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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31. 참법(懺法)-윤동주의 ‘참회록’

기자명 법보신문

녹슨 거울 속 얼굴 참회로 희망 찾는 식민 백성의 자아

<사진설명>참회하지 않는 한 죄는 계속 되풀이 된다. 철저한 성찰과 참회를 거듭하는 까닭은 그 죄를 다시 범하지 않는 인간으로 한 단계 올라서기 위함이다.

절 안팎이 시끄럽다. 조계종은 더 이상 승가공동체가 아니다. 석가모니께서는 스님들에게 탁발을 하여 빌어먹을 것이요 소유할 것은 발우와 가사 세 벌이며 이 또한 다른 승려에게 넘겨주고 무소유의 삶을 살라 일렀다. 하지만 상당수의 승려들이 수백 억 원의 돈과 수만 평의 땅을 가지고도 모자라 더 많이 얻고자 같은 승려를 해하는 일이 다반사다.

미물이라도 절대 죽여서는 안 되는 불살생이 계율 중에서 가장 지엄한 계율이거늘, 공중파 방송에 나와 상대방 승려의 목을 따겠다는 말을 태연자약하게 한다. 한 티끌의 욕망마저 버리고 버려 해탈에 이르는 길이 승려의 수행이거늘, 속인조차 찡그리며 고개를 돌릴 정도로 권력과 향락을 탐하고 있다. 윤동주의 ‘참회록’을 읽고 또 읽으며 모두 통렬한 참회를 할 일이다.

속인도 고개 돌릴 탐심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이다지도 욕될까.//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만 이십 사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슬픈 사람의 뒷모양이/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거울은 나의 얼굴을 비추어 주는 물건이다. 거울이 없다면 나는 내 얼굴을 알 수 없으며 내 얼굴의 주름이나 흉터, 얼룩들을 볼 수 없다. 형상만이 아니다. 거울엔 내 마음까지 담겨 있다. 거울에 비친 내 눈빛과 표정은 그를 드러내는 표상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거울을 보고 얼굴에 묻은 얼룩을 닦아내고 마음을 흐리는 것들을 걷어낸다. 그런데 그 거울에 파란 녹이 끼었다. 그만큼 오랜 세월 동안 거울을 보지 않았다. 파란 녹이 낀 거울에 실로 오랜만에 얼굴을 비추니 그 얼굴이 욕스럽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 해도 나라를 잃은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자체가 죄이다. 그것은 조선조에서 태어나 그런 역사적 상황에 별로 대응도 하기 못하여 망국을 초래하였고 지금도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는 욕된 자아이다.

자아에 대한 성찰은 참회로 이어진다.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은 스물 네 살이 되기까지 시인이 살아온 세월이니, 과거에 대해 성찰함을 의미한다.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란 진술에 민족과 역사 앞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한 데 대한 부끄러움이 담겨 있다. ‘즐거운 날’이란 조국이 해방되는 날을 가리키는 것이고,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란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를 앞당겨 참회함을 뜻한다. 미래의 참회를 설정하게 되면 현재는 철저해지고 숙연해진다. 참회를 예비하는 자의 현재 삶이란 치열할 수밖에 없다.

시적 화자는 더 구체적으로 앞당긴 참회를 한다.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이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부끄러운 고백을 하지 않도록 ‘지금 여기에서’ 진정으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참회를 하고 말로만이 아니라 올바른 실천을 하겠다는 다짐이다.

밤은, 개인적으로는 시적 화자가 부끄러운 자아를 인식하고 반성하는 시간이고 이를 확장하면 우리 민족이 처한 암울한 식민지 시대다. 이는 ‘그 어느 즐거운 날’과 외면적으로 대립되지만, 심층적으로 해석하면 현재 제대로 참회하고 실천하면 맞게 될 가능성의 시간이기도 하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는 것은 불에 달군 돌을 입에 물고 용맹정진하듯 철저하게 온몸으로 성찰함을 의미한다.

