가져 대들보와 기와와 벽이 각자의 성질을 드러낸다. 이처럼 다류가 총상을 이루며 동상을 보이고, 각체가 동상을 이루며 이상을 나타내기 때문에 항상 이루어져야 할 것은 각자가 성질이자 모습인 이상(異相)을 지키는 일이다.(同卽異 異卽同 同中異 異中同). 즉 임금은 백성을 잘 먹여 다스려야 하며 신하는 위로 임금을 보필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잘 보살피며 백성은 이 땅을 사랑하고 지키겠다고 열심히 농사짓고 세금 등 집단의 의무를 다할 때 나라는 보존되고 번영하는 것이다. 임금과 신하, 백성 등 각자의 이상(異相)이 자신의 이상(異相)을 유지할 때 국가라는 동상(同相)은 드러나는 것이다. 반대로 백성이 탄압을 받고 신음을 하여 이상(異相)을 유지하지 못하면 국가라는 동상(同相)은 드러나지 않는다.

‘아, 아 !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나라 태평하리이다’는 이런 깨달음 뒤에 터져 나오는 자연스런 감정의 발로다. 기둥과 서까래, 벽이 모여 각자의 기능을 다하여 집이란 성상(成相)을 이루듯, 임금이 임금답게 신하가 신하답게 백성이 백성답게 자신의 괴상(壞相)을 유지할 때 그 성상인 국가는 태평할 수 있는 것이다.(成卽壞 壞卽成 成中壞 壞中成)

하나-전체가 상즉상입

그리하여 사랑이 가정이고 가정이 곧 국가이며 국가는 곧 사랑이라는 깨달음의 세계가 사리무애(事理無碍)법계이다. 사사무애(事事無碍)법계는 각각의 별인 임금과 신하, 백성이 사랑으로 상즉상입하고 서로의 이상을 잘 보전하여 나라란 성상을 이루고 더 나아가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각자의 괴상을 유지하여 나라의 태평을 성취하여 서로 원융(圓融)을 이루는 경지이다. 인다라망의 각 구슬이 우주 삼라만상을 담고 있고 이 구슬들이 서로를 비추며 무한대의 프락탈을 형성하듯, 너와 나는 물론 우리 앞에 떠다니는 티끌에서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서로가 깊게 상즉상입(相卽相入)하고 있다. 지금 내 눈동자엔 우주 삼라만상이 담겨 있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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