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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황도불교와 총후보국

기자명 법보신문

황국신민화 내몰렸던 조선불교의 슬픈 자화상

중·일전쟁 이후 31본산 주지들 일제 부역 본격화
‘생존위한 몸부림’ 변명 불구, 친일행적 역사에 남아

<사진설명>일본으로 강제 징용됐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참상.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도발한 이후 중국 대륙을 석권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15년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전시체제 하에서 조선민중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되었고, 종교 또한 민초들의 삶에 평화와 위안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총독부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으로 전쟁이 확대되자 불교계에도 수탈을 강화하고 전쟁참여를 강요하였다.

이 무렵에는 황도불교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는데 황도불교란 황민화정책을 불교계에 적용시킨 말이다. 황민화 정책은 조선인을 일본 천황의 충실한 신민으로 만드는 것으로 조선인 동화정책이다. 동화정책의 실상은 조선인의 생활을 경제·문화적으로 일본인 수준으로 끌어 올려서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자를 수탈하고 조선인을 전쟁에 협력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1929년에 미국에서 발생한 경제 대공황의 여파가 세계적으로 확산되자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대륙 침략을 감행하였고, 그것은 1937년 중일전쟁으로 확대되었으며 결국 1941년 2차 세계대전 참여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전시체제 하에서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 취한 정책은 두 가지로 대변된다. 하나는 전쟁물자를 지원하는 병참기지화정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시키고 일본인화하는 황민화정책이었다. 병참기지화 정책의 내용은 강제 징용제·징병제·정신대 근무령·미곡공출 등 이었다. 황민화정책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뿌리는 같은 조상이었다는 일선동조론과 천황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하지 않고 똑 같이 생각한다는 내선일체론이 주요한 내용이다. 구체적인 실행 방안으로는 황국신민서사 낭송·궁성요배·신사참배 강요 등이었다. 뿐만 아니라 말기에 가서는 우리말의 사용을 금지하고, 우리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름마저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는 창씨개명의 형태로 나타났다.

불교계에 황민화정책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전쟁터로 출정하는 병사들을 전송하고, 부상병들을 위문하는 일, 위문금 모금, 국방헌금을 기부하는 일, 전쟁터로 군인들을 찾아가서 위문하는 일 등에 참여하였다. 나아가서 집집마다 방문을 해서 탁발을 하여 국방헌금으로 기부하는 일, 근로보국대를 조직하여 농어촌의 일손을 돕는 일, 시국강연회를 열어 비상시국에 대처 방안을 선전하는 일, 창씨개명 상담소를 운영하고 선전하는 일 등이었다. 당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이러한 일에 앞장섰으며, 이러한 일은 후방에서 전쟁을 지원하는 일이었으므로 총후보국이라고 하며, 종교계의 전쟁참여는 종교보국이라고 하였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직후 1937년 7월 17일 31본산 주지회의 의장인 이종욱은 총독부를 방문하여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이던 김대우를 만나 중일전쟁에 협력하는 방안을 논의하였다. 다음 날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비상시국 극복 방안의 하나로 31본사는 7월 25일과 8월 1일, 각 말사와 포교소는 8월 1일 새벽 5시에 국위선양무운장구기원제를 봉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교무원은 19일 이 결정사항을 전국의 사찰에 공문으로 발송하였다. 이어서 교무원은 전국 사찰과 포교당에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릴 것과 위문금을 모급하고 각 부대가 출정할 때 전송하는 모임에 참석하고, 전사하거나 병사한 군인들을 조문하고, 영가를 천도하는 등 총후의 임무에 충실할 것을 지시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지 1개월이 지난 8월 8일 이종욱·임석진·황금봉 등 교무원 간부들은 출정부대 송영식에 참석하였다. 출정부대 송영식은 이후 자주 있었으며, 그 때마다 교무원의 간부들은 번갈아 가면서 참석하였다. 교무원은 또 군대에 입대한 군인과 그 가족들에게 위문금을 전달하기 위한 방안을 협의하였다. 8월 19일 이등박문을 추모하기 위해서 건립된 박문사에서는 ‘국위선양 북지사변 전·병사자 위령대법요 겸 시국강연회’가 개최되었다. 총독부는 시국의 중대성을 조선인에게 널리 알리고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고자 하였으며 그 전위에 종교계를 앞세우고자 하였다. 이러한 총독부의 요구를 수용한 종교계는 수시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불교계도 이 자리에 참여하였다. 연사는 주로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던 몇 안되는 학승과 일본 유학을 다녀 온 승려들이 나섰다. 시국강연회는 전국적인 순회 강연의 형태로 시행되기도 하였고, 때로는 시·군 단위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교무원 간부 승려들과 학승들은 전사자를 조문하고, 위로하는 역할도 하였다. 이들은 전사자의 영전에 분향하고, 독경을 함으로써 억울하게 죽어간 젊은 넋을 위로하였다. 승려들이 위로한 그 젊은 넋은 그들이 전쟁터로 나가서 대일본 제국을 위해 용감하게 싸워야 한다고 역설한 그 권유를 듣고 전장으로 나갔다가 죽은 청년일지도 모른다.

