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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불교사] ‘정화운동’의 원인과 배경

기자명 법보신문

왜색 척결 명분 … 공권력 의지한 불안전한 정화

1954년 8월 24일∼25일 선학원에서 개최된 비구승 대표자 대회. 이날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정화운동에 들어갔다. 사진제공=민족사

한국 현대불교사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은 비구 승단인 조계종 측에서 이른바 ‘정화운동’ 또는 ‘정화불사’라 부르는 비구·대처승의 갈등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사건은 대처 승단인 태고종에서는 ‘법난’·‘승단 분규’·‘정화라는 이름의 폭력’ 등으로 규정한다.

같은 사건을 두고 부르는 이름이 이렇게 다른 까닭은 진행과정에서 숱한 폭력과 법정 소송이 발생하여 양측 모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일이 지난 지금 상황에서도 조계종과 태고종은 이 사건을 표현하면서 양측 모두 공감하는 용어를 찾지 못했다. 이 운동의 직접적인 발단은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이 발표한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가라’는 담화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원인은 일제시대 승단에서 일본 불교의 대처식육을 모방하여 처자식을 거느린 대처승들이 주류를 형성한데서 비롯되었다.

개항기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승려들이 결혼을 하고 고기를 먹는 현상은 날로 확산되어 일제 말기에는 7000여명의 승려들 가운데 결혼하지 않은 독신 비구승의 숫자는 400명에서 200여명으로, 추산하면 90%가 넘는 승려들이 대처승이었던 것이다.

대처승이 자녀 양육과 세속의 살림을 꾸리는데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되었으므로 상대적으로 비구승들에 대한 처우는 더욱 악화되었다. 승려들의 결혼 문제는 교단 내에서 사상적으로 소화되지 못한 채 일본 불교를 모방함에 비롯되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한국 불교계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승려들의 세속화된 모습은 승단의 혼란과 비구승들에게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이러한 혼란과 좌절감을 극복하려는 비구승들의 노력은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해에서 발행된 「대한승려연합회선언서」에서 찾을 수 있고 이후 면면히 계승된다. “조종(祖宗)의 유풍(遺風)마저 인멸될 위기에 처해 대한불교는 멸절의 참경(慘境)에 빠졌다”라는 선언서의 내용은 일본 불교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전통 회복을 선언하였다는 점에서 ‘정화운동’의 연원이 될 수 있다.

이 정신은 비구승들이 중심이 되어 1921년 종로구 안국동에 창건된 선학원의 건립 정신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선학원의 설립 정신은 전통 선맥(禪脈)의 계승과 선풍(禪風)의 진작에 두고 있다. 선학원은 1934년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으로 전환되고, 1935년 전국 수좌대회를 거쳐 선종이라는 종단을 탄생시킴으로써 일제 말기까지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으로 선학원은 해방 이후 ‘정화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비구승들의 본거지가 된다.

승려들이 결혼을 함으로써 승단이 혼탁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백용성은 1926년 총독부에 「대처식육금지 건백서」를 제출한다. 백용성의 이러한 노력은 그 해 11월 총독부가 31본사 주지를 대처승도 할 수 있게 수정된 사법을 승인함으로써 빛을 잃게 된다.

해방 이후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비구승들의 노력은 1947년부터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 만암 송종헌을 중심으로 결성된 고불총림으로 이어진다. 만암은 일제가 물러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하였음에도 자기 혁신의 구심점을 찾지 못하는 불교계의 현실을 비판하고 참된 불법을 널리 펴고 중생들을 제도하겠다는 발원에서 고불총림을 결성한다고 밝혔다. 고불총림은 당시 혁신 계열에서 부정하였던 대처승의 존재를 인정하고 비구승을 정법중이라 하고, 대처승을 호법중이라 하여 포교·교육 등 수행승을 지원하는 일에 종사하게 한다. 그리고 대처승은 상좌를 두지 못하게 하여 자연히 소멸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대안을 제시하였다. 같은 해 경북 문경 봉암사에서는 성철·청담·향곡·법전 등이 중심이 되어 실천적인 수행과 계율 준수를 목표로 하고 정진한 봉엄사 결사 등은 비구·대처승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오늘날 정화운동의 사상적인 연원을 봉암사 결사에서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처자식을 거느린 대처승들이 사찰의 주지를 맡고 있는 까닭에 당시 비구승들은 옷 한 벌, 바루 1개를 보전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마음 놓고 방부를 드리고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을 찾기가 어려웠다.

