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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해방과 민주화

기자명 문병호

우리 나라가 일제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날은?



1945년 8월15일이라고 누구나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정신적 의미에서까지 한국이 일제로부터 풀려난 날은 1987년 6월29일 이라고 본다. 그렇게 따지면 올해는 해방 16년째다.

웬 뚱딴지같은 주장이냐고 할지 모른다. 요약해 설명하면 이렇다.

1945년 일제가 미국에 항복함으로써 한국은 식민지배 상태에서 외형상 풀려났다. 그러나 일제를 대신해 남북에 각각 진주한 미국과 소비에트러시아의 군정은 실제에서 식민지배의 변형에 불과했다. 1948년 각각 수립된 양쪽 정부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겉포장을 둘렀으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런 이념적 대치와는 달리 오히려 유사성이 컸다. 이승만정권은 본질에서 조선왕조의 봉건통치에 더 가까웠고 김일성 정권 또한 그런 속성에 빨치산 행태를 보탠 전근대적인 일인 독재체제였기 때문이다.

남한에서 이런 문화지체현상은 4·19혁명을 통해 극복의 계기를 찾는 듯 했으나 1년만에 돌발한 5·16군부쿠데타로 긴 민주화 항쟁의 험로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사회를 지배한 것은 20세기식 근대화 논리로 포장된, 그러나 내용에선 19세기 일본식 부국강병 노선의 복사판인 국가주의 파쇼체제였다. 양김씨로 대표되는 끈질긴 반독재 투쟁의 결과 10·26을 계기로 민주화가 비로소 궤도에 오르는 듯 했으나 박정희체제의 후계인 신군부에 의해 무참히 유린당하고 87년까지 더욱 치열한 민주화 투쟁에서 적지 않은 피를 더 흘려야 했다.

6·29을 끌어낼 때까지 한국사회를 지배한 체제의 본질이 일제 파시즘의 연장, 복사판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 점에서 진정한 해방이 87년 6·29라는 것이다.

이 같은 역사전개가 시사하는 교훈의 핵심은 역사에 비약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거의 예외없이 자신이 듣고 보고 배운 경험의 한계 내에서 사고하고 행동한다. 그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의 예외적인 창조자들뿐이다. 때문에 전시대에 교육받은 사람은 전시대의 모순과 투쟁하면서도 실은 전시대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모순을 피하지 못한다.

70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치고 해방조국에 돌아와 최초의 국민 직접투표로 초대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박사이건만 그는 그가 낳고 자란 19세기말 조선조 몰락 왕족부치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바꿀 수 없었다. 미국에서 받은 현대식교육과 긴 시간의 생활체험도 그의 내면에 체화된 봉건적 관념과 인식틀을 깰 수는 없었기에 그를 접한 미국 인사 중엔 그를 '민주주의 신봉자라기보다 부르봉주의자'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박정희와 그 추종세력은 그들의 성장기체험이 그들의 한계가 된 극적인 본보기다. 일제 식민체제하의 사범, 사관교육의 본질과 특성, 모순과 문제점들을 박정희와 그 그룹은 18년 파쇼통치 과정에서 고스란히 재연해 보였다. 같은 산업화를 추진하더라도 19세기 후반에 가능하거나 용인되었던 일본식 전체주의 전략이 1백년 후 20세기 후반 한국에서 그대로 통용될 수 없다는 가장 단순한 논리조차도 그들의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끝내 납득하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박정희에 대항해 민주화투쟁을 이끈 보상으로 연이어 대통령 자리에 오른 양김씨가 개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닮은꼴 행태를 보인 것도 그들이 동시대인이기 때문이다.

노무현후보 당선은 그 점에서 시대의 대전환이다. 일제로부터 완전 해방된 지 16년만에 한국민주주의는 비로소 본궤도에 올라선다. 늦다면 늦고 빠르다면 빠른 진행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가속이 붙을 수밖에 없다.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업을 짓지 말라, 짓되 선업을 지으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되새겨 볼 만 하다.



문병호<중앙일보 J&P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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