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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탁 교수 발표논문 전문

기자명 법보신문
  • 사회
  • 입력 2008.09.11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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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 불교 철학을 위한 시도적 논의


신규탁/연세대 철학과 교수. 선과 화엄사상 전공

1. 재가 ‘불자’로 사는 길

출가한 ‘불자(佛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과 율장 속에 전하고 있다. 물론 현재 우리나라에도 출가해서 ‘불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분들을 ‘스님’이라 부른다. 이 분들은 소위 ‘출가’를 하신다. 말 그대로 세속의 가정을 버리고, 수행자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 대중’ 속에 몸을 던져 거기서 살아간다. ‘스님’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역사적인 전승도 있고, 또 대장경 속에 문헌 조목도 남아 있으니 그것을 참조하면 답이 나온다.
그런데 요즈음 한국의 경우는 세속의 가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자’의 길을 가는 ‘스님’들도 점점 들어나고 있다. ‘재가한 스님’들이 늘어감에 따라 전통적인 스님 모습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재가한 스님’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와 더불어 순수한 ‘재가한 불자’의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 한국의 경우는 전통도 없고 그렇다고 경전의 문헌 조목에 뚜렷하게 요약 정리된 것도 없다. 그러는 중에도 많은 서적의 보급과 교육의 개방으로 불교에 대한 인식들은 높아져만 가고 있다.
오래 전부터 필자는 재가 ‘불자’들의 수행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정리를 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때 마침 ‘참여불교재가연대’에서 발행하는『참여불교』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재가 불자’의 제반 문제를 정리하고 그 철학적 기반을 마련해 보고자 한다.

2. 사용하는 용어의 공감대를 위하여

위에서도 살짝 드러났지만, 중요한 개념들이 등장한다. 우선 ‘스님’, ‘재가’, ‘출가’, ‘불자’, ‘가정’, ‘결혼’, ‘공동체 대중’ 이란 용어가 나온다. 여기에서 필자는 이 용어들에 대하여 학술적 어원적 논의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변해감으로 인해 예전에는 없었던 다양한 형태의 신앙 모습이 등장하였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불교적인 세상살이를 해야 하는가? 지극히 실존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나 또는 우리나라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스님’은 여러 명이 모여서 소위 조석 예불을 모시면서 절에서 살았다. 물론 결혼이나 가정을 갖지도 않았고 생계를 위한 직업을 갖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전통적인 스님들만이 있는 게 아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 가정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자기 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스님.
(2) 처자와 권속을 데리고 절에서 같이 사는 스님.
(3) 처자와 권속은 따로 살면서 본인만 절에 사는 스님.
(4) 사회생활(예를 들면 학교 선생 또는 학생, 보육-양로-복지 등의 시설 종사자, 독립운동가)을 하면서 절에서 사는 스님.
(5) 요즈음 세상에 유마거사나 방거사 처럼 사는 거사님.
(6) 부인은 사별하고 자녀들도 모두 출가시키고, 퇴직금으로 한옥을 마련하여 불상을 모시고, 전통 스님에 준하는 예의 범절을 다 지키고 사는 거사님.
(7) 직장생활 하고, 가정을 가지고 있고, 3귀의 5계를 받아 재일을 지키는 거사님.