운석은 하늘에 빛나는 별과 대립되는 상징어다. ‘하늘의 별’이 암울한 식민지에 빛나는 조국광복의 염원이자 희망이라면, 별똥별은 그 희망과 염원이 사라져버림을 의미한다. 그러니 암울한 식민시대에 홀로 참회하고 걸어가는 사람은 슬플 수밖에 없고, 그런 불행의 역사, 비극의 운명을 만든 자아는 슬프고 고독하다. 자아에 대해 성찰하면 그런 비극의 역사에 놓여있는, 또 그런 세계의 부조리에 대해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 데 대해 참회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읽는 우리들에게 그 자아가 슬퍼 보이지만 않는다. 시적 자아가 참된 참회와 성찰을 통해 다시 별을 바라보고 결국 ‘그 어느 즐거운 날’을 도래하게 할 것이라는 기대가 함께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 인식에서 출발

흔히 ‘부끄러움의 미학’으로 표현되는 윤동주의 시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수치심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추구하고 지켜야 할 숭고한 이상과 목표에 대하여 현재의 괴리를 인식할 때 생성된다. 별을 바라며, 도덕적 이상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참법(懺法)도 마찬가지다. 참법은 간단히 말하여 부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비는 일을 행하는 법(法)을 뜻한다.

광의의 참법은 불교와 생성을 같이 하겠지만, 참법이 어느 정도 질서를 갖추고 행해지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참법의 목적이나 방법에 대해 체계적으로 서술한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의 간행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개 등은 다시 한 번 지성으로 엎드려 빕니다. 시초가 없는 아득한 옛적부터 오늘에 이르는 동안 저희들은 살생을 일삼거나 도적질을 하는 등 같은 몸으로 저지른 죄, 망령된 말이나 아첨하는 말, 이간하는 말 등 같은 입으로 저지른 죄,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등 마음으로 저지른 죄를 수없이 범하였을 뿐 아니라 남들까지 부추겨 저지르게 하였으니 찰나에 지은 죄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오늘 이 모든 죄를 참회하오니 원컨대 일체를 가셔주소서.”라고 구체적으로 참회의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원효(元曉)는『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에서 참회에 대해 심오한 논리를 편다. 원효는 무엇보다도 불방일하여 죄업의 실상을 사유할 것을 제안한다. 모든 중생이 무명으로 인하여 스스로 죄를 짓기도 하고 남에게도 짓게 한다. 무명으로 전도되어 망령된 마음에 사로잡히니 경계를 만들고 분별심을 일으켜 나(我)와 내 것(我所)에 집착하여 갖가지의 업을 짓고 진여 실상을 제대로 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성찰 없이 인간고양 없어

인간이 입과 몸과 마음으로 짓는 죄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무명에 휩싸여 귀, 눈, 코, 혀, 몸, 마음 등 육정(六情)으로 대상을 헛되이 듣고 바라보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한다. 마음의 부자유는 오온(五蘊)과 오경(五境)의 인연으로부터 일어난다. 심왕(心王)은 정신작용의 본체이고 심소(心所)는 그 본체에 종속된 정신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심소가 욕망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깨닫지 못한 이들은 육정으로 빚어진 것을 실체라고 착각하며, 또 이 매력에 이끌리거나 거부감을 내어서 좋아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는 등의 마음을 일으켜서 결국 번뇌하게 된다.

성찰 없이 개인의 고양은 없다, 누구나 잘못과 죄를 저지르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 개인이 이를 진실로 참회하느냐 아무 죄의식 없이 간과하느냐 이다. 성찰 없을 때 죄는 되풀이되며 그 순간 개인과 타자들을 동시에 파괴한다. 진실한 성찰이 있을 때 개인은 그 죄를 다시 범하지 않는 인간으로 한 단계 고양(高揚)된다. 그 고양이 거듭되어 부처를 지향할 때 어느 순간 그는 구제된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죄는 차치하고 현재 한국 사회나 국가가 금하는 죄를 범한 승려들은 이제라도 부처님 앞에 무릎 꿇고 참된 참회를 하여 거듭나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한국 불교의 미래는 없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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