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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시로 읽는 불교]37. 깨달음①-‘바쇼의 하이쿠’

기자명 법보신문

시어의 인드라망 노닐던 새
무상 향하듯 구름 뒤로 간다

<사진설명>새에게 둥지가 이승의 집이라면 구름은 저승의 집이다. 시인은 구름 뒤로 사라지는 새를 보며 이승의 삶을 마감할 준비를 했다.

이 가을날엔,
어찌 이리 늙는가
구름 가는 새

此秋は何で年よる雲に鳥


마츠오 바쇼오(松尾芭蕉: 1644∼1694)가 죽기 직전에 쓴 하이쿠다. 계절마다 만나게 되는 사물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 낱말로 압축한 시어인 계어(季語, 키고)는 ‘이 가을날엔’이다. 휴지(休止)를 주어 함축적인 여백을 형성하는 기레(切れ) 또한 이 부분이다. “이 가을 날엔,---(此秋は, ---)”이라 읽으며 길게 휴지를 준다.

이 여백을 채우는 것은 계어에 나타난 기호들의 환유와 은유의 조합, 겉으로 드러난 현전-텍스트와 숨어 있는 잠재-텍스트 사이의 인드라망과 같은 무한한 관계들이다. ‘가을날’이라는 계어는 우선 환유를 형성한다. 바쇼가 어느 가을날 타계하기 직전에 지은 하이쿠이기에 이것은 제일 먼저 그가 죽기 직전의 가을날을 연상하게 한다. 다음으로 가을날에 관련된 와까(和歌)의 수많은 시구를 떠오르게 하고, 그 다음으로는 가을에 독자가 직접 겪은 경험들을 떠오르게 한다. 이것이 은유를 형성할 경우 무상(無常), 쓸쓸함, 결실 등의 개념을 유추하게 한다.

단어 사이의 무한한 은유

이 하이쿠는 의미에 앞서서 가을날, 구름, (홀로 날다 구름 속으로 들어간) 새 등의 무상하고 쓸쓸한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시가 이미지의 형식이란 점을 가장 잘 활용하여 시의 시다운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미지는 감각이 대상을 포괄적으로 포착하여 이를 순간적으로 유사한 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언어가 의식의 층위에서 논리적 순서에 따라 의미를 담고자 한다면, 이미지는 무의식 속에서 머물던 것을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린다. 가을날 구름 속의 새를 보며 시적 자아는 그 안에 내재한 죽음의 이미지를 읽는다. 가을날과 구름, 새의 이미지는 구체와 추상, 과거와 현재, 현전-텍스트와 잠재-텍스트, 현실과 관념, 감각적인 것과 지적인 것을 매개한다.

바쇼가 죽기 전의 어느 가을날이다. 푸르던 잎이 낙엽이 되어 떨어지면 누구나가 무상감을 느낀다. 가을만 무상한 것이 아니다. 그를 바라보는 자아 또한 늙어버렸다. 이곳과 저곳을 정처 없이 방랑하던 바쇼가 더욱 쇠약해짐을 느끼는 가을날이다. 가을날이 계어로 작용하고 여기에 휴지(休止)를 주어, 다시 말해 기레지(切字)를 붙이면서 적막감을 준다. 이 적막감 속에서 문득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 속으로 한 마리 새가 날아간다.

먼저 새를 은유로 읽으면, 새는 하늘과 땅을 여기저기 오고가기에 ‘하늘과 땅의 중개자’, ‘사랑의 메신저’, ‘샤먼’, ‘나그네’ 등을 뜻한다. 문맥상 의미가 통하는 것은 ‘나그네’다. 여기서 새의 의미가 나그네라면, 이는 자아를 투영시킨 것이다. 이 시는 아무래도 바쇼의 다른 하이쿠인 “병든 기러기, 추운 가을 내려앉아/잠드는구나(病ム雁の夜寒に落ちて旅寢かな)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데, 여기서도 ‘기러기’는 ‘방랑하는 바쇼 자신’이다.

구름을 은유로 읽으면, 여기저기를 흘러 다니는 것은 ‘나그네’나 ‘자유’로, 쉽게 모양이 변하는 것은 ‘무상’이나 ‘변화’로, 해를 가리는 것은 ‘간신’으로, 비를 내리는 것은 ‘은혜’나 ‘용’, 혹은 ‘부처’로, 날을 흐리게 하는 것은 ‘절망’, ‘어려운 상황’, 하늘에 성 모양으로 떠 있는 것은 ‘다른 세상’ 등을 의미한다. 새가 ‘나그네, 방랑하는 바쇼 자신’이라면, 구름의 의미는 ‘무상이나 절망, 혹은 다른 세상’이다.

죽음이 다가올 정도로 쇠약함을 느낀 어느 가을날이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니 새가 구름을 향해 날아간다. 새가 한 점이 되더니 구름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다. 새는 원래 둥지를 향한다. 둥지가 이승의 집이라면 구름은 저승의 집이다. 가을이 되어 새는 저승의 집인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새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구름도 곧 흘러가버린다. 그처럼 시적 자아도 이승의 삶을 마감하고 저승길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

이를 바쇼의 불역유행론(不易流行論)으로 읽으면, 세월이 흐르고 구름도 흘러가며 새도 사라진다. 그리고 나도 곧 이승을 마감할 것이다. 대자연은 영겁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생멸한다. 이러한 변화 유전하는 모습을 깨닫는 것이 천지유행(天地流行)이다. 이는 곧 또 다른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가을날이라는 시간의 변화, 잇달아 떠오르는 무상감, 늙음에 대한 처절한 인식, 그 뒤에 “구름 가는 새”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 진술은 그리 시간이 흐르고 늙고 새가 사라지는 것이 바로 우주 삼라만상의 실체임을 의미한다. 이처럼 무상이라는 것이 대자연 고유의 실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천지고유(天地固有)다.