비구승들이 정화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개최한 ‘전국 비구승대회’ 참석자 명단.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2년 선학원의 승려 이대의는 당시 교정이던 송만암에게 비구승들이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사찰 몇 개를 할애해달라고 건의한다. 송만암은 실무진에게 이 건의를 수용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하였고, 실무진들은 교정의 지시에 따라 통도사·불국사 등에서 회의를 가지고 동화사·직지사·보문사·신륵사·내원사 등 18개 사찰을 비구승들의 전용 수행공간으로 제공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비구승들은 분노하였다. 통도사·해인사·송광사 등 삼보 사찰을 비롯해서 31개 본사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할애한다고 한 사찰도 즉시 양도되지 않은 상황에서 비구승들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고심하던 차에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가 발표됨으로써 ‘정화운동’은 시작된다.

그러나 이 담화문은 치밀하게 불교계의 미래를 전망하고 발표된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이 사찰을 방문한 자리에서 우연히 대처승의 부인이 빨래를 널고 있는 장면을 보고서 불교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라는 담화를 발표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담화문의 요지는 불교가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전파되었는데 일본 승려들은 대처식육을 함으로써 교리가 변질되어 우리의 전통 불교와는 융합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일본 불교의 풍습을 따라 결혼을 한 대처승들은 친일 승려들이니 절에서 축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일본 불교가 대처식육을 전파시킴으로써 한국 불교의 전통을 말살하였다고 보았고 대처승은 친일승이라고 단정하였던 것이다. 이후 1954년 5월 20일 첫 담화를 필두로 1955년 12월 8일까지 모두 8차례의 담화를 발표하여 불교계를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그는 불교계 내부에서 일본 불교의 잔재를 청산하고 한국 불교의 고유한 사상과 전통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대통령이 불교계의 정통성을 회복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됨으로써 불교계의 자정 노력은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공권력의 힘을 빌려서 파행적인 해결책을 찾게 된다.

정화운동은 1954년에 시작되어 1962년에 비구·대처승의 통합종단이 성립됨으로써 일단락되지만 실질적으로는 대처 승단이 1970년 태고종이라는 종단을 창립하여 비구 승단과 분리를 선언할 때까지 지속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화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측의 입장은 이 운동의 결과로 일제 잔재가 청산되었고 그에 따라 승단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도 정화운동의 이념과 지향하는 바는 정당하였지만 실행방법에 있어서 정치권의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과 폭력이 사용되었다는 점, 그리고 법정의 송사로 인하여 불교계의 재산이 탕진되어 불교계의 위상을 실추시켰다는 점 등은 한계로 지적한다.

반면에 ‘정화운동’을 비판하는 견해는 비구승들이 이승만 정권과 결탁하여 일본 불교 잔재 청산이라는 미명 아래 비구 승단이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종권을 탈취하였으며, 여기에 언론사가 가세하여 대처 승단을 매도하였다고 한다.

정화운동의 결과에 대한 평가는 일제시대 불교계의 문제점이 얼마나 청산되었는가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일제 잔재는 하루아침에 청산될 수 없는 문제였고 가장 큰 문제였던 사찰령은 해방 이후 오랫동안 존속되다가 1962년에 완전히 폐지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정화운동은 평화적이고 점진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였음에도 원만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전에 대통령의 담화를 계기로 비종교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그런 까닭에 승단의 정화는 외형적으로는 성공한 듯이 보이나 내면으로는 많은 상처를 남겼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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