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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28. 공(空)①-‘달같이 둥그런 님을’

기자명 법보신문

내님 같다 가슴 절며
변치 않을 사랑 맹세
차고 지니 달인 것을

달 스스로 아무런 본질도, 존재의 실재도 나타낼 수 없으니 공하다.(無自性) 달은 또 그대로 지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차고 기울며 오늘 하루의 반달도 머무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변한다.(無常) 달은 달 스스로 달인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투사한 것이자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삼라만상을 갈라 그리 부른 것이다.

<사진설명>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다. 달이 밝다고 노래하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이 만들어 낸 생각일 뿐이다.

추석이 훌쩍 지났다. 하늘에 달이 보이지 않으니 벌써 달이 그립다. 한민족은 집단무의식적으로 달을 좋아하고 그리워한다. 님의 얼굴이 달이고 달이 님인 사람에게, 더구나 그 님이 멀리 떨어져 있는 이에게 달은 더욱 그리움의 표상이다. 달을 소재로 한 시조 가운데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필자가 절창으로 뽑는 시조 한 수를 소개한다.

달처럼 둥그렇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님을 하늘 높이 떠 있어 만인들이 우러러 보는 달처럼 마음속에 걸어두고 매일 매일 살뜰히 그리워했다. 오늘처럼 달 밝은 밤엔 더욱 님이 그리워 동구 밖으로 나와 달을 보며 저 달보다 더 환하게 빛나는 얼굴을 한 님이 저 달빛을 받아 훤히 꿈틀거리는 저 황톳길을 따라 오시기를 고대하지만, 과연 어느 달에나 만나보려나. 희붐하도록 밤새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아도 님은 오시지 않고 달은 이미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 님을 만날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어 올라 달처럼 둥글고 풍성한 가슴은 그를 품어줄 님을 만나지 못한 채 달 지듯 고개를 수그린다.

성-속-시간 아우르는 절창

순수한 우리말로 표현하기도 하였지만 반복과 압운을 적절히 이용하여 각 장의 첫 음절 뿐만 아니라 각 구의 첫 음절을 “”로 통일하고 중장의 첫구만 “”로 표현하여 “”의 통일과 “ㄷ”에서 “ㅅ”으로의 파격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달에 대하여 직유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직유는 신선하면서도 다양하다. 각 직유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는 각 비유마다 다르다. 달은 ‘님’이자, ‘만인의 표상’이며, ‘세월, 혹은 시간’이다. 더불어 ‘(님에게 안기기를 고대하는) 풍만한 가슴’이거나 ‘상심으로 둥그렇게 뚫린 가슴’이자 ‘세월이 감’의 환유다. “치”, “ 지 ”의 직유로 반복의 율격과 함께 내용에서도 날카로운 비유로 그리는 마음의 한을 서정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초장과 종장이 “ 갓치 두렷”으로 수미쌍관(首尾雙關)을 이루고 있다. 초장의 “ 갓치 두렷 님”이 달처럼 훤하고 아름답고 둥근 님이라면, 종장의 “ 갓치 두렷 가”은 그에 부럽지 않게 “둥글고 풍성한 가슴”이다. 이것이 님을 만나지 못하여 제 구실도 하지 못한 채 다시 님 없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반면에 “ 갓치 두렷 가”을 님을 만나지 못하여 달처럼 둥그렇게 뻥 뚫린 가슴으로 해석하면 형식상으로는 수미쌍관이나 내용상으로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 초장 첫구의 “달같이”가 달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구의 “달같이”는 달과 나의 거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자가 시각적이자 물리적이고 미적인 거리라면, 후자는 정신적 거리이자 일상적 거리다. 달의 환하고 찬란한 모습과 그를 바라보는 자아 사이의 거리는 달과 지구처럼 먼 거리인 것이다. 보기만 할 수 있을 뿐 만질 수도, 품에 안을 수도 없다. 자연스럽게 님과 나와의 별리의 거리와 이로 인한 자아의 슬픔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시의 압권은 “달같이 둥그런 가슴이 달 지는 듯하여라.”란 종장에 있다. 이 시조는 달에 다양한 은유와 환유를 부여하고 천상과 지상, 성(聖)과 속(俗), 이상과 현실, 님과 나를 하나로 아우르고 있다. 하늘 높이 떠 있는 달은 만인이 우러르는 님이자 이상이고 성스런 대상이다. 하지만 달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상의 한 속인으로 님과의 포옹을 열망하며 한껏 달뜬 내 가슴도 달처럼 부풀러 올랐다가 님이 영영 오시지 않자 달처럼 져버린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물리적인 공간을 정신적인 공간으로 상호치환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이 공간에 시간을 개입시켜 시가 갖는 지평을 삼차원으로 비약시키는 한편, 그 삼차원에 존재하는 시적 자아에 대해서는 시간에 따른 실존적 성찰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중장에서 “어느 달에 만나볼고.”라고 하여 이미 시간은 들어왔다. 종장에서 “달 지는 듯하여라.”란 기술로 인하여 시간은 시적 자아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오늘 또 님을 맞지 못한 채 달은 지고 그렇듯 세월은 또 무상하게 흘러가고 나도 그만큼 의미없이 늙어간다.”라는 의미가 숨어있다. 달을 반복하여 말하는 데 그치고 있는 것 같지만 각각의 달이 다른 의미와 세계를 안고 있고, 물리적 공간과 정신적 공간이 상호 치환하고 있는 위상에서 시간마저 결합하여 그 시공간에 놓인 존재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멜로 영화인 줄 알았는데 실은 심오한 철학 영화인 셈이다.

