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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범산 김법린 선생

기자명 법보신문

스스로 당당하다면 100만 대군인들 두려우랴

“세상에서는 그의 일생이 성실하였기에 그를 신뢰했고, 유능했기에 그를 기대했으며, 몸 바쳐 겨레를 사랑하였기에 그를 존경한다.”

범산 김법린(1899~1964) 선생. 그의 한 제자가 범산의 삶을 이렇게 정의했듯 그는 스님으로서는 선지식이었고, 독립운동가로서는 끝까지 불의와 맞섰던 투쟁가였으며, 학자로서는 동서고금의 깊은 이치를 꿰뚫은 석학으로 평가받고 있다.

1899년 음력 8월 23일 경북 영천군에서 태어난 그는 13세에 영천 은해사로 출가했다. 그곳 범어사에서 강원교육을 수료하고, 20세 때 불교중앙학림에서 공부하던 중 3·1운동에 참여했고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가 1만여 명이 동참한 불교계 만세운동을 지도했다.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급히 국경을 넘은 선생은 중국 상해에서 군자금을 모으는 등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이후 상해 남경대학에서 영어·중국어를 습득하고 다시 프랑스로 유학해 파리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1927년 2월 5일부터 14일까지 벨기에에서 열린 ‘제1회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에 조선대표로 참가해 일본의 만행을 규탄함으로서 세계적인 관심을 받기도 했다.

 파리대학원에서 근세철학을 전공한 선생은 1928년 귀국해 조선불교의 혁신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 만당(卍黨)을 조직하고 만해 스님과 함께 『불교』를 창간, 저술과 강연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선생은 만당사건으로 3개월, 조선학회사건으로 2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가슴 벅찬 해방을 맞은 그는 각황사(지금의 조계사)에서 조선승려대회를 열고 불교재건의 기치를 들었다. 조선불교 총무원장, 동국학원 이사장,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장, 제3대 문교부장관, 초대원자력원장, 제3대 민의원 등을 역임하며 각 방면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뤄낸 그는 1963년, 모교인 동국대로 돌아가 총장으로서 인재양성과 교육에 마지막 온힘을 쏟았다.

‘정의 칼날을 밟고 서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던 스승 만해의 당부처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는 과중한 업무와 피로로 총장 취임 후 8개월 만인 1964년 3월 14일 돌연 심장마비로 세연을 마치고 이 겨레를 떠나갔다.

▷3·1운동 때 서울과 부산에서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특히 범어사에서 만세운동이 들불같이 일어났던 것도 그 배경에 선생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압니다. 독립운동에 그토록 적극 뛰어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당시 다니던 불교중앙학림에서 내 평생의 스승을 만났고 그로 인해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을 찾았네. 그 길은 더불어 사는 화합의 길이었고, 억압을 깨뜨리는 투쟁의 길이었으며,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보살의 길이었네. 그것이 내가 평생 독립운동의 길을 걸은 이유였네.”

▷평생의 스승이라고 하면 만해 스님을 일컫는 것이겠군요?

“그렇다네. 당시 스님께서는 중앙학림에서 특강을 자주 하셨는데 부처님은 깊은 산중에 계시지 않고 저잣거리의 민중들 속에 있다고 하셨네. 3·1운동 전날 스님께선 우리를 자신의 처소로 부르셨고 민족적인 거사와 우리가 할 일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네. 그 때 스님의 얼굴에서는 두려움과 긴장감은커녕 비장한 환희로 가득 차 있으셨네. 내가 3·1운동에 참여하고 훗날 유학을 가고 불교운동을 하고 정치활동에 참여했던 것도 내가 존경하고 따르던 그 분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나의 굳은 각오 때문이었네.”

▷3·1운동이 직후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1923년 갑자기 프랑스로 유학을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모든 것이 같은 길이었네. 총칼 들고 싸우는 것만 독립운동이 아니네. 공부를 하건 기술을 습득하건 각자가 전문인이 되려는 것 또한 독립운동이라네. 거꾸로 일본에 아부하고 동포를 배신하는 행위만 친일이 아니라 무지한 채 수동적인 채 포기하며 살아가는 것 또한 친일과 결코 다르지 않네. 우리 정체성 자체를 스스로 부정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일세.”

▷한국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인데 그곳에서 무엇을 공부하셨습니까?

“철학을 공부했지. 서양철학은 물론 불교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지. 서양 사람들이 불교를 뭘 알까 싶었지만 그것은 내 엄청난 편견이었지. 철저한 문헌학을 바탕으로 한 불교연구 방식은 내게 충격이었고 새로운 불교와의 만남이었네. 그 중에서도 나는 유식학에 특히 관심이 많았지.”

