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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월산대군 부인 박씨

기자명 법보신문

儒臣들의 훼불 온 몸으로 막은 大부인

A자를 평생 가슴에 달고 다녀야 했던 『주홍글씨』의 주인공 헤스더처럼 역사 속에서 한번 낙인이 찍힌 인물은 죽어서도 그 덫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더구나 정사(正史)에 기록된 이야기일 경우 그 사실관계를 뒤집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그 이야기는 후인들에게 불변의 진실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월산대군 부인 박씨는 그녀가 죽은 이후 500여 년간 가슴에 짙은 주홍글씨를 달아야 했던 비운의 주인공이다. 흔히들 폐주 연산군의 악행 중에 최고로 꼽는 것이 바로 큰어머니 월산대군 부인 박씨와 간통을 했다는 ‘사건’이다.

“내 소원은 불교 부흥”

월산대군은 성종의 친형이다.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정희왕후는 자신의 손자들 가운데 자을산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토록 했다. 인수대비가 병약한 큰아들 월산대군 대신 총명한 둘째아들을 왕으로 천거했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자을산군의 장인이 한명회였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성종은 한명회와 정희왕후, 인수대비의 정략적인 결합 속에서 만들어진 국왕임을 짐작케 한다. 어쨌든 월산대군은 왕위에서 밀려났고 동생 성종이 왕위에 오른 뒤 평생 시를 지으며 은막에 묻혀 살아야 했다.

월산대군의 부인 승평부부인은 독실한 불자라는 이유로 유신들로부터 표적이 된 여자였다. 그녀는 시어머니, 남편과 함께 자주 절을 찾았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흥복사를 건립했다. 과부가 된 형수를 위해 성종은 사찰 건립에 필요한 물자들을 적극 지원했다. 조정의 대신들이 극구 반대했음은 물론이다. 성종은 ‘작은 재암을 지을 뿐’이라며 신하들을 달랬고 월산대군 부인은 왕실의 지원을 쏟아 여법한 도량으로 흥복사를 중창했다. 수개월 뒤 흥복사에서 큰 법회를 열려 수많은 인파가 법회에 참석했고 그 중에 월산대군 부인이 포함돼 있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의 대신들은 ‘먹이를 발견한 하이에나떼’처럼 월산대군 부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흥복사에서 불교행사를 행하자 사대부의 부녀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승려들과 뒤섞여 머물다가 하룻밤 지내고 돌아왔으니 월산대군 부인과 사대부 집안의 여인들, 또 이를 부추긴 승려들을 붙잡아 심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비전의 반대를 무릅쓰고 애써 제정해 놓은 ‘부녀자 사찰출입 금지’ 법령이 월산대군 부인으로 인해 휴지조각이 될 지경에 이르자, 유신들은 “국가의 기강과 원칙이 무너지기에 이르렀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조정 대신들은 50여 차례 성종에게 상소를 올리거나 면담을 요청해 월산대군 부인과 관련자들의 처벌을 요구했고, 사헌부·사간원의 대간들이 수십일 동안 대궐문 앞에 엎드려 농성을 벌였다. 하지만 성종은 끝끝내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와 관련한 유신들의 반발은 그해 12월 성종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월산대군 부인 박씨는 인수대비나 성종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후덕하고 순종적인 며느리이자 형수였다. 성종 25년 실록 기사에 따르면 “(성종이)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대비전께서 편찮으시자 월산부인이 처음부터 입시하였으므로 내가 공을 갚으려고 그 소원을 물었더니, 흥복사 등의 세금 이외에도 역사(役事)를 면해달라고 하였다. 그에게 왕패를 내려주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대목은 월산대군 부인이 시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상당히 지극한 며느리였으며, 그녀에 대한 성종의 예우도 극진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자신의 소원을 사찰에 대한 지원으로 돌릴 정도로 독실한 불자였음은 물론이다.

인수대비는 생모가 없는 연산군의 보호를 자신의 큰며느리인 월산대군 부인에게 맡겼다. 계모인 정현왕후에게 연산군에 대한 따뜻한 정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성품이 온화하고 후덕한 그녀가 어린 세자를 맡아 기르는 것이 가장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월산대군 부인에게 아이가 없었으니, 자신의 친아들처럼 정성으로 돌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이처럼 연산군에게 있어서 박씨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왕실에서 병이 나면 사가로 피접을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세자 시절 연산군이 병이 났을 때 가는 곳이 바로 월산대군의 집(현재의 덕수궁)이었다. 잔병치레가 잦았던 연산군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월산대군의 집에서 보냈다고 전해진다. 또 일설에 따르면 연산군이 폐비 윤씨에 대한 소문과 멀리 떨어진 채 성장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월산대군 사저에서 머물도록 인수대비가 명했다고도 한다. 후일 연산군이 자신의 세자를 맡겨 기르도록 한 이 또한 월산대군 부인이었다.

