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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쓰는 근현대 불교사] 38.해방공간의 불교계

기자명 법보신문

친일파 청산 못한 채 전근대적 개편에 그쳐

조계종 종명 폐기 …‘조선불교’사용
이종욱 등 친일파에게 형식적인 징계
권상로·허영호 등 친일승 대거 기용

<사진설명>해방 이후 구성된 불교 교단 기구표 및 간부 명단. 교정 박한영, 중앙총무원장 김법린, 중앙감찰원장 박영희의 이름이 보인다. 사진제공=민족사.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일제의 만 35년 간 압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의 감격이야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힘으로 맞이한 해방이 아니었다는데 있었다. 우리 민족이 해방이 되는데 참여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외세의 도움으로 해방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한반도는 허리가 잘리어 미국과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지만 이 무렵 남북으로 분단되지 않을 수 있는 방안은 세 가지 정도가 있었다.

첫째, 중경에서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연합군에 편제되어 되어 본토 수복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해방 이후의 패전국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 당당하게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었다면 남북으로 분단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임시정부에서 양성하던 광복군이 연합군과 특수훈련을 마치고 일주일 뒤 본토 참전을 앞둔 상황에서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구가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김구는 광복군을 본토 수복에 참전시키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었겠지만 광복군이 본토 수복에 참여하였다면 김구의 개인적인 소망을 넘어서 우리는 남북으로 분단되지 않을 수 있었다.

둘째,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에 공인을 받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임시정부는 국내로 들어와서 총선거를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임시정부가 총선거를 관장하였다면 남북분단 상황은 도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임시정부는 망명정부 자격으로 귀국하여 총선거를 통하여 수립한 새 정부에 정권을 이양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승인을 받지 못하고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셋째는 해방 공간에서 좌익과 우익이 신탁통치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격렬한 대립이 진행될 때 여운영과 김규식과 같은 중간파가 집권을 하였더라면 좌우익을 통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남북 분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간파는 결국 정권을 잡을 수 없었다. 환희와 기쁨으로 넘쳐나야 할 해방 공간은 우리에게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해방 공간의 과제는 친일파를 청산하는 것과 자주적인 민주국가를 수립하고, 경제부흥을 달성하는 것이었지만 좌우익의 대립으로 이 과제를 달성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해방공간 불교계의 모습 또한 혼란스럽고 어수선하였다. 1945년 8월 19일 범어사의 김법린은 몇 명의 승려들을 대동하고 태고사를 방문하여 당시 종무총장이었던 이종욱과 조선불교 조계종 간부들로부터 종권을 인수하였다. 김법린은 교계의 중지를 모으기 위해서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전국승려대회 개최 준비를 진행하였다.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의 구성은 위원장 김법린, 총무위원 유엽, 오시권, 정두석, 박윤진, 참획부 위원장 김적음, 고문 송만공·송만암·설석우·김구하·김경산·백경하·장석상·강도봉·김상월 등이었다. 이들은 사전에 전국 31본사 가운데 27개 본사에 79명을 선정하여 사람을 파견하여 승려대회 개최 취지를 알리고 대표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가운데 황해도와 평안남도의 본사는 누락되어있는데 아마도 38도선의 왕래가 자유롭지 못한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울러 승려대회에서 심의할 안건을 준비하는 참획위원 24명을 선발하여 교정 전반에 관한 검토를 진행하였다. 승려대회는 9월 22일과 23일에 현재의 조계사인 태고사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9월 22일 태고사 대웅전에서 79명 가운데 60명이 참석한 가운데 승려대회는 개최되었다. 전국승려대회는 유엽의 사회로 진행되었는데 의장에는 박영희가 선출되었다.

<사진설명>8·15 해방 직후 1946년 5월에 제정된 조선불교교헌. 사진제공=민족사

승려대회에서 결정된 사항 첫째는 조계종이라는 종명을 폐지하였다는 것이다. 일제 말기인 1941년에 성립된 조선불교조계종이 사찰령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에서 해방 이후 조계종을 폐지하고 조선불교라고 표현하기로 하였다.