▷선생의 일생 중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유럽 각국에서 조선의 현실을 알렸던 활동일 것 같습니다. 특히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반제국주의 대회에 조선대표로 참가해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떨친 것은 지금까지도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 대회는 세계 각국의 124개 단체 임원 147명이 참석하고 있었네. 하지만 그들조차 우리 조선인이 일본 제국주의로 인해 얼마나 큰 피해를 입고 죽어가는 지를 모르고 있었네. 오히려 미개한 조선을 개화시킨다고 알고 있는 게 대부분이었네. 동양 최고의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일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지. 내 오랜 도반인 이미륵 등과 함께 이 나라 저 나라 참으로 부지런히 뛰어다녔지. 내가 유럽에서 청소부를 하면서도 공부를 했던 것도 이 일을 준비한 것이기도 했네.”

▷그러면 그곳에서 더 공부를 해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시는 것도 큰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요. 독일에서 공부했던 백성욱 박사님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일찍 귀국을 하셨나요?

“불교계에서 끊임없이 귀국을 간곡히 요청했네. 심지어 하루는 종단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그 속에는 귀국 경비로 모았다는 6000원이 동봉돼 있었네. 비록 학문에 대한 아쉬움은 남았지만 국내에서 불교청년운동과 불교자주화 운동을 적극 펼치려고 결심했고 또 그리 살았네.”

▷선생께서 만당을 결성했는데 어떤 모임이었습니까?

“만당은 항일 비밀결사체로서 민족불교 지향, 불교대중화, 불타정신의 체험을 내세운 지하 운동이었네. 우리 불교가 외세에 휩쓸리지 않고 당당히 서는 것 그것이 독립의 첫걸음이었지. 많은 젊은이들이 참여했고 불교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됐지.”

▷만당이나 조선어학회 사건 등으로 여러 차례 투옥됐고 그 때마다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모진 세월을 어떻게 꿋꿋이 견딜 수 있었나요?

“형무소의 감방만 감방이 아니라 조선 땅 전체가 감방이었네. 만해 스님께서는 오히려 내게 이곳에 발을 들인 건 영광스러운 일이라며 꽃다발을 전해주셨지. 괴로움이란 것도 결국은 구름처럼 바람처럼 흘러가는 찰나일 뿐이네. 아무리 짙은 먹구름일지라도 하늘 자체를 물들일 수는 없지. 먹구름이 스러지면 맑은 하늘이 드러나듯 고통의 시간은 결국 평화를 위한 부득이한 과정인 게지.”

▷지금 21세기는 선생께서 살았던 일제시대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도 잔악한 일본경찰도 아닌데도 때때로 견디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다면 백만 대군을 홀로 막아내야 한다고 한들 무엇이 두려울까. 인생은 적당히 살아도 좋을 만큼 길지 않네. 옳지 않다면 타협하지 말고 당당하게 그 길을 걷게. 그것이 정토를 열어가는 첫 걸음이라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 김법린 「불란서의 불교학」·「민중본위적불교운동의 제창」, 김광식 「김법린과 피압박 민족대회」·「만해, 불교청년들을 단련시킨 용광로-한용운과 김법린」, 김성철 「한국유식학연구사」 등


범산 선생 어록

“세계는 한국에서 일본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반란이 많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많은 정파들은 문화적으로 원시적인 이웃나라 사람들에 의한 한국의 억압에 맞서 싸우고 있다. 한국의 여러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기생충들에 의해 나라가 강제로 잠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결사를 조직했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투쟁은 우리를 자유의 삶으로 인도할 최후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일본이 한국에서 물러나거나 우리 한민족이 불행과 배고픔 그리고 죽음의 나락에 떨어지는 일, 이 둘 중의 하나가 남아 있을 뿐이다.” 
(벨기에 발표문, 1927)

“산사로부터 도시로! 승려 본위로부터 신도 본위로! 은둔적, 독선적 불교로부터 사회적 겸제적(兼濟的) 불교로 나아가자! 즉 민중 중심의 불교운동 제창은 현하 조선불교의 갱신운동의 당면 과제 중 하나이다. 종교는 요컨대 사회적 현상이다. 대중을 이끄는 것이 그의 천직이요, 대중과의 접촉이 그의 생명이다. 이 천직을 망각하고 이 생명을 무시함이 현재 조선불교와 같은 자 없나니!” 
(『불교』, 1929)


공경과 찬탄

“만해와 범산은 3·1운동이라는 민족적인 물줄기의 중심에 함께 있었다. 3·1운동 직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구속, 피신을 하였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후일의 지속적인 운동을 위한 자기 정비, 성찰을 위한 기간으로 만들었음도 동일했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할 것은 범산의 그 행적은 만해라는 정신적인 울타리에서 배태됐다는 점이다.
(김광식 박사, 근대불교전공)

“김법린은 전통적인 불교연구를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현대불교학의 연구 방법론으로서 한역중심의 연구에서 탈피한 원전연구를 강조한다. 그는 이역본의 상호대조, 역본과 원전의 대조를 통한 바른 텍스트의 확립을 위한 언어학적 비교연구, 이를 전제로 한 경전의 성립사적 연구를 현대불교학 연구의 초점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문헌학적 방법론과 놀랍도록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김성철 박사, 유식학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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