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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절함 없이 이뤄지는 건 없지요”

기자명 법보신문

[무자년 새해에 만난 선지식] 조계종 원로의원 법 흥 스님

일타 스님 소개로
효봉 스님께 출가

340일 동안 17만배 회향
50년간 끝없는 기도 정진

손수 빨래하며
양말도 꿰매 신어

시주 열심히 해도
번뇌 여의어야 ‘극락’

1959년 7월 14일 대구 팔공산 동화사. 서울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가 노스님과 마주하고 앉아있었다. 젊은이에게 그 노스님은 거대한 산맥이었다. 그가 한국인 최초의 판사라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8년간 눕지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에 오후불식 등 치열한 정진으로 큰 깨달음을 이루고 출가 12년 만에 송광사 조실에 추대됐던 선가(禪家)의 ‘전설’ 효봉 스님이었던 까닭이다.

그는 효봉 스님에게 출가를 하러 왔다고 말씀드렸다. 스님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네 얼굴은 중 상호인데 지금까지 왜 속가에 있었느냐?”라며 허허 웃었다. 이는 곧 상좌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법흥(法興)이라는 법명을 받은 젊은이는 순간 출가수행자의 길이 자신의 운명이었다고 확신했다.

현재 조계종 원로의원이자 송광사 회주인 법흥 스님은 어릴 때부터 불연(佛緣)이 깊었다. 신심 두터웠던 부모님이 정성껏 불공을 드리고 낳은 아이였을 뿐 아니라 어릴 때부터 비린 음식은 냄새조차 못 맡았다. 또 소풍을 가면 인근 절에 들러 꼬박꼬박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는 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었다. 그저 부처님을 바라보는 게 무작정 좋았기 때문이다. 속명도 ‘주흥’이어서 빨리 부를 때면 ‘중~’으로 발음됐다.

충북 괴산이 고향인 스님은 집안이 넉넉한 편이었다. 덕분에 공부를 맘껏 할 수 있었지만 거꾸로 시련도 없지 않았다. 특히 한국전쟁 때 국군에 밀려 북으로 쫓기던 인민군들에게 붙잡혀 죽을 뻔 했던 고비를 맞기도 했다. 그런데 불보살님의 가피였을까. 일심으로 관음보살을 염송하던 스님은 구사일생으로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후 불교와의 인연은 더욱 각별해졌다.

전쟁이 끝난 얼마 뒤 그는 고려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조지훈 선생을 은사로 공부했던 스님은 열렬한 문학도인 동시에 돈독한 불자였다. 자취 생활 중에도 매일 새벽 숭인동 청룡사에서 스님들과 예불을 드리는 한편 틈틈이 고려대 옆 개운사를 찾아 참배하곤 했다.
이토록 불교를 좋아했던 그가 출가를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는 낯선 여인의 말 때문이었다. 어느날 산신의 인도로 왔다는 여인은 그에게 출가할 것을 권유했다. 출가해 도를 닦을 운명으로 속세에 있어도 결혼이나 취직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인의 말은 그로 하여금 근본적인 것을 돌아보게 했다. 사람은 어디에서 태어나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인생은 왜 괴로운 것인가? 오랜 세월 그를 옭아맸던 물음들이 새삼 엄청난 무게로 다가왔다. 결국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출가 밖에 없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 집을 나선 스님은 구름처럼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문경 대승사에 도착한 것은 집을 나선지 꼭 42일 째 되는 날이었다. 그곳에는 일타 스님이 홀로 정진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젊은 일타 스님은 비록 나이는 두 살 터울이었지만 백척간두에서 나아감을 개의치 않고, 당장 번갯불이라도 잡아챌 듯 선기(禪機)가 뚝뚝 흘러넘쳤다. 그는 이곳에서 공양주를 살며 일타 스님으로부터 부설거사 시와 초발심자경문 등을 배웠다. 그리고 석 달 후 일타 스님의 소개로 당시 동화사에 주석하고 있던 효봉 선사를 찾아가 출가의사를 밝혔던 것이다.

