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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의 여운깊은 책 읽기]베이컨을 굽지 못한 아침

기자명 법보신문

『도살장』게일 A. 아이스니츠 지음/시공사

도살장에 끌려간 모든 동물들은 해체과정이 이루어지는 라인 위로 사슬에 묶여 끌어올려지기 전에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 효과적인 기절 장치를 사용해 한 번에 의식을 잃게 만들어야 한다는 조항의 법이 있습니다. 자비로운 도살법(Humane Slaughter Act)입니다. 산목숨을 죽이는데 자비라는 말이 가당키나 하겠냐마는 육식 위주의 식사를 하는 미국에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인을 상대로 하는 돈벌이에 환장한 축산업자들과 육가공업자들에게 자비로운 도살법이라니요! 그들은 매년 1억 1백만 마리의 돼지를 도살하고, 3700만 마리의 소와 송아지를, 400만 마리가 넘는 말과 염소와 양을, 그리고 80억 마리가 넘는 닭과 칠면조를 도축해야 합니다. 그러니 도살장의 작업라인을 단 1초라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불법이민을 온 남미계 노동자들은 하루에 수 백 마리의 가축을 도살해야 합니다. 그들은 ‘무조건 더 많이 죽여라’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의식이 또렷하게 살아있고 심지어는 불안하게 발버둥치는 살아 있는 동물들을 산채로 가죽을 벗기거나 토막을 내야 합니다.

“거꾸로 매달린 소가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서 두리번거리다 사람과 시선을 또렷하게 맞춘다. 그리고 소리 내어 울고, 숨을 곳을 찾는다”라고 증언하는 도살장의 일꾼들은 이런 말도 들려줍니다.

“항의하였다가는 ‘항의하러 올 만큼 한가한가? 못 하겠으면 관둬! 일하려는 값싼 일꾼들이 줄을 섰으니까.’라는 대답을 들어야 하고 더 참혹한 작업라인으로 내려가는 징벌도 감수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 바쁘다. 숨 돌릴 틈이 없다. 심지어 화장실에 갈 시간도 없어서 작업장에서 그대로 용변을 볼 정도이다.”

이 정도면 자비로운 도살법 실행 여부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가축의 피와 털과 구더기와 인부들의 용변이 한데 엉킨 그곳의 위생 상태와 관리감독을 따져야 하겠습니다만, 아! 더 이상 말하기 싫습니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잖아. 미국이 그동안 검역시스템을 얼마나 잘 보완하였겠어.’

1997년이라는 판권의 숫자를 보면서 나는 치미는 분노를 억지로 이렇게나마 달랬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한국 독자에게 주는 메시지’라는 글에서 이렇게 일침을 놓아버립니다.
“다시 시장을 개방하는 한국인들에게 한 마디 경고하고 싶습니다. 미 농무부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식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자신들이 도살장을 관리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오로지 인간에게 먹히려고 인위적으로 태어난 동물들, 그 처참한 사육과 도살의 과정들, 낮은 임금으로 도살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의 위태로운 육체와 심성, 절대로 현장을 방문하지 않는 화이트칼라의 고급관리들… 울렁증을 다독이며 밤새 뒤척거리고 일어난 아침, 나는 감히 베이컨을 구워서 아침식탁에 올릴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미령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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