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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부산 화엄사 회주 각성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일미 흔적까지 털어야
조사의 마음 드러난다

제불(諸佛)은 설궁(說弓)하시고 조사(祖師)는 설현(說絃)하시니, 불설무애지법(佛說無碍之法)은 방귀일미(方歸一味)어니와 불차일미지적(拂此一味之迹)하야사 방현조사소시일심(方現祖師所示一心)이니 고(故)로 운(云), 정전백수자화(庭前栢樹子話)는 용장소미유저(龍藏所未有底)라 하시니라. 〈선가귀감(禪家龜鑑)〉

제불(諸佛)은 설궁(說弓)하시고 조사(祖師)는 설현(說絃)하시니,

부처님은 활을 설명하시고 조사는 활의 줄을 말씀하셨다. 서산대사께서 부처님과 조사님의 가르침을 비교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활은 불법의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활의 줄은 활의 일부입니다. 활을 전체적으로 보면 굽은 곳도 있고 곧은 것도 있고, 처음과 끝이 긴 곳도 있고 짧은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활의 줄은 곧습니다. 물론 당기기 전의 활의 줄을 말합니다. 활의 줄은 굽은 곳이 없습니다. 직선입니다. 처음과 끝이 가장 빠르게 연결돼 있습니다.

조사의 가르침은 단도직입

활은 또한 마음자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도입니다. 부처님의 설법은 마음 전체, 도의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마음을 활에 비유해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조사들은 활의 줄만을 말합니다. 단도직입적입니다. 둘러가지 않고 직선입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모든 것을 포용합니다. 상중하(上中下) 근기에 두루 미치고 직선과 곡선을 함께 포섭합니다. 빠른 것, 느린 것, 직접, 간접, 곡직(曲直) 어느 것도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활입니다.

그러나 조사들은 활의 줄만을 말합니다. 다른 것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활의 줄은 빠른 것이요. 직선입니다. 필요한 것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설무애지법(佛說無碍之法)은 방귀일미(方歸一味)어니와

부처님이 말씀하신 걸림 없는 법이란 한맛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법은 이(理)와 사(事)에 걸림이 없고 시간과 공간에 초월해 있습니다. 범부와 성인, 시방삼세에 두루 통하는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입니다. 법의 성품은 원융해서 두 가지 모습이 없다는 말입니다. 불법은 걸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애(無碍)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바를 사무애(四無碍)라 하기도 합니다. 첫 번째는 이무애(理無碍)입니다. 이무애는 본체계, 즉 진리, 도리에 걸림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음은 사무애(事無碍)입니다. 사무애는 현상계, 즉 현실에 걸림이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세 번째가 이사무애(理事無碍)입니다. 이사무애는 진리와 현상이 서로 걸림이 없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이 사사무애(事事無碍)인데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겨자씨 같은 작은 세계 속에 수미산과 같은 커다란 세계, 즉 우주가 들어가도 걸림이 없는 그런 이치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방귀일미(方歸一味)입니다. 한 가지 맛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풀이하면 모든 법이 평등해서 차별이 없는 같은 맛이라는 의미입니다. 개울물이나 시냇물이나 바다에 들어가면 모두 짠맛으로 한 맛입니다. 이것이 일미(一味)입니다.

불차일미지적(拂此一味之迹)하야사 방현조사소시일심(方現祖師所示一心)이니

그런데 이 일미의 흔적까지 없애야 비로소 조사께서 보이신 그 한마음을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선(禪)의 입장입니다. 교(敎)에서 말하는 최고 가르침이 일미입니다. 일미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한 맛입니다. 삼라만상이 어디서 비롯됐습니까. 일법지소인(一法之所印)이라. 하나의 법에서 나왔습니다. 하나의 법은 또 무엇입니까. 일심입니다. 하나의 마음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이 일미입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천차만별로 달라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입니다. 일심(一心)이요 일법(一法)입니다. 산천초목, 큰 바다와 큰 사막, 큰 들 모두 허공 안에 있습니다. 허공 안에 만유가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의 마음 안에, 하나의 진리 안에 삼라만상이 들어 있습니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입니다. 그래서 만법(萬法)이 또한 귀일(歸一)이지요.

그런데 조주 스님이 그 하나마저도 어디로 돌아가느냐고 물었습니다. 만법귀일은 교인데, 그 하나는 또한 어디로 가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선입니다. 조사들의 살림살이입니다. 선의 맛은 교와 이렇게 다릅니다. 부처님께서는 걸림이 없는 무애의 법을 설해서 만법이 마침내 한 맛으로 돌아간다. 만법이 귀일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런데 그 하나의 흔적까지 떨쳐버려야 비로소 조사가 말씀하시는 바 그 마음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경전엔 화두가 없다

고(故)로 운(云), 정전백수자화(庭前栢樹子話)는 용장소미유저(龍藏所未有底)라 하시니라.