수백억 년 전 대폭발(Big Bang)이 일어나 성간물질이 퍼지고, 이것이 뭉쳐지면서 별을 만들고, 그 별이 수천 억 개 모여 은하계를 이루고, 그 은하계가 또 다시 수천 억 개 모여 대우주를 형성하였다. 우주는 지금도 팽창 중에 있다. 하지만 언제인가 대수축이 일어나, 줄어들고 줄어들다 다시 한 알의 씨앗으로 모일 것이고, 이것이 또 다시 대폭발을 할 것이다.

황혼에서야 심신이 자각

은하계의 수천억 개의 별 가운데 하나인 태양계에 지구와 화성이 만들어지고 지구엔 거기에 존재하던 몇몇 물질이 합성하여 생명체를 이루고 이들 생명체가 진화하여 사람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나고 죽음을 되풀이하며 문명을 건설하였다. 국가도, 집단도 생멸을 되풀이한다. ‘나’라는 개인 또한 나고 자랐고, 언제인가 다시 흙으로, 우주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살아있는 나 또한 찰나의 순간에도 세포가 생멸을 반복한다. 단 몇 분 몇 초 사이에도 내 얼굴을 형성하는 세포 가운데 수 백 개 이상이 변한다. 이리 저 대우주 자체에서 거기 깃들여 사는 뭇생명들, 한 미물의 찰나의 생에 이르기까지 우주 삼라만상의 본질이 무상이라는 것을 아는 것, 바로 그것이 깨달음이리라.

불교의 깨달음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경험을 통해서든, 정신적 자각을 하든, 아니면 양자가 종합적으로 작용하든, 무명(無明)을 소멸시키는 계기만 마련되면 깨달음은 저절로, 안으로부터 생긴다. 우리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으니 무명만 없애면 본각(本覺)이 드러난다.

조그만 이치를 알아도 깨달았다 하는가. 미물의 움직임에서도 깨달음이 올 수 있지만, 모든 앎과 이해, 인식에 대해 ‘깨달음’이라 두루뭉술하게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위대한 하이쿠 시인이자 불교 철학자인 바쇼가 우주 삼라만상의 본질이 무상이라는 것을 예전부터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죽을 때가 돼서야 이를 마음만이 아니라 몸으로 터득한 게다. 마치 원효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그전부터 알았지만, 어젯밤 바가지의 물로 알고 달게 마신 것이 실은 해골바가지의 물이란 것을 알고 구토를 하면서 이를 몸으로 깨달은 것처럼. 이처럼 진정한 깨달음이란, 사(事)와 리(理)가 한데 원융(圓融)한 경계로 마음과 몸이 함께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깨닫는 순간 몸의 재배열과 거듭남이 발생하여 깨닫기 전과 후의 내 몸과 그 몸으로 바라본 세계가 전혀 다른 것을 이른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마치 임계치 이상의 물리적 충격을 받은 물질이 배열구조가 바뀌어 화학변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원래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어떤 계기를 통하여 연기(緣起)와 무아(無我), 무상(無常) 등에 대하여 전혀 새롭게 인식하고 자신의 정신과 몸 안에 간직된 온갖 경험과 기억과 의식을 찰나적으로 재배열하여 자신의 존재를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하고 이 존재가 새로운 지평에서 진여실체(眞如實體)에 다가가는 것을 이른다.

깨달음 이후의 전혀 다른 세계

진여실체란 무엇일까. 나는 오늘, 얼굴의 비유를 통해 “과거의 사물은 스스로 과거에 있었고, 현재로부터 과거로 이르러 간 것은 아니며, 현재의 사물은 스스로 현재에 있고,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르러 오지 않았음을 말한다.”라며 물불천론(物不遷論)을 주장한 승조(僧肇: 378-414?)를 비판한다. 내 얼굴을 보면, 하루 사이에도 수 천 개의 세포가 변하지만 사람들은 나를 알아본다. 내 얼굴을 형성하는 세포가 나고 죽는 것을 되풀이하면서 수 조 개의 세포가 변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어떤 한 원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내 눈의 세포 가운데 수 만 개가 변한다 하더라도 작은 내 눈은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 얼굴의 세포는 무상(無常)하지만, 그 변하는 원리는 유상(有常)하다. 우주도 얼굴과 같다. 우주가 수 천억년에 걸쳐 대폭발을 하고 지금도 팽창 중에 있고 언제인가 다시 대수축을 하겠지만, 그 변하는 원리는 하나다. 저 광대하고도 광대한 우주에서부터 저 별들과 지구와 저 산과 하늘과 구름을 거쳐 내 몸과 내 몸 안의 수 조개의 미세하고 또 미세한 세포에 이르기까지 미치는 그 변하는 한 원리, 우주 삼라만상 가운데 오직 유일하게 유상한 그 원리가 바로 도(道)이고 진여실체인 것이 아닐까. 그곳에 부처님께서 자리한 것이 아닐까. 바로 이를 아는 것이, 이에 이르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 아닐까.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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