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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정 기자의 칙칙폭폭 인도순례]10. 붓다를 꿈꾸는 땅 - 끝

기자명 법보신문

벌써 해가 떴다. 인도의 마지막 여정을 소화하기 위해 흔들리는 기차에서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떼어낸다. 숨 가쁜 일정의 마지막 청신(淸晨)이 밝았다. 긴 일정이지만 지루할 수 없었던, 짧은 시간이지만 긴 여운을 남겨주던 인도의 마지막 볕이 나를 향해 내리쬔다.
먼저 타지마할로 간다. 인도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코스인 이곳은 그 명성에 걸맞게 일단 덩치부터가 어마어마하다. 외국인의 입장료는 현지인보다 30배가 넘고 작은 소지품도 일일이 검사대를 통과해야 한다. 맨발 혹은 신발에 덧신을 신어야 한다기에 신발을 훌쩍 벗어버렸다. 맨발로 대리석을 디디니 발바닥에서 머리끝으로 찬 기운이 쭉 타고 오른다.

결혼하고 17년간 14명의 아이를 낳고, 15번째 자식을 낳다 1629년 죽은 뭄타즈의 묘 타지마할. 무굴제국의 황제 샤자한이 먼저 떠난 왕비 뭄타즈를 추모하며 만든 이 무덤은 도대체 무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웅려하다.

타지마할에서 활짝 웃고 있는 아이들.

혹자는 ‘그래 봤자 무덤인데 뭐 그리 대단할까’ 할 수도 있지만 타지마할은 사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의미 그 이상을 지닌다. 이 무덤을 짓기 위해 당시 수십만 명의 민초들은 여기에서 피와 땀을 쏟아내야 했다. 동시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 것도 자명한 일이다. 한 사람의 누울 곳을 만들기 위해 수 백 명이 죽어야 했던 아이러니한 곳. 그들의 혼이 서려있기에 결코 우리의 감탄이 아깝지 않다. 이렇게라도 그들을 기억해주어야 조금은 덜 억울하지 않을까. 내딛는 걸음걸음에 새삼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파고든다.

황제 샤자한의 여인 뭄타즈를 위해 만든 무덤 ‘타지마할’.

타지마할과 비슷한 크기로 야무나 강 건너편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 계획이었던 황제 샤자한. 그러나 그의 셋째 아들은 형제들을 도륙하고 1658년 왕위를 찬탈했다. 대규모의 공사는 중단됐지만 아들의 만행 역시 또 다른 씁쓸함을 남기는 장소다.

종일 둘러봐도 부족한데 서둘러 관람해야 했다.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가 이곳을 방문하기로 해 입장 전부터 퇴장시간을 못박아두었기 때문이다. 수백 명의 사람을 어떻게 약속된 시간 안에 내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즈음 단박에 궁금증이 풀려버린다. 시간이 다가오자 곳곳에 군인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무표정하게 총을 들고 서 있다. 외국인이고 내국인이고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나가는 문을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고 했던가. 무언의 폭력에 쫓겨나다시피 빠져나와 아그라 성으로 향한다.

1565년 무굴제국의 3대 황제 악바르에 의해 만들어지고 후대 왕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증축된 아그라 성.

크고 작은 전쟁으로 곳곳이 훼손돼 있지만 세련된 문양이 돋보이는 아그라 성.

샤자한 역시 많은 인력을 동원해 증축하는 공을 들였다. 그러나 그는 반란을 일으킨 아들에 의해 죽는 날까지 여기서 갇혀 지내야 했다. 성 전체가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져 타지마할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고 내부는 마치 미로처럼 만들어져 있다. 크고 작은 전쟁으로 곳곳이 훼손돼 있지만 지금의 우리 눈으로 봐도 세련된 문양과 그 문양에서 비추는 그림자는 묘한 감흥을 준다.

아그라에서의 일정도 끝이 나고 마하파리니르반(대열반) 열차를 타고 델리로 향한다. 어느새 인도에서의 모든 일정을 파하고 서울로 갈 생각을 하니 초창함이 몰려온다. 열차 덕에 한 달이 넘게 걸릴 일정을 반 이상 줄여 초스피드로 둘러본 성지들이 주마등처럼 차례로 머릿속을 스쳐 지난다.

