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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칼럼] 사람살이의 마디

기자명 법보신문

나고 죽음은 사람살이의 큰 마디
생사는 차 한 잔 있고 없음과 비슷

동양사유에서는 모든 것을 4단 논리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아마도 온대기후에 적응되어 춘하추동 사계절의 분명함에 익숙해진 까닭이 아닌가 여겨진다. 자연 질서라 할 수 있는 천도(天道)의 규정을 원형리정(元亨利貞)이라 하여 네 가지로 규정하고는 여기에 대응되는 인도(人道)의 정상적 규율도 인의예지(仁義禮智)라 하여, 네 갈래로 규정하고 있다. 이렇듯 계절의 순환에 따라 질서 지어지니, 문장적 논리도 기승전결(起承轉結)이라 하여 4단 논리이다. 서구적 논리의 틀인 정반합(正反合)의 3단 논리와 구별된다. 이것이 바로 춘하추동의 사계절에 순응된 자연적 현상이라 생각된다.

사람의 일생도 생로병사라 하여 네 단계로 구분해 놓았다. 그러나 엄밀히 따진다면 태어남에서 곧바로 늙음으로 옮긴다는 것은 시간적 배려에도 무리가 있는 것 같다. 태어나면 늙음을 향하여 이동되고 있는 것이 사람살이의 과정이기는 하지만, 태어남과 늙음의 마디 사이에는 어린이, 젊은이 등의 과정이 있어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사람살이의 값어치가 흠신 클 터인데도 곧바로 늙음의 마디로 이행시킨 것은 동양사유의 이 4단 논리에다 맞추려는 고의적 설정인 것 같다.

21세기라는 현금의 상황에서는 늙음 자체도 없이 젊은 기분으로 고령의 나이를 누리려고 삶의 질을 높이고 있으니, 생로병사의 네 마디에서 늙고 병든다는 노병(老病)을 의식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어쩌면 낳고 죽는다는 두 끝의 대칭만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런 징조라도 반영하듯이 잘살자는 웰빙(wellbeing) 못지않게 잘 죽자는 웰다잉(welldying)을 강조하는 풍조이다.

어찌 되었든 나고 죽음이 사람살이의 어쩔 수 없는 큰 마디임에는 틀림없다. 그러기에 죽음으로 이별되는 순간,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의식은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엄숙함이 당연하다.

여기서는 조선시대 왕의 죽음에 임하는 불교적 축원 몇 장면을 살펴 생사의 영결에 임하는 불자들의 생각을 더듬어 보자.

중종대왕의 영혼(迎魂) 의식을 주관하는 보우대사는 차를 올리고 요령을 한 번 흔들며

“차가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차이니 / 차를 여의고는 참 마음을 들어 낼 곳이 없네 / 만약 이런 가운데 한 잔을 맛본다면 / 분명히 알리라 마음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물건 없음을.”

이렇게 게송 한 수를 읊고 곧바로 이어 이르기를

“중종대왕선가(仙駕)시여, 이미 향 한 잔을 받으셨으니 생각 바탕이 맑아지고 한바탕의 자리가 쾌활해지셨음은 묻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차는 마음에서 일어나니 차 밖으로는 마음이 없다는 소식을. 만약 이를 이해하셨다면 한 잔의 차가 마음에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오늘 향의 등불 꽃 덮개 뜰에 가득한 장엄함과 심지어는 산하대지 초목 금수 승속 남녀 모두가 나의 한 마음에서 세워진 것이라는 것입니다.”라 한다.
삶과 죽음이라는 갈림이 바로 있고 없음의 극단적 대치이지만, 마음의 한 자리에서 본다면 차 한 잔의 있고 없음보다 지나칠 것이 없다.

생사의 큰 갈림도 마음에서 정리되는 이 축원을 보면서 불가에서 웰다잉을 환기시키는 까닭을 알겠거니와, 현금 우리들 삶의 질서에서 마디마디의 의식이 별로 없음이 안타까운데, 불교계가 이러한 마음자리에서 모든 것이 성립된다는 차원으로 우리들 삶의 질서에 새로운 의식절차를 세워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 본다.

이종참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sosuk0508@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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