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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수월음관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내가 자비로우면 온 삶들이 자비의 꽃을 피우리라

수월(水月音觀, 1855~1928) 스님은 현대 한국불교사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던 경허 스님의 제자로 평생을 고통 받는 중생 곁에 머물며 아픔을 나눈 자비의 보살이다.

일제치하에 조선유민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간 스님은 밤에는 짚신을 삼고 낮에는 소를 치며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짚신과 주먹밥을 공양하는 등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 스님의 한 없이 맑은 삶은 텅 빈 허공처럼 자취 또한 남기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스님의 삶은 친분이 있거나 스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의 구전(口傳)에 의해 전해질 뿐이다.

수월 스님과 인연이 닿았던 이들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185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어린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머슴살이로 살아야 했다. 스물아홉살 되던 해 스님은 우연히 만난 한 탁발승과의 인연으로 입산을 결심했고, 그해 곧바로 경허 스님의 친형인 천장암 주지 태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하지만 글을 배우지 못했던 스님에게 경전공부는 쉽지 않았다. 이에 태허 스님은 공부 대신 땔나무를 해오는 부목(負木), 밥을 짓는 공양주 등의 소임을 맡겼다.

스님은 그저 묵묵히 일을 했다. 그러던 중 법당에서 흘러나오는 천수경을 듣고 이를 단박에 외워 나무를 하러가거나 밥을 짓거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항상 천수경이 입을 떠나지 않았다. 그 후 천수경, 그 중에서도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일심으로 독송하던 스님은 마침내 거대한 빛을 뿜어내며 ‘대비심다라니로 통달한 성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한 번 보거나 들은 것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고, 잠이 없어졌으며, 아픈 사람의 병을 단번에 고칠 수 있는 특별한 힘도 얻게 됐다. 그러나 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스님은 월정사 상원암을 비롯해, 묘향산 비로암, 금강산 유점사 등지를 돌며 끊임없이 정진했다.

이후 박해받는 조선유민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간 스님은 간도의 한 암자에서 밤에는 짚신을 삼고, 낮에는 소를 치는 소먹이꾼으로 일했다. 스님은 일을 해서 마련한 돈으로 주먹밥을 지어 굶주린 조선인들에게 나눠 주는가하면 병든 환자를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평생을 자비의 보살처럼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수월 스님은 1928년 7월 16일 간도의 한 계곡 바위 아래서 머리에 짚신을 올려놓고 알몸으로 앉은 채 입적했다. 세수 74세, 법랍 45세였다.


▷29세 때 출가했다면 꽤 늦었는데 굳이 출가하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예전에는 스님들이 탁발을 많이 다니셨지요. 그런데 어느 날 한 스님이 내 방에 머물게 됐는데 그 스님께서는 부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 분처럼 되려면 어떻게 수행해야 된다는 얘기를 밤새도록 들려주었어요. 한 집안에 천자가 네 명 나는 것보다 도를 깨친 참 스님 한 명 나는 게 낫다며 도를 통하면 그 공덕으로 모든 조상영령들과 시방삼세의 중생이 다 편안할 거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기쁘던지, 그 때 출가를 결심하게 됐다오.”

▷출가하신 후 스님께선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늘 천수경을 외웠다고 들었습니다. 천수경의 어떤 점이 그토록 좋으셨나요?
“관세음보살님은 늘 고통 없는 땅에 계시며 모든 중생들의 삶 앞에 자신의 고통 없는 세계를 활짝 열어 보이는 분이라오. 그렇기에 천수경은 끝없는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께 온 몸을 던져 욕심, 성냄, 어리석음을 없애고 끝내 깨달음을 이루고 말리라고 다짐하는 뜨겁고 간절한 바람이 담긴 노래지요. 그러니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래도 관세음보살님하면 그 앞에서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는 신도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보살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은 초기불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다분히 기복화된 불교 아닙니까?
“아미타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계신 관음보살님은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으로 중생을 보살피는 분이라오. 그 분께 기도해야 할 것은 ‘굽어 살피소서!’하는 식의 바람이 아니오. 내가 관세음보살님의 천한 번째 손과 눈이 되어 관세음보살님의 중생구제를 돕겠다는 서원이어야 하오. 그렇게 실천하다보면 참다운 지혜란 삶이 비어 있음을 보는 힘이요, 자비란 그 비어있음 가운데 피어나는 눈부신 꽃임을 알게 될 거요.”

▷스님은 혜월, 만공 스님과 더불어 경허 스님의 세 달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러나 다른 두 분이 화두를 참구했던 선사였던 것과는 달리 엄격하게 말한다면 스님은 선사라고 할 수는 없겠군요?
“참선이나 염불이나 다라니나 다 도를 닦는 방편이오. 선이라고 특별한 거 있겠소. 마음 모으는 것 아니겠소. 나는 순전히 천수대비주로 달통했지만 ‘이뭣고’를 하든 ‘옴마니반메훔’을 하든 마음만 모으면 되는 거라오. 그러니까 이번 생은 죽었다 생각하고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열심히 하다보면 뭐를 하든 똑같은 곳에서 만난다는 거지요. 나도 처음에 천수다라니에 집중해 외웠으나 나중에는 다라니가 내 몸 구석구석에서 쉬지 않고 흘렀다오. 밥을 먹을 때건 저녁놀을 바라볼 때건, 발을 헛디뎌 나뭇짐을 지고 구를 때건 다라니는 멈추지 않았소, 거기에 더 이상 나는 없었던 거지요.”