바람처럼 숨 가쁘게 우리만의 방식대로 그들을 보고 이해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인도의 흙을 밟고 공기를 마시고 호흡하고 인도의 풍경 속으로 녹아들었던 잠시 동안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문득 인도로 떠나기 전부터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질문이 떠오른다. ‘지금 인도의 모습은 붓다가 꿈꾸던 곳이었을까.’

붓다는 중생의 마음을 헤아리고 인간의 한계를 파헤치며 모순을 비판하고 민중들의 아픔과 슬픔을 어루만지며 한평생을 살았다. 그래서 붓다는 중생의 고통을 달래주는 시인이었고 세상의 이치를 통찰하는 철학가였고 사회의 모순을 뒤집는 개혁자였다. 또 지혜를 밝혀주는 선지식이자 빈곤을 해결하는 경제학자였으며 타락한 이들을 이끌어주는 윤리학자였다. 그 한결같은 모습으로 붓다는 우리 곁에 다녀가셨고 지금도 곳곳에 또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순례 내내 우리는 붓다의 숨결을 느끼며 붓다를 보았고 붓다를 닮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동안 우리는 때때로 아난이었고 순례자였고 인도인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인도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다. 그곳은 미지의 나라도, 명상의 나라도, 빈곤의 나라도 아니었다.

부지런히 맡은 일에 충실하게 임하고, 공부보다 친구들과 뛰놀기가 즐겁고, 자신은 굶어도 자식에게 먼저 음식을 먹이는 것이 우선인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나라였다. 사르나트에서 ‘얄리양라다싱’이 그랬고 바라나시에서 ‘발루’가 그랬고 곳곳에서 ‘원 달러’를 외치는 아기 안은 남루한 엄마들이 그랬다. 그들은 단지 우리와 그 기준이 조금 다를 뿐이었다.

더러운 물을 마시고 게으르고 동물과 함께 뒤엉켜 먹고 자는 불쌍한 사람들의 나라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은 그 속에서 우리처럼 웃고 떠들고 행복을 느낀다.

인도인들은 말한다. 전 세계에서 불자들과 스님들이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인도를 찾지만 그들에게서 붓다가 말한 자비는 느낄 수 없었다고. 대다수 순례자는 호텔에 묵으며 음식에 불평불만을 털어놓고 왜 뜻대로 되지 않느냐 버럭 화를 냈고 이른 아침 성지를 찾아 절을 하고 주변을 휙 둘러본 뒤 훌쩍 가버리는 사람들뿐이었다고. 그들이 불교신자이지 않는 이유는 혹 그들의 문제가 아닌 우리들의 문제는 아닐까.

‘행복’이라는 잣대로 삶을 기준 짓는다면 지금의 우리는 그들보다 더 행복한 것일까.

우리 중에는 누군가가 부러워할만한 좋은 집과 학벌, 고급 승용차와 명품가방으로도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 있기도 하고 단칸방에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김치 반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이들이 있으리라. 그렇듯 인도인이라고 해서 우리와 별반 다를까. 가난하다고 행복하지 않다거나 가난하기 때문에 무조건 행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단지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알갱이가 제각각 흩어지는 밥과 커리, 아침에 마시는 짜이 한 잔, 연료로 쓸 쇠똥뭉치만으로도 행복해 보이는 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들을 가난하고 불쌍한, 돕고 개화시켜야 할 사람들이라고 값싼 동정을 하는 순간에 그들은 자본의 무게에 눌려 낑낑거리는 우리를 오히려 불쌍히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붓다의 체취를 느끼기에도 빠듯한 성지순례 일정은 인도인들의 삶에 귀 기울이기에 한없이 모자란다. 그들의 마음을 깊이 느끼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남들이 우리를 미워하더라도 우리는 미워하지 말고 미움으로부터 벗어나 진실로 행복하게 살자. 마음이 병든 사람들 가운데 살더라도 병든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진실로 행복하게 살자. 탐욕스런 사람들 가운데 살더라도 탐욕으로부터 벗어나 진실로 행복하게 살자”라는 『법구경』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인도인들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행복을 찾아내야 한다.

‘인도를 잠깐 다녀온 사람은 인도에 대해 매일 떠들고, 오래 다녀온 사람은 인도를 말할 때 망설이며,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은 인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정말 그럴 듯싶다. 때문에 인도에 가면 누구나 인생에서 가장 짧은 시간 동안 가장 깊은 흔적을 남긴 곳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그 기억을 가슴에 담고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떼며 뒤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추억이 별이 되어 하늘에 박힌다.

안소정 기자 as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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