효봉 선사를 은사로 불문(佛門)에 든 스님은 무자(無字) 화두를 들고 일천의 성인도 전하지 못했던 언어 이전의 한 구절을 깨치지 위해 정진했다. “중 됐으면 공부하는 일 밖에 더 있겠느냐”는 은사 스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겼다. 허나 건강은 스님이 참선에만 오롯이 매진하지 못하도록 했다. 잔병치레에 늘 약을 끼고 살아야 했던 스님은 결제 기간 막바지에 이르면 몸져눕기 일쑤였다. 또 어릴 때부터 녹음기라고 할 만큼 한 번 들으면 잊지 않는 탁월한 기억력도 정진에 있어서는 큰 걸림돌이었다. 스님은 절망했다. 그리고 가장 수승하다는 참선 대신 염불과 기도를 택했다. 비록 그 방법이 돌아가는 길이더라도 번뇌를 완전히 여읜 깨달음의 차원에서 본다면 차이란 있을 수 없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은사 스님은 인내력과 건강을 타고나신 분이셨지. 몇날며칠을 앉아있어도 끄떡없었으니까. 참선은 누구나 하는 게 아니다 싶더라고. 요즘 스님네들은 참선 공부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수좌는 해제 결제가 따로 없어야 하거든. 그런데 요즘은 선방에서 몇 철 나도 화두에 들지 못하고 산철에는 빙빙 돌거든. 그건 엉터리 수좌고 전부 헛고생이야. 간절한 마음이 없으면 옳은 공부가 될 수가 없어.”

스님은 전국 각지의 기도도량을 돌며 일심으로 기도했다. 자신과 부모님과 인연 있는 모든 중생들의 해탈을 발원했다. 특히 해인사에서는 성철 스님의 권유로 삼천배를 시작해 340일간 17만배를 올렸고, 또 340일 동안 하루 4번 1시간 씩 법당에서 마지를 올리며 기도에 온 몸을 내던지기도 했다. 또 74년 조계총림 송광사 주지를 맡은 이후 최근까지 30년 넘는 세월 동안 아침저녁으로 대웅전, 지장전, 관음전, 사천왕상 등 모든 전각을 돌며 기도했다. 대중들이 다치지 않고 공부 잘할 수 있기를 불보살님께 빌고 또 빌었다.

“많은 신도들이 불보살님께 무언가 해달라고 기도를 하지. 그런데 그건 제대로 된 기도가 아니야. 기도에 제 욕심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거네. 번뇌를 끊고 반드시 피안에 이르겠다고 기도해야 하지. 그게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옳은 기도인 게야. 절에 시주 많이 하고 스님들이 축원해 준다고 해서 극락 가는 게 아닐세. 극락은 번뇌를 여의어야 갈 수 있는 곳이란 얘기네.”

지난 81년 스님은 송광사와 작은 개울하나를 사이에 두고 빈터에 화엄전을 지었다. 맨손으로 시작해 오로지 기도로써 일군 결과였다. 스님은 그곳 방우산방(放牛山房)에 주석하며 지난 50여 년간 늘 그랬듯이 지금도 기도와 정진으로 생활하고 있다. 방장 보성 스님과 함께 송광사의 가장 큰 어른이지만 스님은 지금까지 손수 빨래를 한다. 또 양말에 구멍이 나면 꼭 꿰매신고, 먼 곳에 갈일이 있으면 기차나 고속버스를 이용한다. 오랜 세월 검박함이 몸에 익은 탓이다. 또 연말이 되면 며칠 동안 부지런히 글을 써 학인들과 선방 스님들, 불자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 스님의 오랜 습관이다. 자신이 건네는 글월로 인해 수행자가 초발심을 잃지 않고 초심자는 발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알고 보면 삼라만상 모두가 은인이야. 나라, 부모님, 부처님, 스승님, 이웃, 풀벌레, 잡초 하나까지도….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 이치를 모르고 서로 미워하지. 미움이 있다면 그건 오로지 내 공부가 덜 된 따름이야. 여보게~. 희로애락에 얽매여 허송세월 보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게. 세월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참으로 빠르다네.”

소나무와 편백나무가 천불천탑처럼 에워싸고 있는 승보종찰 송광사. 법흥 스님은 마치 그곳에서 천년의 세월을 지켜온 듯 자연보다 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경전의 말마따나 비가 금이 되어 쏟아져도 만족치 못할 세간의 중생들. 각박해지기만 하는 세상 속에서 무욕(無慾)의 삶을 지키고 있는 스님이 문득 사바라는 불구덩이 속에 핀 연꽃을 떠올리게 했다.

송광사=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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