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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시로 읽는 불교]36. 마음(3)-‘내, 앞 산’

기자명 법보신문

옛 산이 변한줄 알았더니멈추지 않은 것은 내 마음

 

<사진설명>산은 언제나 그대로 있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이다. 산이 혹시 변한 듯 보여도 이 역시 산을 보는 내 마음이 변했음이다.

까치발을 하고 겨우 옥수수를 따던 때,
모든 산들은 하늘에 닿아있었고
티 없이 푸르렀다.

평동에 나가 강냉이를 튀겨 오던 때,
산들은 강 따라 끝없이 달렸고
듬성듬성 가시덤불을 감추고 있었다.

아들놈에게 옥수수 부치고 오던 때,
산들은 길들에 발을 내준 채 오도카니 서 있었고
갈수록 거뭇거뭇했다.

돌아와 까치발을 하고 옥수수를 따는 오늘,
산들은 곤두박질쳐 강이 되었다가
굽이를 바꿔 길로 달리다가는
불쑥 솟구쳐 하늘이 된다.

정녕, ……
흐르는 것은 나,
산은 언제나 거기 그대로 있었다.

필자의 고향인 제천 진소골-영화 ‘박하사탕’의 촬영지다-에 사는 환갑이 넘은 사촌 형을 보고서 지은 시다. 옥수수가 채 여물기도 전에 까치발을 하고서야 겨우 따선 삶아 달라 칭얼거리던 유년 시절, 꿈과 현실, 천상과 지상은 하나여선 산은 모두 하늘로 가닿았다. 산에 오르면 하느님도 만나도 손오공처럼 구름도 탈 수 있다 생각하였다. 그때 산이든, 하늘이든 티 없이 투명하게 푸르렀다. 마음이 그런 탓이다.

샅에 털이 돋고 팔다리에 제법 힘이 붙어 아버지 대신 평동에 나가 일도 보고 강냉이를 튀겨선 자루에 지고 오던 청년 시절, 꿈과 현실의 괴리를 차츰 알아가는 때였건만 이상은 한없이 높고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자신감은 철철 넘쳐 가는 길이 끝이 없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모든 일이든 덤벼들었고 그 일에 빠지면 영원하기를 갈망하였다. 일이든, 공부든, 사랑이든, 혁명이든. 철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아이에게 세상은 가끔 가시덤불을 드러내 찔러주었지만, 그 아픔이 그의 질주를 멎게 하지는 못하였다.

구름도 잡을 수 있던 시절

서울 사는 아들놈에게 고향 맛을 느껴보라고 옥수수 부치고 오던 중년, 꿈과 이상은 사위어버렸고 현실의 노동은 고단하다. 봄부터 모종을 내고 한 여름 뙤약볕 밑에서 김 매주고 아픈 허리를 다독거리며 사흘을 내리 캔 고구마가 겨우 마누라 고무신 한 켤레 값이다. 사람과도 이렇게 저렇게 엮어져 해거름 안에 돌아온다는 말은 아내를 위한 수사일 뿐이다. 막걸리 한 잔 걸치고 시조라도 한 가락 하면서 발을 디디니 벌써 해는 서산에 지고, 이미 땅거미가 내린 산들은 길들에 발을 내준 채 오도카니 장승처럼 서 있다. 몸도 약해졌는지 한 달음에 올라가던 고갯길은 왜 그리 가파르던지, 가도 가도 집은 멀고 산은 갈수록 거뭇거뭇해지고 길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아들 놈 집에도 가보고, 딸집에도 가보고, 땅 팔아 서울 가서 장사도 하고 아파트란 곳에서도 살아보다가 이제 고향에 다시 돌아와 굽은 허리에 까치발을 하고 옥수수를 따야 하는 노년, 늙은 눈으로 보니 산이 곧 강이고 길이며 하늘이다. 아니, 산이 바로 나이고 내가 산이다. 강이 물러나면서 산이 존재하는가 했더니, 홍수에 산이 강으로 무너져 내리듯, 산이 다시 곤두박질 쳐선 강이 되어 흐른다.

그렇듯 머물러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이 운동을 하며 떠돈다. 인생도 그러하고 마음도 그러하다. 가만히 머물러 있어야 하건만 꿈을 좇아, 욕망을 향해, 아니면 변화가 좋다고 그리 질주를 한다. 머물러 있는 것이 운동을 하니 운동하는 곳마다 길이 열린다. 정진이고 도(道)다. 그리 성실하게 살다보면, 아니 용맹정진하면 불현듯 지진이 일어나 평지가 산이 되듯 깨달음이 온다. 하지만 이 모두 찰나의 순간에 지나치는 것들이다.

