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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한국불교 리더 가상인터뷰] 39. 일엽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나를 흙이나 걸레처럼 아낌없이 쓰련다

‘수덕사의 여승’ 일엽(一葉, 1896∼1971) 스님은 신학문을 섭렵한 문인이자 선각자로, 출가 후에는 만공 선사의 법맥을 이은 선승으로 칭송 받았던 인물이다.

1896년 평남 용강군 삼화면 덕동리에서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스님은 부친이 목사인 까닭에 어려서부터 기독교계 학교를 다니며 자연스럽게 신학문을 접했다. 그러나 1907년 갑작스런 어린 동생의 죽음은 이후 스님의 파란만장한 삶을 예고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동생의 죽음을 접한 스님은 그 통탄의 심정을 글로 옮겼고, 이것이 한국문학상 신시의 효시로 불리는 ‘동생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4세 되던 해 스님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졌고, 남은 동생들도 차례로 단명(短命)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 가족들의 잇단 죽음이라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스님은 이후 서울로 상경, 이화학당에 입학하며 학업을 이어나갔다. 이후 동경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스님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여성 잡지를 통해 신여성운동론을 전개했다. 특히 화가 나혜석과 더불어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던 스님이 불가(佛家)에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백성욱 박사와의 만남 이후부터다.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당시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백 박사와의 만남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고리타분하게만 여겼던 불교 속에 그녀가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왔던 자유와 평등의 세계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1928년 스님의 나이 33세 되던 해, 불문에 들어선 스님은 수행에 있어서도 남달랐다. 만공 스님의 지도편달로 오후불식, 장좌불와는 물론 목숨을 건 구도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해가 흘러 마침내 스님은 ‘고인(古人)의 속임수에 헤매고 고뇌한 이 예로부터 그 얼마인가. 큰 웃음 한소리에 설리(雪裏)에 도화(桃花)가 만발하여 산과 들이 붉었네.’라는 오도송을 부를 수 있었다.

스님은 이후 중생제도와 비구니 스님의 위상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섰다. 특히 스님은 『어느 수도인의 회상』, 『청춘을 불사르고』 등 숱한 저술을 통해 불교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으며 당시 이렇다 할 비구니 수행처 하나 변변치 않았던 한국불교에 비구니총림원을 추진하는 등 후학 비구니들을 위한 일에도 앞장섰다.

그렇게 시대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한 평생을 꿋꿋이 살았던 일엽 스님은 1971년 1월 28일 세수 76세, 법랍 43세로 입적했다.