<사진설명>『불교』 신20집(1940.1)에 실린 「내선일체와불교도」.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으므로 함께 전쟁에 동참해야 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불교계의 대표적인 학승 권상로는 1931년에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는데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8월 6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주최한 시국인식 강연에서 「선각자로서」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일본은 전쟁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1938년 2월 조선의 청년들에게 지원병제를 실시하여 생명을 바칠 것을 강요하였다. 그는 당시 불교계의 유일한 신문이었던『불교시보』제57호에 「승려지원병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 요지는 조선에서는 아직 징병령이 시행되지 않아서 병역 의무를 행하려는 청년들이 있어도 길이 없어 안타까웠는데 이번 제3회 지원병 모집에는 6만 명이 넘었다고 하며, 그 중에는 청년 승려들도 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불교도로서 탈선적인 행동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본령 중의 하나이며 조선불교에 있어 이채를 가지고 있는 특색의 조건이라고 하였다. 일본은 1940년 2월 11일부터 조선인의 창씨개명을 실시하였는데 창씨개명은 조선 청년들의 지원병제 실시와 관련이 있다. 창씨개명의 목적 가운데는 조선인이 일본 군대에 편입되었을 때 일본식 이름이 아닌 조선인의 이름으로 불릴 때 나타나는 군대 내에서의 이질감을 해소하기 위한 측면이 있었다고 한다. 총독부는 끊임없는 시국 강연과 좌담회 등을 통하여 위문금과 국방헌금을 납부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강요는 승려들을 통하여 신도들에게 전달되었고, 교계의 언론은 이러한 사실을 아름다운 미담으로 소개하였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들에게는 후방의 지원이 무엇보다도 필요하였다. 이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위문단 파견이 교무원 차원에서 논의되었다. 1937년 11월 2일 중앙불교전문학교 강당에서 31본사 주지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 회의 결과 위문금 5천원과 위문사 3인의 경비 1천원 모두 6천원을 모금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금액은 각 본사별로 할당하여 11월 20일까지 교무원으로 납부하기로 하였다. 파견 위문사는 이동석· 최영환·박윤진으로 결정되었다. 이들이 선발된 배경은 세 승려는 모두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로서 일본어에 능통하며 나이 30세 안팎의 촉망받는 인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인 이종태에게 악사 3인을 추천하라고 하여 이종태 본인과 체신국 음악부의 문학준과 보리도루(ポリトル) 레코드 회사의 전속 가수인 윤건영이 선발되었다. 위문단 일행은 피복·방한구두·모자·약품·악기 등의 물품을 주문하고, 종군면허증과 완장 등을 20사단으로부터 교부 받고, 종로경찰서로부터 여행증명원을 받아서 12월 22일 봉천행 기차를 타고 출발하였다. 이들 위문단 일행은 중국의 신안주·천진·봉천·산해관·북경·석가장·태진·태원 등지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고 이듬해인 1월 18일 29일간의 일정을 바치고 귀국하였다. 이들은 도착 즉시 조선신궁을 참배하고, 이어 총독부를 방문하여 정무총감과 이하 국·과장에게 귀국 인사를 하였고, 밤에는 경성의 유지 36인이 베푸는 환영연에 참석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총독부는 물질적인 면에서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정신적으로는 동화정책으로 수탈을 강화하였다. 불교계는 이렇게 강화된 수탈정책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민중들에게 전가되었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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