현장(玄裝: 602~664) 계열의 유상유식론(有相唯識論)은 대상과 이에 대한 정신작용, 대상과 마음이 작용하여 만들어진 형상을 긍정한다. 이들은 성상영별(性相永別), 곧 진여와 대상이 별개의 것이라고 본다. 유상유식론에 따르면 식은 스스로 둘로 갈라진다. 곧,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見分)와 인식되는 대상(相分)으로 변화하는 정신작용이다. 현장은 이 변화를 ‘스스로 변하는 것(能變)’, 변화하는 과정(轉變), 변화된 결과(所變)로 나눈다. 정신작용이란 이렇게 정신이 스스로 변화하려 하거나 실제로 변화하거나 변화되어 대상을 이루고 대상에 따라 정신작용을 일으키는 것(心所)을 뜻한다. 의식은 대상을 지각하는 주체인 견분(見分)과 견분에 의해 지각되는 대상인 상분(相分)으로 변하여 나타난다. 위 시에서 ‘내’가 견분이라면 ‘산’은 상분이다. 내가 성장함에 따라 산이란 대상을 보는 마음이 달라지고, 나에 의해 지각되는 대상인 산 또한 여러 가지로 변하여 드러난다.

현장, 대상과 진여 구분

여러 가지 식(識)이란 이 세 가지 변화하는 식(識)과 그에 따른 정신작용(心所)을 말한다. 인간의 의식이 지각하는 주체(見分)와 지각되는 대상(相分)으로 변하여 실제와 유사하게 현현한다. 이렇게 견분과 상분을 이원화할 때 견분은 각각 연기 원리에 따라 서로 의존하고 있는 대상을 능히 파악하여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는 것이니 ‘분별하는 것(分別)’이라고 부른다. 나는 유년, 청년, 중년, 노년에 따라 마음이 변하고 이 마음에 따라 대상인 산을 분별한다. 의식이 변하여 된 견분과 상분 중 상분은 견분에 의해 파악되고 분별되는 대상이기에 ‘분별되는 것(所分別)’이라고 부른다. 산은 나에 의해 길로, 장애로, 이상으로 분별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계가 모두 의식이 변하여 옮겨진 것이므로, 실재하는 개개의 존재와 이에 내재하는 원리인 법(法)은 모두 의식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 주체가 세계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能取)과 인식 주체에 의해 이해되고 파악되는 것(所取)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와 대상을 인식하고 인식되는 것을 떠나서 실재하는 사물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체의 존재는 인간의 의식이 대상의 형상을 띠고 변화하여 나타난 것일 따름이다.

진제(眞諦: 499~569) 계열의 무상유식론(無相有識論)에서 볼 때 일체는 오로지 마음이 작용한 것일 따름이다. 그들은 성상즉융(性相卽融), 곧 진여와 대상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다. 대상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나 파악되는 것의 분별이 없으며 현상계 자체가 진여가 비슷하게 드러난(似現) 것이다.

형상에 현혹되면 진여 놓쳐

의식이 변하여 옮기는 것, 곧 식의 전변(轉變)은 허망분별인데 이 허망분별에 의해서 분별된 대상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무상유식론에 따르면 대상도, 대상과 마음이 작용하여 마음속에 만들어지는 형상도 모두 허위인 비실재일 뿐이다. 무상유식론은 대상을 인식하는 작용과 그 주체만 인정하고 그로 인해 인식되는 대상을 긍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과 대상을 분별하지 않는 무분별지(無分別智)를 통해 대상의 있는 그 자체대로 진여를 여실하게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위 시의 마지막 연에서, 산은 언제나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허상이다. 이것은 진여와 유사하나 진여가 아니다. 모두 허위일 뿐이다. 있다면 산을 인식하는 마음 저 밑에 있는 진여뿐이다.

유상유식론에 의하면 현상계와 대상은 진여와 구분되는 별개의 영역이다. 거울이 늘 있는 그자체대로 삼라만상의 변화하는 모습을 그 양상을 따라 담아내듯, 진여 실체는 변하지 않지만 그 현상은 연을 따라 생멸하고 차별되고 유한하게 나타난다. 불변(不變)의 입장에서 수연(隨緣)을 인정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빠진다. 수연에 현혹되어 불변을 보지 못하면 스스로 미혹함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위 시의 마지막 연에서 산이 강도 되고 길도 되고 하늘도 된 것 같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정녕 흐르는 것, 변하는 것, 운동하고 작용을 하는 것은 나이다. 산은, 체(體)는 언제나 그대로 거기, 변함없이 있었다. 내 앞의 산은 진여에 이르려는 마음이 변화하여 산이란 대상으로 현현한 것이다. 산이나 강, 길은 모두 인연을 따라 생멸하고 유한하게 나타나는 대상에 불과하다. 그 형상에 현혹되면 불변(不變)의 진여를 보지 못한다. 그렇다고 진여에 치우쳐 수연(隨緣)과 의식의 전변(轉變)에 의해 빚어진 산이니 공하다고 하면 우리는 그에서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다. 참으로 이 마음이 모든 법을 통섭하며 모든 법의 자체가 오직 이 일심(一心)이기 때문이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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