둘째는 교정 기구 개혁에 관한 것으로 일제가 불교계를 통제한 사찰령을 폐지하고 조선불교총본산태고사법과 31본말사법을 폐지시켰다. 서울에는 집행부로서 중앙총무원을 두어 불교계를 총괄하게 하고 지방은 13개의 교구로 나누어 각 교구에 교무원을 두어 해당 지역의 사찰을 관할하게 하였다. 입법부로서는 교구대의원으로 구성된 중앙교무회를 두고 감찰부로서 중앙감찰원을 두었다. 지금의 종정에 해당하는 교정에는 박한영, 중앙총무원장에는 김법린, 감찰원장에는 박영희가 선출되었다.

셋째는 혜화전문학교 문제와 전국 불교재산통합 건, 모범총림 창설 건, 광복사업 협조 건, 교헌기초 건 등을 토의하였다. 이러한 사안들은 대부분 남한에서 일어난 사안들이고 북한에서는 북조선불교총무원이라는 단체가 성립되었지만 당국의 정치노선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조건하에 주요 사찰의 토지를 일부 반환받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일제 말기 종무총장을 지냈던 이종욱은 부일협력자로 지목되어 승권정지 3년이라는 징계를 받았다. 중앙총무원은 혜화전문학교 재단인 조계학원을 인수하고 1945년 11월 30일 허영호를 교장으로 하여 개교하였다. 그 후 조계학원에 대한 증자가 결정되었고, 1946년 9월 20일에는 동국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전국승려대회는 일제시대 대처승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교단 조직을 비구승 중심으로 운영체제를 바꾸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이러한 노력은 모범총림 설치로 나타났는데 산세가 수려하고 수용이 편리한 사찰 하나를 총무원에서 지정하여 대표자 이하 모든 구성원을 비구승으로 조직하여 경리와 기타 제반 사무를 관리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모습은 승단을 대처승 중심에서 비구승 중심으로 옮겨 가려는 노력이었다. 승려대회의 결정에 따라 중앙총무원은 1946년 7월 27일과 8월 22일 미군정장관에게 사찰령과 사찰령시행규칙 등의 철폐를 신청하였다. 미군정청은 이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총무원장 김법린은 원세훈 외 25명 의원들의 연서를 얻어 사찰령과 포교규칙 등 4개 법령을 폐지할 것과 ‘사찰재산임시보호법’을 입법의원에 제출하여 1947년 8월 8일 통과시켰다. 그렇지만 미군정 당국은 이 법의 인준을 보류하였다. 그 까닭은 ‘사찰재산’이라는 개념에는 일본 불교계의 막대한 적산이 조선불교라는 일개 종교단체로 귀속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조계종이라는 종명을 폐기하고 조선불교라고 표현한 것은 당황스러운 결정이다. 일본이 대한이라는 이름 대신 조선이라고 부른 것은 우리 역사의 자주성을 부정한 것이었다. 종명을 없애고 조선불교라고 표현한 것은 황당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친일파 청산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작 이종욱에게 공민권 3년 정지라는 징계를 내린 것은 그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처사이다. 그는 일제 말기 교단의 책임자였다. 그의 논설과 강연으로 전쟁터로 나간 청년들이 얼마이며, 그가 내린 결정으로 인해서 신도들이 낸 성금은 얼마인가. 그 돈은 어디에 쓰였는가, 일제의 군용기를 사고, 군수품을 구입하는 국방헌금으로 보내지지 않았는가. 그가 면죄부를 받을 수 없는 당연범임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가벼운 징계가 내려진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이종욱이 종권을 넘겨주면서 인수를 받는 김법린 측과 사전에 어떤 밀약이 있었다고 본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불교계의 친일파 청산을 시작부터 이미 물 건너 간 상태였다.

이종욱은 이후 우익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반탁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불교계의 원로로 복귀했다. 1950년 고향인 평창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1년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이 때 그는 친일 학승 권상로를 총장으로 기용하였다.

더구나 해방 공간인 1945년 10월에 불교계의 종립대학인 혜화전문학교의 교장에 허영호가 임명된 것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다. 그는 일본 대정대학을 졸업하고, 일제 말기에는 종정 사서로서 불교계에서 일본의 전쟁지원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런 이력을 가진 그를 종립학교 교장으로 임명해야 할 만큼 사람이 없었을까.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표현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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