그 밖에서 아주 다양한 ‘불자’가 있다. 이 ‘불자’ 중에는 ‘재가’도 있고 ‘출가’도 있다. 옛날에는 세속 사람들은 ‘집’에 살았고, 출가자들은 ‘절’에 살았다. 그런데 요즈음은 ‘집도 절도 아닌 곳이’ 생겼다. 집 같은 절이 있는가 하면 절 같은 집이 있다. ‘재가’와 ‘출가’를 엄격하게 나누기가 애매모호한 경우가 점점 늘어난다. 사회가 다양해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결혼’이라는 말도 역시 그렇다. 민법상으로는 당사가 ‘혼인신고서’를 해당 관청에 제출하고 법원이 이 신고를 받아들여 호적에 등재함으로서 성립한다. 이런 법적인 절차가 없는 ‘사실혼’도 있다. 이 경우는 말 그대로 사실적으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내연의 관계’도 있고, 심지어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하룻밤 사연’도 있다. 누군가가 결혼을 안 했다고 할 경우, 그는 도대체 어떤 ‘결혼’을 안 했다는 의미인가?
‘공동체 대중’이란 말도 역시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소위 ‘독살이 절’이라는 말이 있다. 몇 명이 모여 살아야 ‘대중처소’인가? 또 스님 한분만이 법적 내지는 실질적 소유권을 가지면서 여러 스님들이 그 밑에 모여 살면 그곳도 ‘대중처소’라 할 수 있는가? 월급 받는 부전 스님은 ‘공동체의 대중’인가? 타국 땅에서 전투복 입고 독립운동하면서 한 순간도 출가 본사를 잊지 않으셨던 봉선사의 태허와 운허 같은 스님은 ‘공동체 대중’이 아니란 말인가?
다양한 모습의 살림들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분들 모두가 불자(佛子)라는 것이다. ‘출가’의 기준을 엄밀하게 적용시키면 위의 (1)-(7)은 모두 ‘재가’이다. 그러나 출가의 기준을 넓게 잡으면, (7)만이 ‘재가 불자’이다. 필자가 여기서 사용하는 ‘재가 불자’는 (7)을 의미한다. ‘가정을 가진다’는 말도 그리 만만한 개념은 아니다. ‘家(가)’를 단위로 하는 유교적 봉건질서가 해체된 현대사회에서, ‘가정(家庭)’의 형태도 매우 다양해졌다.

3. ‘불자’에도 등급이 있다

위에서 다양한 ‘불자’들이 있음을 보았다. 그러면 이들은 ‘불자’라는 입장에서 모두 평등한가? 그렇지 않다. ‘불자’에도 등급이 있다. 소위 1류가 있고 2류가 있고 등급이 있다. 1류는 ‘엄격한 의미의 출가’를 통해 보살대중에 들어간 ‘불자’들만이다. ‘엄격한 의미의 출가’를 했더라고 성문대중이나 연각승에 들어간 자는 여기에서 제외된다. 무엇을 근거로 이런 말을 하는가? 『대승기신론』이다.
이 책은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소대승의 경전과 논서 약 100여종을 섭렵하여 그 핵심을 추려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해석분」끄트머리 부분에 보면, 부정취(不定聚)와 정정취(正定聚)라는 용어가 나온다. 물론 이 말은 『아함경』『구사론』『유가사지론』등에도 보인다. 소위 ‘정정취’란 ‘끝내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코스에 제대로 들어간 무리’라는 뜻이다. 여래종(如來種)에 들어간 자이다. 반면에 ‘부정취’란 아직 ‘3악도’의 무리로 들어갈지, 아니면 그 반대일지 아직 결정되지 않은 무리이다. ‘재가 불자’는 ‘부정취’이다.
‘부정취’ 중생들은 업과 과보를 믿고 10악을 참회하며 10선을 닦고 불공드리고 그렇게 하기를 1만 겁이 지나면, 여러 인연에 의하며 출가하여 ‘정정취’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엄격한 의미의 출가’ 대중에 들어갔다는 것은, 대단한 공을 들여 수행 한 결과이다. 그러니 출가대중이 얼마나 거룩한 공동체인 줄 짐작 할 수 있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7)에 속하는 ‘재자 불자’는 현재의 형편에 맞게 10악을 참회하며 10선을 닦고 부처님과 스님께 공양을 올려야 한다. 그러다가 끝내는 발심하여 출가해야 한다. 그래야만 성불할 수 있다.
(1)-(6)에 속한 ‘불자’들도 형편에 맞도록 열심히 노력하여 언젠가는 ‘엄격한 의미의 출가’ 대중 즉, ‘정정취’에 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모든 생명체는 영원한 생명 현상 속에서 쌓아온 업(業)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동시에 일률적으로 ‘정정취’에 들 수는 없다. 저마다의 속도가 있고 코스가 있고 방법이 있다.
일생을 독신으로 살만한 업력(業力)을 닦지도 못한 사람이, 억지로 ‘엄격한 의미의 출가’ 대중 속으로 들어가 봤자 딴 짓 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면 더 큰 죄악이다. 모든 중생들은 저마다의 업장을 녹여서 성불을 향해서 가고 또 갈 뿐이다. 거기에는 남과 비교해야 할 것도 없고, 설사 비교해도 소용이 없다.
아무튼 처음에는 믿음이 쌓여서, 다음에는 진여(眞如)에 대한 이해와 실천이 쌓여서, 그리하여 마침내는 진여를 체험해야 한다. 소위 신(信)⇒해(解)⇒행(行)⇒증(證)을 단계적으로 거쳐 발심하여 도로 나아가는 것이다. 3아승지 겁이라는 긴 세월이 걸린다고 하지만,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증명하듯이 선재동자는 일생에 그 과정을 다 거쳐 성불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 빠를 수도 있다. 문제는 ‘제대로 된 방법’을 사용하는가? 또 꾸준히 정진하느냐? 그것이 관건이다.