▷목사의 맏딸로 태어나서 대학교육까지 받았다면 자타가 인정하는 ‘신여성’인데 어떻게 불교와 인연이 됐나요?
“대학을 졸업하고도 오랫동안 나는 신의 존재를 확신했습니다. 신을 믿으면 천당엘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믿었죠. 여덟 살 때부터 가졌던 꿈도 전도부인으로 복음을 널리 알려 비기독교인들을 지옥의 불에서 구하겠다고 생각했었으니까요. 나중에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졌을 때에도 전통적 가치는 내겐 저항의 대상일 뿐이었지요. 하지만 백성욱 박사님과의 인연으로 비로소 불교를 접하게 됐고, 깨달음이 대자유인이 되는 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이제와 생각건대 불교만 불교가 아니라 각각 이름은 다를지언정 모든 종교가 다 불교였던 것이지요.”
▷그럼 백 박사님과의 인연으로 출가를 하신 건가요?
“결과적으로는 그런 셈이죠. 그 분이 수행한다고 어느 날 홀연히 금강산으로 떠났고 나는 절망감에 사로 잡혔죠. 그러나 곧 나도 불교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수행에 전념하는 한편 불교잡지에 글을 쓰기도 했죠. 그러면서 오히려 불교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고 나중에는 살아서 이 몸도 죽어서 이 혼까지도 부처님께 그만 다 바쳐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거죠. 물론 만공 큰스님께서 세상을 버리고 산에 와서 하는 공부는 ‘먼저 살고 보자’는 것이라는 말씀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신여성운동을 이끌었던 스님의 출가에 대해 당시 세간에서는 잇따른 결혼과 사랑에 대한 실패로 인한 도피라고 해석했는데 그런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나는 출가 전부터 자유를 한 개인의 타고난 권리로 보았고 불가에 귀의한 출가자가 되어서도 나는 여전히 자유를 한 인간의 실존적 권리로 보았지요. 언뜻 겉으로 보기에는 내 삶이 극단적인 삶의 변화를 거쳤지만 내 자신에게 각각의 다른 삶의 단계들은 모두 내 정체성과 자아를 찾아가는 노정이었습니다.”
▷『청춘을 불사르고』는 60년대 베스트셀러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꾸준히 찾는 책입니다. 유려한 문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구구절절한 옛 사랑 얘기를 비롯해 파격적인 내용들이 많은 것도 한 이유일 것 같습니다. 고희를 앞둔 나이에 법문집도 아니고 이런 종류의 책을 쓴 이유가 무엇인가요?
“중생의 삶이란 행복과 불행, 사랑과 미움 속에서 기뻐하고 눈물 흘리는 존재지요. 그들에게 내 이야기를 통해 도움을 주고자하는 카운슬러의 역할을 자청한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출가하게 된 계기가 B씨 때문이고 입산 후 13년 뒤에는 그가 보낸 소포를 보자 옛 감정이 물밀 듯 솟아올랐다는 등 솔직하다 못해 지나친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 탓에 일각에서는 ‘비구니 스님들이 출가하는 건 실연 때문’이라는 그릇된 선입견을 갖도록 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실제 이 책이 출간된 지 얼마 후 발표된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가요에서는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아, 아, 아,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는 가사의 내용도 그런 맥락 아닌가요?
“그런 점이 분명 있지요. 그래서 고고한 얘기나 할까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진솔하지 못하면서 그럴 듯하게 뻔지르르 포장해 얘기하는 것은 결국 위선이라고 판단했지요. 자기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자신의 허물이나 수준을 드러낼 때 대중들의 공감도가 높아지고 자기발전도 있지 않겠습니까. 또 있는 듯 없는 듯 여겨지던 비구니의 존재를 알려야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요.”
▷서구사상에 익숙한 상태에서 만난 동양사상이 상당히 생소했을 것 같은데요?
“불교는 내게 파랑새였습니다. 물속에서 목말라하는 하는 물고기처럼 나는 밖으로 밖으로만 찾아 헤맸지만 정작 보물은 바로 이곳, 내 안에 있었던 거지요. 불교적 사고방식은 결코 근대성에 반대되는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근대성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나가 없다’는 무아(無我)사상이 강조됩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귀의불(歸依佛)이 곧 귀의자아(歸依自我)’라고 할 정도로 ‘나’를 강조합니다. 혹 그것이 불교와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요?
“내가 얘기하는 ‘나’는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심에 끄달리는 ‘나’가 물론 아닙니다. ‘소아(小我)’가 극복된 ‘대아(大我)’요, 번뇌를 여읜 ‘진아(眞我)’입니다. 그런데 굳이 ‘나’를 강조하는 것은 ‘무아’라고 하면 대중이 너무 어렵게 여기기 때문에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토록 사랑을 강조했던 이유도 있었겠군요?
“처음에는 남녀 관계만 사랑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나중에는 사랑이란 우주 전체의 힘이며 생령 본체의 생사가 걸린 인간의 가장 큰 문제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랑의 근본을 알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려고 출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상을 버리고 산에 들어와서 처음 하는 공부는 먼저 ‘살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자기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하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일체애(一切愛)와 평등애(平等愛), 즉 자비심을 얻어 쓸 수 있는 것이지요.”
▷스님께서는 여러 번 이혼했을 뿐 아니라 일본 명문가 오다 세이조와 사랑을 해 아이를 낳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쩌면 ‘사랑’에 충실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만약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다시 그 사람들과 사랑을 하겠습니까?
“당시 나의 연애는 사랑이라기보다 절망 속에서 지푸라기를 잡기 위한 갈애에 가까웠지요. 다시 돌아간다면 얽매지도 않고 얽매이지도 않는 멋진 사랑을 해보고 싶습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김일엽, 『청춘을 불사르고』·『일엽선문』·『미래세가 다하고 남도록』·『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박진영 「김일엽 : 한국불교와 근대성의 또 하나의 만남」 등

일엽스님 어록

“나는 이 몸이나 이 혼의 의존이 아닌 불출구(不出口)의 나다. 두려울 것은 없다. 우주가 무장을 하고 대든다 해도 나를 이길 수 있는 인간은 그 생기기 이전에 있었다. 천당과 지옥은 상대적인 것, 설사 지옥에 가서라도 내 마음을 내가 부리면 이에서 독립하여 초월할 수 있다.”

“누굴 믿으나 극치를 이루면 각(覺)이 되어 구원을 얻게 된다. 백척간두의 낭떠러지에서는 나를 생각지 말아야 한다. 나를 던짐으로써 모든 것을 완전히 잊는 무아의 경지가 불심이 아니겠는가. 우선 인력(人力)으로 못할 일이 현금적(現今的)으로 이루어질 때 믿음이 는다. 믿음의 성장이 정신력이고 정신력이 바로 삶의 바탕이며 인간의 본체인 것이다.”

“내가 할 도리라면 나를 흙이나 걸레처럼 아낌없이 쓰련다. 흙은 아무리 써도 단단해지고 걸레는 더러운 것을 훔쳐내므로 그 자리는 언제나 깨끗하게 남아있다.”

찬탄과 공경

“한 잎사귀 조각배가 험한 바다 헤쳐가서 고해를 다 건너 피안에 다달았네. 돌아가고 오는 것이 사바세계의 일이니 언제나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의 은혜를 갚으리.” (전 조계종 종정 청담 스님)

“날을 맞도록 보고 싶고 밤이 다하도록 보고 싶고 일생이 다하도록 보고 싶었던 것이 대해노니 한 마디 할 것 없소. 이것이 일엽 스님의 본래 면목이로다. 필경에 여(如)하오. 무(無)…” (전 망월사 주지 춘성 스님)

“청춘이 모두 꿈임을 홀연히 깨닫고 바른 생각 굳건히 지켜 자기 사(事)를 밝히셨네. 만 가지 인연을 한꺼번에 쉬어 스스로 태평을 찾으니 한 잎사귀 봄 광명, 눈(眼) 가운데 살았네.”(덕숭총림 방장 원담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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