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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의 여운깊은 책읽기]

기자명 법보신문

지장보살의 지팡이

『잃어버린 문화유산을 찾아서』강소연 지음 / 부엔리브로

어렸을 때, 빈속에 감기약을 들이켰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나가며 그대로 주저앉았습니다. “엄마…”하고 불렀지만 혀마저도 입 속에서 축 늘어져버렸습니다. 엄마는 그런 내게 베개를 고여 주고 홑이불을 덮어준 뒤에 문을 닫고 나가셨습니다. 얼마나 정신을 놓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깊은 잠에 빠져들었지요.

아주 먼 곳에서 짜랑짜랑 방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떤 남자의 구성진 노래 소리도 함께 실려 왔습니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다 문득 눈을 떴을 때 이미 방안에는 고요가 어둑하고 묵직하게 자리하였습니다. 그때 혼자서 찔찔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열 살도 먹지 않은 어린 계집아이를 울게 만든 것은 요령소리였습니다. 집 앞을 어떤 상여가 지나갔었던 것이지요. 상여꾼이 흔들던 명랑한 요령소리가 약기운에 감겨 사지가 굳어버린 나를 흔들었습니다. 나는 나비처럼 가뿐해진 몸으로 요령소리에 실려 동네 골목을 아릉아릉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내 몸을 내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곳은 지옥입니다. 묶이고 갇히고 뽑혀지고 불태워지는 고통의 세계가 지옥입니다. 이런 지옥의 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지만 그 문을 여는 사람은 딱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살아생전 못된 짓만 일삼아서 그 악업의 과보로 제 의지와는 다르게 끌려온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제 발로 걸어서 지옥을 찾아온 사람입니다.

악업을 지은 사람들은 굳이 지옥의 문을 두드리지 않아도 문은 저절로 열립니다. 그렇다면 제 발로 걸어서 지옥을 찾아온 사람에게는 어떨까요? 그런 사람에게는 절대로 지옥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노크를 해도 소용없습니다. 제 발로 지옥을 찾아온 지장보살은 지옥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헛되이 문을 두드리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가 들고 온 지팡이를 문 앞에서 흔들 뿐입니다. 지팡이 윗부분에 달린 붉은 보석이 흔들리면 청아하기 그지없는 소리가 납니다. 그 소리에 지옥의 문이 저절로 열리고 자기가 왜 지옥에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생각해볼 틈조차 얻지 못하며 연신 비명을 질러대던 중생들은 일시에 고통에서 풀려납니다.

어렸을 때 의식을 잃어버린 나를 깨운 것이 멀리서부터 들려온 요령소리였듯이, 지옥의 중생들도 지장보살이 문 밖에서 흔드는 지팡이 소리를 듣고 서서히 정신을 되찾을 것입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 소리를 상상해봅니다.

미국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한 『지장보살도』에서는 지장보살이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가사를 둘렀는데 그의 왼쪽 어깨에 가볍게 기대어진 지팡이가 내 시선을 끌어당겼습니다. 붉은 보석이 알알이 박힌 지팡이, 이걸 지옥문 앞에서 흔든다는 말이지요. 사찰 문화재나 불화를 설명한 많은 책들이 있건만 이토록 책장에 코를 박고 들여다보기는 또 처음입니다. 그 커다란 불화 속에서도 포인트를 콕 집어내어 감칠맛 나게 설명을 곁들인 이 책 바람에 나는 어릴 적 일까지 생생하게 추억하느라 하마터면 정차역을 지나칠 뻔 하였습니다. 나를 홀린 책의 저자, 만나고 싶습니다.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이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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