연산군은 왕위에 오른 후 월산대군 부인에게 종종 쌀과 노비를 하사했으며, 부인이 큰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자 승평부부인의 이름 앞에 대(大)자를 더 붙여 승평부대부인이라는 시호를 내릴 것을 명한다. 이는 자신과 세자를 정성으로 길러준 큰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하지만 이것이 그녀를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여인으로 만든 단초가 될 줄이야.

연산군과 통정, 현실적으로 불가

이에 대해 실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신이 논하기를) 박씨는 수십 년을 홀어미로 지내며 불교를 받들고 믿어 죽은 남편인 이정의 묘 곁에 흥복사를 세우고, 따라서 명복을 비느라 자주 그 절에 가므로 사람들이 혹 의심하기도 하였다. 왕(연산군)이 박씨에게 그 집에서 세자를 봉양토록 하다가, 세자가 장성한 후 경복궁에 들어와 거처하게 되면서부터는 왕이 박씨에게 특별히 명하여 세자를 모시게 하고, 드디어 간통한 뒤 박씨에게 은으로 만든 승평부대부인이라는 도서를 만들어 주었다.”

그로부터 한달 뒤 그녀가 죽은 직후 실록에서는 기가 막힌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사신이 논하기를) 월산대군 이정의 처 승평부부인 박씨가 죽었다.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그녀의 간통과 관련된 사실들은 이렇듯 대부분 ‘카더라’ 식의 사론으로 편집돼 있다. 폭군 연산군에 대한 비난과 국법을 어긴 불심 깊은 여인에 대한 복수가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연산군과 월산대군 부인의 이야기들은 후일 연산군의 ‘미친 정신상태’를 입증하는 주요한 소재가 되었다. 소설 『금삼의 피』와 드라마 ‘조선왕조500년’, 드라마 ‘장녹수’ 등에서는 그녀가 겁탈을 당한 후 대청에 목을 매 자살하거나 약을 먹고 죽는 스토리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주변정황으로 볼 때 이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월산대군 부인은 연산군보다 적어도 스무 살 이상 연상인 50대 여인이었고, 평생 아이를 낳지 못했으며, 모정에 굶주린 연산군에게 있어서 친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승평부대부인이라는 시호가 내려질 무렵, 월산대군 부인은 위중한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죽기 한달 전 연산군은 큰어머니에게 ‘대(大)’라는 글자를 더 내렸고, 그녀가 죽기 1주일 전에는 박원종으로 하여금 누이의 병을 극진히 간호하라는 명까지 하달한다.

중종반정의 주역에 의해 희생

이 같은 정황으로 볼 때 월산대군 부인이 연산군과 통정을 했다거나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이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사실은 연산군이 폐위된 이후 두 사람의 관계가 ‘간통’에서 ‘음독자살’로 둔갑한다는 점이다. 중종실록에는 월산대군 부인이 연산군에게 치욕을 당한 후 동생 박원종으로부터 “왜 참고 사는가? 약을 마시고 죽으라!”는 독촉을 받고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월산대군 부인의 친동생 박원종은 중종반정의 주역이다. 월산대군 부인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높은 벼슬에 올랐던 박원종에게는 연산군을 배신하고 반정을 주도할 만한 결정적인 명분이 필요했다. 연산군을 어린 시절부터 돌보았으며, 연산군으로부터 큰 신망을 얻은 누이와 폐주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반정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박원종이 죽은 누이를 팔아 자신의 반정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구실을 삼은 것으로 충분히 해석될 수 있다.

역사란 항상 승리자들에 의한 기록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실록을 비롯한 그 어떤 역사서에서도 그네들이 쳐놓은 그물 에서 벗어난 진실과 마주하기 어렵다.

화려한 구중궁궐 속에서 살았지만 늘 음지에서 그림자로 머물러야 했던 월산대군 부인 박씨. 가혹하게도 이 비운의 우바이는 여전히 유학자들, 그리고 중종반정의 주역들에 의해 재편집된 역사 속에서 아직 머물러 있다.

만약 그녀에게서 한 가지의 잘못을 굳이 거론한다면, 조선의 유신들도 버리고 후대 사가들도 팽개쳐 버린 연산군이라는 인물을 지극 정성으로 길러냈고, 조선불교에 대한 탄압을 온몸으로 막아냈다는 사실밖에 더 있겠는가. 월산대군 부인에 대한 불교사적 재조명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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