정전백수좌화라. 이것은 조사 가운데에서도 조주 스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화두입니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것을 조사서래의라고 하는데, 한 스님이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오신 뜻이 무엇이냐 묻자 조주 스님께서 하신 말씀하십니다. 뜰 앞의 잣나무다.

질문도 화두지만 대답 또한 화두입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까닭을 물었는데, 왜 조주 스님은 뜰 앞의 잣나무라 하셨을까. 의심이 일지요. 이것이 화두입니다. 그런데 화두는 부처님의 경전에는 없습니다. 오로지 조사의 선문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조사의 말씀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합니다. 교에는 없습니다. 경전 밖에 따로 전하는 법이라는 말입니다.

화두를 흔히 공안(公案)이라고도 합니다. 공안은 관공서의 비밀문서입니다.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비밀문서라 할 수 있겠지요.

요즘 화두라는 단어는 세간에도 보편화돼 있습니다. 조사 선문에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공안이 있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자주 썼습니다. 또 줄탁동시(啄同時)라는 말도 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주 썼습니다.

줄()은 알 속에 있던 새끼 병아리가 부리가 생겨 안에서 알을 쪼고, 탁(啄)은 그 때를 맞춰 어미 닭이 밖에서 동시에 알을 쪼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좌의 화두가 무르익어 막 터져 나오려고 할 때 그때 조사는 마치 어미 닭처럼, 툭 던진 한마디 말로 개화시키는 것입니다. 달마와 혜가의 만남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화두를 말이나 글로 설명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달마가 중국으로 온 뜻을 묻는 질문에 조주 스님은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화두인데 일본에서 잣나무는 잎이 다섯 개 혹은 여섯 개 달리는데, 달마에서 혜가, 승찬, 도신, 홍인, 육조 이렇게 하면 6명이니까. 이것을 뜻한다 이렇게 설명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사구(死句)입니다. 제대로 된 설명이 아닙니다. 화두는 자신이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금을 직접 먹어봐야 짠 맛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직접 먹어보기 전까지는 짠 맛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화두 참구는 무념이 돼야 합니다. 모든 잡념이 떠나야 비로소 화두가 잡힙니다. 의심해야 합니다. 의심만이 오로지 가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화두를 의단(疑團)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화두 그것 하나만 의심해야 합니다. 천 가지 의심과 만 가지 의심이 다만 한 가지 의심으로 귀결돼야 합니다. “나에게 한 물건 있다. 위로는 하늘을 바치고 아래로는 땅을 궤고 밝기는 해보다 밝고 어둡기는 철통(칠흑)보다 어둡다. 동정(動靜)간에 항상 나와 함께 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육조 단경에 나오는 화두입니다.

남악혜양 스님이 혜능 스님을 찾아왔을 때 혜능 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떤 물건이 어떻게 이렇게 왔는고.” 그러자 남악 혜양 스님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돌아가서 8년을 치열하게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고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일물(一物)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뭣고 화두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어떤 스님들은 잠 잘 때는 잠자는 놈이 이뭣고, 슬플 때는 슬픈 이놈이 이뭣고. 이렇게 찾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입니다. 이뭣고 이것만을 참구해야 합니다.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이 하나로 귀결돼야 하는데 이렇게 화두를 벌리면 일념이 되기 어렵지요.

분별 떠나야 흔적 남지 않아

용장소미유저(龍藏所未有底)라

용장은 부처님의 경전을 말하는데 팔만대장경을 용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용장에도 화두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행수탁(魚行水濁)이요 조비모락(鳥飛毛落)입니다. 고기가 다니면 물이 탁하고 새가 날면 깃털이 땅 바닥에 떨어집니다. 흔적마저도 남기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이 분별을 떠나야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분별이 있으면 고기가 물을 흐리고 새가 날개를 떨어뜨리는 격입니다. 이런 까닭에 조사들께서는 일미의 흔적까지도 털어버려야 비로소 그 한마음이 드러난다고 설하신 것입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이 내용은 3월 29일 재가불자들의 탁마수행도량 보명선원에서 각성 스님이 불교강원과정 3기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각성 스님은 보명선원에서 매월 첫째 주와 셋째 주 토요일 오후 4시 『유식론』『선가귀감』『아미타경』『무량수경』등을 강의하고 있다.

 

 

각성 스님


1938년 전남 장성에서 한학자 집안에서 출생해 여덟 살부터 한학을 배웠다. 18세인 1955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도원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탄허, 운허, 관응 스님 등 당대 선지식들로부터 경학을 익혔다. 영천 은해사를 시작으로 50여 년 동안 부산 화엄사, 보명선원, 조계사 등에서 원전 강의를 통해 꾸준히 대중을 교화하고 있다. 저서로는 『능가경』『능엄경』『구사론』『대승기신론』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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