멜로 아닌 심오한 철학

이것이 이 시조의 올바른 해석일 듯하고 이제 공과 연관지어 해석해보자. 달을 님으로 보든 다른 무엇으로 보든, 시적 화자가 실제 그런 것이 아니라 관념 속에서 그렇게 규정한 것이다. 달이 님이 아니다. 달을 천상에서 환하게 빛나는 대상으로 만인이 우러르지만 그것은 스스로 빛을 발하지도 못한 채 햇빛을 받아 반사하는, 지구의 대지보다 작고 낮은 데 있는 지구의 조그만 위성에 지나지 않는다. 둥그런 보름달을 보고 님을 떠올리지만 보름달은 금세 반달이 되고 그믐달이 된다. 보름달을 보고 님 오기를 원망하는 것은 나의 마음일 뿐 님은 전혀 올 생각이 없다. 무엇보다도 님을 그리게 하고 님 오기를 고대하게 만든 그 달도 사라져버린다. 님도, 님에 대한 기대도, 님의 귀환도, 그리 상상하게 한 달도 모두가 공인 것이다.

하늘에 반달이 떴다. 스승은 물었다. “ 저 달이 무슨 달인고?” 사미승이 반달이라고 대답하자 스승은 일갈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햇빛을 받지 않아 보이지만 않을 뿐 반달의 어두운 부분도 분명히 있는데 햇빛에 반사되는 부분만 보고 반달이라 할 수 있느냐고.

보이는 것만 보려하나

그토록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다.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이다. 반달의 밝은 부분은 어두운 부분과 관계를 통하여 드러난다. 어두운 부분 없이 밝은 부분 스스로는 공하다.(關係性) 사람들은 어두운 부분을 의지하여 밝은 부분이 드러난 것을 보고 반달이라 말한다. 어두운 부분을 의지하지 않고는 반달은 드러나지 못하니 공하다.(相依性) 지구의 중력이 작용하여 지구를 따라 돈다는, 태양 빛에 반사된다는, 더 멀리로는 이 우주가 생긴 원인이 있었기에 저 달은 지금 반달로 있는 것이다.(因果性) 또 달은 스스로는 무엇이라 할 수 없다. 지구가 있기에 달은 존재한다. 지금이라도 지구가 사라진다면 달은 주위에 중력이 강한 어느 별엔가 이끌려 그리로 가게 된다. 달은 또 스스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달을 달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달 때문이 아니라 태양이나 지구와 대비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태양이 있기에 태양이 왕이라면 달은 왕비가 되고, 태양이 광명의 세계를 뜻하면 달은 어두움의 세계를 의미한다. 달 스스로 아무런 본질도, 존재의 실재도 나타낼 수 없으니 공하다.(無自性) 달은 또 그대로 지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차고 기울며 오늘 하루의 반달도 머무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변한다.(無常) 달은 달 스스로 달인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투사한 것이자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삼라만상을 갈라 그리 부른 것이다. 그러니 달은 실재가 아니라 카르마의 총합일 뿐이다. 공하다. 그러니 달을 달이라 말할 수 없다. 결국 모든 것이 공하다.(畢竟空)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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