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불만다라] 19.고통을 여의는 길

기자명 법보신문

오온〈五蘊〉 얽매임 벗으면 번뇌도 없다

이미 이 세상의 여행을 마치고
근심과 걱정을 떠나
모든 속박을 끊고 자유를 얻은 사람은
그에게는 털끝만한 고뇌도 없다.

                                                                   - 『법구경』

『법구경』 90번 게송을 읽으면서, 얼마 전 타계한 『토지』의 저자 박경리 선생의 시가 기억에 떠오른다. 이 게송과 같이 많은 부분에서 생의 참다운 자유를 간직하게 하는 여운을 느끼게 하는 시였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한 세상을 돌고 떠나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현재 걷고 있는 자신의 발자취를 깊이 살펴보게 하는 귀한 글귀라는 마음이 들어 옮겨 적어 본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법구경』 90번 게송은 ‘깨달은 사람’, 곧 ‘아라한의 장’이다. 아라한(Arhan)은 부처님 당시 수행을 완성한 단계로서 성자(聖者)의 경지이다.

따라서 부처님을 포함하여 수행자가 도달하는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를 의미한다. 아라한은 세상의 존경을 받는 자이고, 세상 사람들의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이며(應供), 수행을 완성하여 깨달음을 얻은 이로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무학인(無學人)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역사상으로 부처님께서도 최고의 아라한으로 존경을 받으신 분이다.

악행 제자도 품에 안은 붓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80년간의 생애에 있어서 45년간 인생의 삶을 정면으로 통과하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셨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이렇게 긴 기간 동안 몸소 법을 설하시면서 모두의 삶을 진리로 승화시키려고 애쓰신 성자는 부처님 한 분 뿐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삶 속에 나타나는 하나하나의 사건이 그대로 소재가 되었고 사람들의 삶이 바로 진리였던 것이다.

오물을 수거하여 생계를 이어갔던 니이티의 생업(生業)을 그대로 진리로서 깨닫게 하여 니이티라는 성자를 탄생시키셨고, 생로병사에 허덕이는 자신의 삶 속에서 지혜의 눈을 뜨도록 격려 하셨던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가섭이나 아난과 같이 훌륭한 제자도 있었지만 데와닷따와 같이 부처님 교단을 어지럽힌 제자도 있었다. 심지어 설화에 의하면 데와닷따는 나쁜 생각이 발동하여 부처님을 해칠 마음으로 영축산 정상에서 부처님을 향하여 바위를 굴렸고, 이 때 바위조각에 부처님은 발을 다치신 일이 있었다. 다치신 발을 제때에 치료해 드리지 못한 의사 지와까가 아침 문안을 드리면서 밤새 고통은 없으셨는지 여쭈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법구경』 90번 게송으로 답을 하셨다고 전한다.

아마도 부처님께서는 바위돌 조각에 발가락을 다치신 고통보다도 어리석은 제자의 어리석은 행위에 더 마음이 아프셨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지와까의 문안인사를 받고 아라한을 이루신 성자의 경지에서 답을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다.

‘아라한에게 있어서 나고 죽는 생사의 고통은 이미 벗어났다. 슬픔이나 오온(五蘊)의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서 더 이상의 마음의 괴로움은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마음의 괴로움이 이미 없는데 무슨 육체의 괴로움이 남아있겠는가? 반대로 우리는 오온의 얽매임 속에 찌들어 있기 때문에 희로애락(喜怒哀樂)하고 우비고뇌(憂悲苦惱)하면서 웃고 울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라한의 경지를 얻으신 부처님은 이미 생사(生死)의 여행은 끝났다고 선언하신다. 바로 이것은 해탈이며 열반의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왜 불교인가’를 묻는다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존재 그 자체에서 오는 얽매임 속에서 서로 부대끼고 투쟁을 일삼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이 존재 자체도 영원한 것이 아니니 얽매임으로부터 털고 일어나서 자신의 눈높이를 한 단계 높여보라는 충고를 불교 속에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을 해 보자.

바로 매순간 벗어남의 공부를 통하여 다툼이 아닌 평온함, 곧 열반의 경지를 자기 스스로의 것으로 체험해 보자는 가르침이 불교를 통해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향한 다툼의 뿌리 뽑아야
남보다 더 잘살아야 하고 남보다 더 앞서가야 하고 결국 남을 이겨야한다는 이 아우성으로부터 한발 벗어나볼 수는 없는 것일까? 버리고 갈 것 만 남아서 참으로 홀가분하듯이 말이다. 불교의 해탈과 열반은 자신이 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면서도 모두의 삶을 매우 평화롭게 만드는 깊은 진리를 담고 있는 가치 있는 것이다.

툼이 만연한 세상을 향하여 다툼의 뿌리까지 뽑아버린 부처님에게는 더 이상 싸우거나 시비할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고통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제자에게는 어리석음을 떨쳐버리도록 꾸지람을 하실 뿐이고, 진리를 실천하고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난 제자에게는 아낌없는 칭찬을 보내실 뿐이다.

데와닷따라는 어리석은 제자의 불손한 행위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미 자신이 머물러 있음을 보이신 거룩한 스승이셨다. 지금이 바로 스승의 지극한 가르침을 모두 배우도록 힘쓸 때이다.

본각 스님(중앙승가대 교수)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