4. 무엇이 제대로 된 방법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제대로 된 방법인가? ‘바른 믿음’과 ‘바른 실천’이 그것이다. ‘바른 믿음’이란 진여(眞如)를 믿고, 부처님을 믿고, 불경의 말씀을 믿고, 승단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바른 실천’이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지관(止觀)을 실천하는 것이다. ‘바른 믿음’이 없는 실천은 세속의 사회봉사와 다를 바 없다. ‘바른 믿음’이 없는 ‘참여 불교’는 무늬만 불교이지 불교가 아니다. 물론 불교가 아니라고 해서 가치가 없지는 않다. 불교 말고도 가치 있는 것이 세상에는 많다. 그리스도교도 그렇고 이슬람교도 그렇고 나아가 유네스코 정신에 입각한 인도적 차원의 봉사활동 등도 그런 류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일 했고 해서 성불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는 성불을 목표로 하는 가르침이다. 성불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실천이 있어야 한다. 성불하겠다는 발심이 있어야한다. 이제 『대승기신론』에 입각하여 발심의 단계와 각 단계별 형태를 보기로 한다. 여기에는 세 단계가 있다.

1)첫째는 믿음이 쌓여서 나오는 발심이다. 이 단계는 아직 ‘불자’가 못된 사람들이 거쳐야 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업과 과보를 믿고 10善을 일으키며,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며,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여, 여러 부처님을 만나 직접 받들어 공양하고 신심을 내어 수행한다. 소위 ‘재가 불자’가 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이렇게 하기를 1만 겁(劫)동안 지나면 출가하여 ‘출자 불자’ 되는데, 이를 두고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간다든가 혹은 여래종(如來種) 속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런데 이 경우에 만약 어떤 중생이 선근이 적어서 아득히 먼 옛날부터 번뇌가 매우 두터우면, 비록 부처님을 만나 공양하더라도 인천(人天)의 종자를 일으키고 혹은 이승(二乘)의 종자를 일으킨다. 설사 대승을 구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근기가 안정되지 못해서 어떤 경우는 잘 나아가고 어떤 경우는 물러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부처님께 공양하되 아직 1만 겁(劫)이 안 지났어도 그 중간에 인연을 만나 발심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부처님의 겉모습을 보고 발심하기도 하며, 혹은 여러 스님에게 공양하는 것을 계기로 발심하기도 하며, 혹은 이승인의 가르침에 의하여 발심을 하기도 하며, 혹은 다른 사람에게 배워서 발심하기도 한다. 이런 발심들은 모두 확고한 것이 아니어서 나쁜 인연을 만나면 경우에 따라서는 믿음이 물러나거나 사라져 이승(二乘)의 경지에 떨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발심하게 되면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첫째는 직심(直心)이 드러나는데, 이는 진여법을 제대로 생각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심심(深心) 드러나는데, 이는 일체의 모든 선행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고, 셋째는 대비심(大悲心)이 드러나는데, 이는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2) 둘째는 이해하고 실천을 겪어서 나오는 발심이다. 이 단계 ‘출가 불자’의 경우이다. 법성을 믿어서 법성의 본바탕에는 일체의 간탐이 없는 줄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에 법성에 수순하여 보시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의 본바탕은 물들어 더렵혀짐이 없어 5욕의 허물을 여읜 줄 이해하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지계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의 본바탕은 고가 없어 성내고 괴로워함을 여읜 줄 이해하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인욕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의 본바탕은 몸과 마음의 상이 없어 게으름을 여읜 줄 이해하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정진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의 본바탕은 항상 안정되어 그 본바탕에 어지러움이 없는 줄 이해하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선정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의 본바탕은 밝아서 무명을 여읜 줄 이해하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반야바라밀을 수행한다.

