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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만해 용운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그 길이 옳다면 칼날에 올라서도 피하지 말라

‘풍란화(風蘭花) 매운 향내 당신에야 견줄 손가/ 이 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토(佛土)가 이외 없으니 혼(魂)하 돌아오소서.’

1944년 6월 29일. 해방을 불과 1년여 남겨두고 만해 한용운(1879~1944) 스님은 파란만장한 삶을 접어야 했다. 구국의 기도로 인한 과로, 갑자기 발병한 중풍, 영양실조 등이 그 원인이었다. 위당 정인보(1892~?) 선생이 애도사에서 묘사했듯 만해는 끝이 보이지 않는 역사의 내리막길에서 홀로 매운 향내 뿜어내던 고고한 풍란이었다.

1879년 홍성에서 태어난 그는 한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다가 27세 때인 1905년 연곡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임제종 운동을 전개해 전통불교를 지키려 노력했으며, 중국과 시베리아 등을 유랑하며 힘없는 민족의 서러움을 뼈 속 깊이 체험하기도 했다.

1913년 귀국 후 스님은 항일운동을 본격화하는 동시에 『불교대전(佛敎大典)』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등 저술과 잇따른 강연회를 통해 종래의 무기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주장했다. 특히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온갖 고문에도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당당히 밝힌 유일한 대표로도 유명하다.

3·1운동 이후에도 스님은 신간회나 항일단체인 만당 등 활동을 주도했으며, 이와 더불어 1926년 발간한 『님의 침묵』은 그 시대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송되고 있다.

만해 스님은 66년의 그리 길지 않은 생애 동안 수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스님은 선의 묘리(妙理)를 꿰뚫은 선사였고, 방대한 경전을 주제별로 정리한 교학자였으며, 죽는 날까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독립운동가였다. 또 모국어로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한 탁월한 시인이었으며, 교양잡지 『유심』과 『불교』를 발행한 언론인으로서도 한 획을 그었다.

스님이 그렇게 다면불(多面佛)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불교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어떻게 이 역사와 삶의 현장에 뿌리내리게 할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을 돌아보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옳은 일이라 하면 용감하게 그 일을 하여라. 비록 그 길이 가시밭이라도 참고 가거라. 그 일이 칼날에 올라서는 일이라도 피하지 말라”고 강조했던 만해 스님. 그는 중생에게 새벽을 알리는 보살로서, 고통 받는 중생을 싣고 고해를 건너는 나룻배로서 그렇게 한평생을 살았던 선지식이었다.

▷조선불교를 확 바꾸어야 한다는 ‘유신론’을 강력히 제기했습니다. 심지어는 염불당까지 폐지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너무 극단적인 것 아닌가요?
“전통은 당연히 계승돼야 하지. 그러나 기복행위나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점들조차 전통이란 이름으로 정당화돼선 안 되네. ‘제행무상’을 강조하는 불교가 오히려 변화하지 못하고 옛 틀에만 안주하려 한다면 불교는 결국 박물관의 유물로 남게 될 것이네.”

▷그래도 스님들께서 주장하신 취처론(娶妻論)은 지금까지 논란이 많습니다.
“나는 스님들이 결혼을 해야 한다고 했던 게 아니라 자율적인 의사에 맡겨야 한다고 했네. 당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직면해 있고, 스님들이 부족해 절이 폐사지로 변하는 곳이 많았지.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나온 고민이었네.”

▷3·1운동 직후 재판장에서 ‘내 육신이 죽어 썩어 문드러진다면 정신이나 영혼이나마 영원토록 민족운동을 해 나갈 것이다’라고 밝혔듯이 스님은 입적하는 날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은 당당한 독립지사로 살았습니다. 그토록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자는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지. 그런 까닭에 조선의 독립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요, 침략주의에 대한 약소민족의 해방 투쟁이었네. 중생은 업력(業力)으로 살고 보살은 원력(願力)으로 산다는 말이 있지 않나. 내게 그 일은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었고 불교 정신을 이 땅에 되살리는 길이었다네.”

▷그런데 스님께서 굳이 공약삼장을 써야 했던 이유가 있었나요? 혹 육당 최남선 선생에 대한 불만 때문은 아니었나요?
“나는 처음 육당이 독립선언서를 쓴다고 할 때부터 반대했네. 중차대한 민족적인 거사에 자신은 정치와 거리가 있는 선비라며 한 발을 빼고 있었네. 더욱이 그가 보내온 글은 화려한 미사어구로 대의명분을 밝히고 있지만 정작 이날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실천 강령은 쏙 빠져 있었네. 이것 때문에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내용을 추가했던 것일세.”

