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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 스님]무위자연

기자명 법보신문

만추의 들녘은 금빛 물결로 출렁이고 집집마다 결실의 행복이 단풍잎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다. 남도의 넉넉한 들녘이 보고 싶어 무작정 들길을 따라서 가다가 어느덧 발길이 멈춘 곳은 월출산 무위사였다. 그윽한 고찰의 뜨락에 들어서니 대웅전 지붕위에는 청자빛 하늘이 한 조각 걸려있어 무위법을 설하고 있다. 오랜 세월의 무게를 못 이겨 단청이 멀겋게 바랜 법당은 인위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고 전설처럼 점안을 마치지 못한 백의관음은 눈 없는 눈으로 보이는 것마다 눈임을 가르치고 있다. 도량에는 관광객들이 고찰의 넉넉한 기운과 함께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며 지나가고 천왕문 앞에는 진돗개 한마리가 일없이 졸고 있다. 무위법으로써 삼라만상과 일체 중생들이 이렇게 차별을 나투고 있지만 서로 아무런 장애가 없다.

“돈오입도요문에서는 무위법을 물으니 유위법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있음은 없음으로 인해서 서고 없음은 있음으로 나타나게 되니 유위와 무위가 함께 사라져야 참다운 무위법이라고 설하고 있다.” 어느 하나에 집착하여 취하게 되면 아상과 인상에 떨어져서 참다운 법의 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맘때가 되면 사람이면 누구나 욕심을 부려놓고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아름다운 시절이다. 자연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어 새로운 눈을 뜨게 하는 것은 마음인 진여본성과 자연인 법계의 성품이 둘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조사의 깨침이 자연이 주는 기연에서 비롯된 것을 보면 눈앞에 펼쳐지는 뚜렷한 자연의 경계가 마음의 그림자임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대로 회광반조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행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시끄러움을 피하여 한적한 아란야에 들었지만 아름다운 자연의 경계에 도취되어 마음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자연을 수행의 기준으로 삼고 무작정 자연을 닮는 것을 수행으로 착각하여 세상의 티끌을 없앤다고 아까운 세월을 보낸다면 끝내 깨달음을 성취할 수가 없다. 한적한 아란야가 심성을 기르는 데에는 좋다고 하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회광반조가 없으면 또 하나의 장애를 만난 셈이니 더욱 경계를 해야 한다. 참으로 화두가 없으면 무기공에 빠져서 자연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인 진여본성과 자연인 법계의 성품이 둘이 아닌 줄 믿고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경계를 화두로써 분명하게 회광반조 해야 한다. 그러면 화두삼매가 그대로 무심이어서 나와 법계의 성품을 요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설악에서 내려온 단풍소식이 남도의 산하에도 도착하였다. 만산홍엽의 단풍이 소슬한 금풍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법계의 성품과 하나가 된다면 남은 세월이 단풍놀이처럼 언제나 호시절이 될 것이다.

거금도 금천 선원장 일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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