3) 셋째는 도를 체험해서 나오는 발심이다. 이때의 발심은 초지인 정심지(淨心地)로부터 보살 구경지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별로 일어나며 그에 따르는 체험의 ‘경계’가 나타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진여(眞如)를 체험한다. 그런데 전식(轉識)에 의지했기 때문에 ‘경계’라고 말했지만 이 단계를 체험한 자에는 경계가 없고 오직 진여의 지혜뿐이므로 법신 그 자체가 된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하다. 소위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방편을 통해서 불가사의함을 보이지만, 실로 이 단계에 있는 ‘출가 불자’ 즉 보살은 종성(種性)과 근(根)이 동등하고 발심도 동등하며 증득한 것도 동일하다. 왜냐하면 모든 보살이 다 3아승지겁을 거쳐 수행했기 때문이다. 단지 중생이 사는 세계가 같지 않고 그들이 보고 듣는 것과, 저마다의 능력, 욕구, 성질 등이 달라서 수행의 내용도 차별이 있는 것 같이 보여주신 것이다.
이런 단계를 거친 수행자는 모든 공덕이 다 완성되어 색구경처(色究竟處)에서 모든 세간 중 가장 높고 큰 몸을 보이신다. 이른바 일념(一念)이 끊어지지 않는 지혜로써 무명이 단번에 없어지는 것을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하는데, 이런 지혜를 터득한 수행자는 불가사의한 업이 있어 시방에 몸을 나타내어 중생을 이롭게 한다.
여기에서 두 가지 질문이 가능하다?
①첫째는 만약 무명이 단절된다면 심상(心想)도 없어질 텐데 어떻게 요별(了別)하기에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일체의 모든 경계는 일심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상념(想念)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번뇌가 남아있는 중생들은 경계를 허망하게 봄으로서 마음에 분제(分齊; 한계 또는 경계)가 생기고 그리하여 염상(想念)을 허망하게 일으켜 법성과 하나 되지 못한다. 그러나 깨달은 자가 되면 견상(見相)을 여의였기 때문에 제한이나 한계가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모든 법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법성의 본바탕에는 모든 허망한 법을 온전히 알 수 있는 위대한 지혜의 작용이 있어서 셀 수 없는 방편으로 모든 중생들이 알아들을 만한 능력에 따라 갖가지 법(法)과 의(義)을 열어 보여주신다. 그래서 일체종지라고 하는 것이다.
②둘째는 이렇게 깨달은 이에게는 ‘자연업’이 있어서 모든 곳에 나타나서 중생을 이롭게 한다고 하는데 왜 나에게는 안 나타나는가 이다. 그 대답은 이렇다. 깨달은 이는 모두 법신이 평등하여 모든 곳에 두루 하시지만 인위적인 조작의 의도가 없기 때문에 ‘자연’이라고 한 것이다. 다만 중생의 마음에 의지하여 나타난다. 중생의 마음이란 마치 거울과 같아서, 거울에 만약 때가 있으면 색상(色像)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중생의 마음에 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바른 믿음이란 ‘진여’를 믿는 것이고, 그리고 3보를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여섯 종의 바라밀 닦는 것이 바른 수행이다. 이 과정에는 크게 재가 ‘불자’의 단계어서 출가 ‘불자’의 단계로 나아가고, 다시 출가 ‘불자’의 단계에서도 점차적인 단계가 있는 것이다.