▷천장암에서 용맹정진하실 때 스님께서 방광을 하셨고 마을 사람들은 큰 산불이 난 줄 알고 달려왔다고 들었습니다. 훗날 두만강 너머 나자구에 머무실 때에도 호랑이가 스님을 따라다녔다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우리들 몸이 무량한 빛인데 방광(放光)이 뭐 그리 놀랄 일이겠소. 죽은 이를 다시 살리거나 병든 이를 고치는 일은 사람의 본바탕을 바꿔 자비와 지혜로 가득 찬 삶으로 만드는 일과 비교하면 자질구레한 일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는 수행을 옆길로 새게 한다오.”

▷그래도 스님께서는 그 후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고, 잠도 없어졌으며, 아픈 사람의 병도 대번에 고칠 수 있는 신묘한 힘을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스님께서도 그것을 종종 이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요. 인연이 닿는 대로 병을 고쳐주고, 비상한 기억력을 써야 할 때는 쾌히 그것을 스스럼없이 썼지요. 허나 거기에 매이지는 않았다오. 지혜의 눈으로 보면 초자연적인 신통력이라는 것도 지극히 정상적인 우주의 일에 불과하고 다른 일상사와 전혀 차이가 없는 까닭이오.”

▷스승인 경허 선사를 찾아 북녘 끝 삼수갑산까지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경허 스님을 만났을 때 경허 스님은 수월 스님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왜 그곳에 갔고, 경허 스님께서는 왜 모른다고 했을까요?
“나의 스승은 허공을 나는 새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었다오. 그 스승께서 이제 홀로 가라 하신 거지요. 나 홀로 바다가 되고 달이 되어 끝없이 출렁이고 노래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수미산보다 큰 스승의 은혜 앞에 정성껏 삼은 짚신 한 켤레를 공양으로 하고 돌아섰다오.”

▷두만강을 건넌 스님께서는 짚신 삼기의 명수라고 하실 만큼 많은 사람들을 위해 짚신을 삼으셨고 주먹밥을 만들어 보시하셨습니다. 그것도 마을 사람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소먹이 일꾼 노릇을 하면서 말입니다.
“나는 두만강 부근에서 살림도구와 어린 것들을 지고 업은 채 무리지어 떠나는 조선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났다오. 빈털터리로 흘러들어온 이들 조선 사람들에게 비록 한 끼나마 주린 배를 채워주고 먼 길을 떠나는 그들의 외로운 등을 토닥이기 위함이었다오. 신발은 삶과 땅을 이어주는 다리라 하지 않았소. 언젠가 희망을 성큼성큼 밟으며 돌아오길 발원했지요”

▷만년에 조선인들이 지은 화엄사에 머물며 그곳의 스님들뿐 아니라 금오, 청담, 효봉 스님 등 수천리를 걸어 찾아온 납자들에게도 가르침을 주면서 여생을 보내셨는데, 마지막에 짚신을 머리에 이고 알몸으로 앉아 입적한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죽음은 당하는 게 아니라 이루는 거라하지 않소. 74년간 내가 걸었던 길과 그 길에서 찾은 지혜를 말하고 싶었다오.”

▷너무 어렵습니다. 대중들에게 해주실 말씀은 없는지요?
“관세음보살님은 완성된 삶의 다른 이름으로 나 아닌 나를 보는 밝은 지혜의 바다이며, 너 아닌 너를 노래하는 따뜻한 자비의 고향이오. 내가 자비와 하나 되는 그 순간 온 세상 온 삶들이 자비의 꽃으로 피어날 것이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김진태 『물속을 걸어가는 달』 등


찬탄과 공경

“수월 음관, 그는 중생의 일꾼으로 태어나 중생의 일꾼으로 죽은, 보살의 화신이었다. 그는 삼매의 열매였고 자비의 빛이었으며, 보현의 메아리였고 문수의 꽃이었다. 수월이야말로 참으로 죽음을 온전하게 이룬 성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기에 앞서 벌거벗은 수월이 짚신을 머리에 이고 서쪽(열반)으로 간 뜻을 먼저 물어야 옳으리라.” (법조인 김진태)

수월 스님 어록

“참으로 사람 되기가 어렵고 천상천하에 그 광명이 넘치는 불법 만나기가 어려운데 말이지, 사람 몸 받아가지고도 참 나를 알지 못하고 참 나를 깨치지 못하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워디 있을 겨. 사람 몸 받고도 성불 못하면 이보다 더 큰 한이 워디 있을 겨. 부처님께서도 ‘나도 너를 못 건져준다. 니가 니 몸 건져야 한다’ 하셨어. 그러니 참 그야말로 마음 닦아가지고 니가 니 몸을 건지지 못하고 그냥 죽어봐라, 이렇게 사람 몸 받고도 공부를 이루지 못하고 그냥 죽어봐라, 다 쓸데없다. 어느 날에 다시 이 몸을 기약할 것인가.”

“열심히 혀라. 땅을 팔 때는 다만 땅만 파거라.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일없이 되는 공부라야 공부라고 할 수 있는 겨. 땅 파면서 오직 한 생각만 챙기고 그 밖에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일랑은 다 쓸어버려야 하는 겨. 이렇게 되어야 다만 밭일을 하는 것을 넘어 마음 밭을 일구게 되는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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