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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경 스님]우리들의 유토피아

기자명 법보신문

“그대가 하고자 하는 것을 행하라!”

이것은 1534년 프랑수아 라블레가 『가르강튀아』에 텔렘 수도원을 통해 자기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를 제시하며 내세운 이념이다. 거기에는 통치 기구가 없다. 공동 생활자들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며 자기가 바라는 바에 따라 행동한다. 혈통 좋고 교양 있고 고결한 영혼의 선남선녀들만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 대략 여자들은 열 살, 남자들은 열두 살 때다. 거주자들은 각자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을 때 먹는다. 다만 소요, 폭력, 분쟁 따위는 허용되지 않는다. 힘든 일은 수도원 밖에 사는 종복들과 장인들이 맡는다. 흔히 꿈꾸는 천국일 수 있다. 그러나 라블레는 어수룩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의 이상적인 수도원이 언젠가는 하찮은 것을 얻기 위한 터무니없는 주장과 선동과 불화 때문에 붕괴되고 말 것임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것의 건설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유토피아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 쓴 사람은 영국의 토머스 모어다. 그는 1516년 『유토피아(Utopia)』를 펴냈는데, 이 책에서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지만(nowhere), 좋은 곳(eutopia)이라고 언급했다. 유토피아(utopia)의 ‘u’는 ‘없다(ou)’와 ‘좋다(eu)’는 뜻을 함께 갖고 있다. ‘topia’는 장소를 의미하며, 이 세상에 ‘없는 곳(outopia)’과 ‘좋은 곳(eutopia)’의 뜻을 동시에 지닌 말이다. 왜 인간은 이상향을 꿈꿀까? 그것은 인간세가 고달프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세상은 드러나지 않는 가능태로써의 세계와 현현하여 질료화된 세계가 한 차원에서 공존한다. 자연히 인간은 생멸하는 사바세계 너머의 영원성의 이상향을 꿈꿔 왔다.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히말라야의 티베트인들은 ‘샹그리라’를, 제주도 사람들은 남쪽 바다 너머에 ‘이어도’를 가설했다. 이 ‘유토피아’가 인간에게는 영혼의 정화라는 필터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백분율에서 ‘1%’는 총량에 따라 크기와 비중이 달라진다. 각각 1%인 사슬 100개를 연결한 쇠사슬의 끊어질 확률은 놀랍게도 63%에 달한다고 한다. 작금 불교계의 문제의 발단도 따지고 보면 내부의 부조화에서 기인한다. 안타깝다. 절집은 공동체 생활이다. 공동체는 화합이 생명이다. ‘잘난 이와 못난 이’, ‘용과 뱀이 어우러져 사는’ 곳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고 꿈이며, 아무 부족함이 없어야 하는데 반목이 지나치다. 윗물이 맑지 않고 아랫물이 맑아지는 법은 없다. 서양 속담에 ‘손 안에 든 새 한 마리가 숲속에 있는 새 두 마리와 같다고’했다. 위부터 달라지고 서로에게 애정을 갖는다면 각각의 1%가 잘 기능할 것이다. 우리들의 유토피아 안에서 제발 서로 힘들게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법련사 주지 보경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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