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 가득한 현실의 따뜻한 대안
냉소 가득한 현실의 따뜻한 대안
  • 법보신문
  • 승인 2007.10.24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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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의 중국식당』
허수경 산문집 / 문학동네

아주 오래 전 남산이 통째로 바라보이는 어느 교수님 연구실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추위가 찾아들 때면 교수회관 전체가 적막 속에 잠기고, 취미가 별로 없는 나는 온종일 연구실에 틀어박혀 책을 넘기고 메모를 하였습니다.

아뢰야식, 말나식, 의타기성, 원성실성….

단어들은 생명을 잃고 남산의 낙엽처럼 자꾸만 내 입에서 허망하게 떨어집니다. 배가 고파질 때면 선배의 책상서랍을 뒤졌습니다. 노란 봉지에 들어 있던 립톤 티를 꺼내 설탕을 듬뿍 넣고 마셨습니다. 써늘한 연구실에서 홍차가 담긴 작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손을 녹이면서 나는 이렇게 춥고 배고픈데 저 단어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며 한없이 실망하였습니다.

허수경 시인의 산문집을 읽자면 그때의 내 모습이 떠오릅니다.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은 독일로 고대 근동 고고학을 공부하러 떠난 시인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 유학생 노릇을 하며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제 공부하는 인생을 풀어놓은 것입니다. 화라락 책장을 넘긴다면 “뭐 특별할 것 없는 자기 넋두리뿐이네”라고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백서른 아홉 개의 짧은 이야기와 아홉 개의 긴 편지 속에는 일관되게 흐르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시인은 책 속에서 하루가 다르게 바삐 변하고 흘러가는 세상에서 오래된, 아주 오래된,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만을 찾아다니며 암호 같은 문자들이나 해독하는 자신의 삶을 슬쩍 비관하기도 합니다. “이거야말로 밥만 축내고 있는 게 아닐까”하며 회의에 빠지다가도 고대의 문자로 쓰인 비명을 해독하다가 인간의 말이란 것이 처음에는 어떻게 비롯되었을까를 추리합니다. 그러다가 옛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내면서 현대인의 삶은 길고 깊은 강줄기처럼 옛날과 닿아있고, 예나 지금이나 산다는 것이란 그렇게도 조촐하게 따뜻하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안도합니다.

세상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며 자신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현실에 내어주고 악수하는 세태를 꼬집으려고 시인은 독일의 어느 사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평화주의자였다. 68세대의 일원이기도 했던 그는 녹색당 일에 평생을 바쳤다. 평생 돈을 버느라 시간을 소비한 적이 없다. 많은 68세대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는 소위 ‘대안적인 삶’을 살았다. 가족들은 현실적으로 무능한 그를 떠났다. 그들의 동료인 녹색당 사람들이 정권을 잡자 그는 녹색당에서 나왔다. 그리고 68세대들이 골방에 앉아 만들던 작은 소식지를, 지금은 잊혀져 아무도 만들지 않는 그 소식지를 다시 만들었다. 낮에는 공사장에 나가서 일을 했다. 그것으로 그는 빵을 벌었다. 아니 빵과 함께 담배도 벌었다. 그는 골초였다. 그러던 그가 올해 초 담배를 끊었다. 아주 단방에. 올해부터 담배세가 전쟁을 협조하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p.50)”

워낙 세상이 타락하여 옳고 그른 것의 기준마저 모호해지는 요즘입니다. 타락보다 더 무서운 것은 냉소주의입니다. 동서양을 넘나들고 고금을 오가며 풀어쓴 시인의 산문집에서 나는 근본에 충실한 삶이야말로 가장 따뜻한 혁명의 바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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