▷도장만 찍으면 성북동 일대의 산림 20만평을 주겠다는 조선총독부의 제안을 거부했던 것은 그렇더라도 오랜 동지였던 최린이 몰래 놓고 간 돈까지 쫓아가 돌려주고 온 것은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도 영양실조로 고생했다고 들었지만 식구들도 함께 굶주려야 했을 테니까요.
“그렇지, 지금도 그 땔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오네. 허나 그것도 나와 인연을 맺은 업이니 어쩌겠나. 1911년 가을일 거네. 만주지역을 만행할 때 나를 일본 첩자로 오해한 조선 청년들로부터 머리에 총을 맞았네. 당시 사경을 헤매다 관음보살님의 가피로 겨우 살아났네. 그 때 나는 앞으로 불법대로 살겠노라고 서원을 세웠다네. 아무리 좋은 이념을 갖고 있더라도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좋은 씨앗이 있으면서도 심지 않고 봉지에 넣어 매달아 두는 것과 같지. 하지만 내가 옳지 않은 것과 타협하지 않고 꼿꼿이 진리의 길을 걷는 그 자체가 진리의 씨앗을 땅에 심는 거라 믿었다네.”

▷스님께서는 선사, 불교학자, 독립운동가, 시인, 소설가, 언론인으로서 역사의 한 획을 그었습니다. 어떻게 다방면에서 큰 업적을 이루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중생 중생이 동일한 불성이요, 천부인권이 평등하거늘 열자(劣者)는 스스로 열자가 될 따름이요, 패자(敗者)는 스스로 패자가 될 따름이네. 게으름과 나태가 실패의 원인일 뿐 원력을 세우고 노력한다면 그 무엇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얘기일세. 발아래를 보게. 발을 붙이고 선 땅을 보게. 발을 내려놓을 그 앞을 보게나. 달려갈 자는 전신으로 준비해서 함께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네.”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불교의 정치참여가 어디까지 이뤄져야 하는가를 놓고 논란이 많습니다. 일부 스님들은 정당 활동과 특정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과거의 불교는 권력자나 부유층과 결합해 망했네. 권력과 부호와 야합해 안일에, 탐욕에 그 생명의 태반을 잃었던 거지. 그러나 불교는 원래 계급과 차별을 거부하고 평등의 진리를 선양하지 않았는가. 불교가 정치에 깊이 개입할수록 부패는 필연적이네. 불교의 발전은 권력계급과의 관계에 있지 않고 민중의 신앙을 세우는데 있다네.”

▷요즘 불교계가 사회적인 지탄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불교에 거는 희망 때문이네. 민심을 이끄는 것은 정치나 법률, 군대의 힘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성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종교의 힘이 있을 뿐이네. 특히 자비, 평화, 평등 정신을 두루 갖추고 있는 불교는 이 시대의 희망이라네. 법(法)이 자기에게 있는 줄은 알지 못하고, 중도에서 방황하며 부질없이 부처님만 섬기면, 곧 세월만 허비하는 게지. 스스로 부처인줄 알아 자기의 마음을 부지런히 닦아 나가고 모든 중생들에게 참다운 자비심을 베풀 때 참다운 부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네.”

▷마지막으로 대중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시대를 가장 암담하다고 생각하기 쉽지. 일제시대도 마찬가지였지.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것이 오히려 시대의 행운이었다네. 역경을 딛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었으니까. 꽃으로서 매화가 된다면 서리와 눈을 원망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부디 일신의 복락에 연연치 말고 중생을 이롭게 하게. 인생의 진가는 바로 여기에 있다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한용운전집』, 안병직 편 『한용운』, 김광식 『첫 키스로 만해를 만나다』 등


찬탄과 공경

“우리나라에는 사람이 귀한데 꼭 하나와 반이 있다. 그 하나가 바로 만해다.” 
 (만공 스님)

“인도에 간디가 있다면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 (위당 정인보)

“7천 승려를 합하여도 만해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만해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 아는 것보다 낫다.”
 (벽초 홍명희)


만해스님 어록

“현대에 와서는 어떤 종교든지 될 수 있는 대로 속화(俗化)하고 사회화하고 대중화하려고 노력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종교로서는 언제든지 종교화가 되지 않으면 그 자체의 힘을 보유하고 지속하기 어렵다. 즉 속화·사회화되는 만큼 종교 자체에는 힘이 미약해진다.”

“부처님 본의에 근거한 교단의 권위를 확립하여라. 교단의 권위가 이 만큼 실추한 적이 있었는지를 헤아릴 때가 아니다. 날로 교단의 존엄과 청정성이 실추되어 가고 있는 이 현상을 바로 직시할 것이다. 각자의 출가가 결코 부의 축적에 있지 않았거늘 어찌 이렇게 이권을 다투게 되었으며, 교단성립이 결코 기업의 목적에 있지 않았거늘 어찌 이렇게 직장화(職場化) 되었느냐.”

“이 세상에 어찌 성공과 실패가 그 자체로서 존재하겠는가. 오직 사람에 의거하여 결정될 뿐이다. 온갖 만사가 어느 하나도 사람의 의사를 들은 다음에 소위 성공도 되고 실패도 되고 하지 않는 것이란 없는 법이니, 만약 일이 자립하는 힘이 없고 사람에 의존할 뿐이라면 일에 성패가 있는 것도 결국은 사람의 책임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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