5. ‘불자’가 되기 위한 형식 요건

‘재가 불자’ 또한 ‘불자’임에는 두 말할 것이 없다. 따라서 재가 불교 철학의 정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가’와 ‘불자’의 개념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재가와 출가에 대해서는 2008년 8월호 <2. 사용하는 용어의 공감대를 위하여> 부분에서 분류하고 설명을 했으니 여기에서는 ‘불자(佛子; buddha-putra)’의 개념을 보도록 한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혼용하기 쉬운 의미로 ‘불교적인 삶’을 사는 것과 ‘불자의 삶’을 사는 것이 있다. 최근 모 대학의 철학전공 교수가 자서전적인 책을 출판하면서 “나 홀로의 길이기는 하지만 붓다를 찿아가는 길”이라고 지나온 자신의 삶을 드러낸 바 있다. 이 경우는 ‘불교적인 삶’이지, ‘불자의 삶’은 아니다. 이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불교적’이라는 말은 개인의 신념에 관련된 것인 반면, ‘불자’라는 말은 공동체의 규범과 관련되어 있다.
독자의 분명한 이해를 위해 결론을 먼저 말하면, ‘불자’의 경우는 일정한 통과의례를 거쳐 그에 합당하는 공식적인 인정 절차를 마친 사람이다. 소위 ‘교단’에 의한 통과의례의 유무가 ‘불자의 삶’이냐 아니면 ‘불교적인 삶’이냐를 가르는 기준이다. 어떤 기준에서 출발하던 그 나름의 가치가 있지만, 이 글에서 다루려는 것은 ‘불교적’이 아닌 ‘불자’의 삶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불자(佛子)라는 용어는 ‘대승 보살계’를 받은 불제자 또는 불교신자라는 뜻으로, 주로 『화엄경』 『법화경』 등의 대승 경전에 많이 나온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종자(佛種子; 부처가 될 종자)를 가진 존재라는 뜻으로 중생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리 흔한 용례는 아니다. 이렇게 보면 ‘불자’라는 용어는 대승의 ‘보살승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인 인물인 고타마 실다타 당시 그의 제자들을 ‘불자’라고 하지는 않았다. 석가모니의 입멸 후 500 여년이 지난 기원전 1세기경에 법신(法身; dharma-kāya)을 믿는 ‘보살승단’이 일어나면서 그들은 자신을 ‘불자’라고 호칭했다.
따라서 ‘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보살승단’을 인정하고 그들에 귀의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 스스로가 ‘보살승단’에 귀의를 했다고 해서 반드시 ‘불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다시 ‘보살승단’이 그를 ‘불자’로 받아들이는 인정 절차가 있어야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보살승단’으로부터 ‘대승 보살계’ 수계절차를 마쳐야 한다.
한국의 승단은 모두 ‘보살승단’이다. 이 승단 속에 ‘재가자’도 있고 ‘출가자’도 있는 것이다. ‘재가자’는 개별 사원에 소속되어 있고, ‘출가자’는 종단에 소속되어 있다. ‘재가자’는 자신이 속해있는 개별 사원을 중심으로 종교생활을 하고, ‘출가자’는 종단을 중심으로 종교생활을 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종교생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포살(布薩; uposatha)이다. 이것은 불교교단의 정기 집회로서 출가자들은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에 모여 수지한 계율을 점검하고, 재가자들은 출가승단이 있는 절에 모여 자신이 수지한 계율을 점검하고 가르침을 듣고 공양을 올리는 행위이다. 평상시의 생활은 각자의 전통과 처지에 따라서 한다.
물론 종교활동을 하는 시기와 방법은 지역마다 역사적 특성이 있지만, 한국의 경우는 시기적으로는 초하루[新月]와 보름[滿月]의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다. 그리고 방법적으로는 출가의 경우는 안거(安居; vārșika)의 결제로, 재가의 경우는 법회의 동참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먼저, 재자 ‘불자’의 법회는 초하루와 보름에, 경우에 따라서는 지장재일(18일)이나 관음재일(24일)에, 법회에 참여한다. 법회의 내용을 보면, 크게 천수경 독송-사시불공-설법으로 진행된다. 이 중 천수경 독송 부분에서 <10악 참회>를 독송하면서 재자 ‘불자’가 지켜야 할 계율을 암송하고 있다. 법회의 전 과정을 통하여 참회와 발원과 공양을 하고 있다.
다음, 출가 ‘불자’들의 안거는 선방에서 참선수자들만이 하기 때문에 극히 일부만이 동참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2008년부터 조계종에서는 포살제도를 도입하여 소속 전 승려에게 적용하고 있다. 규모가 작은 종단은 소위 종단 연수교육 등으로 대신하고 있다. 사실적으로 법회에 참여해야만 재가‘불자’이고, 포살에 참여해야만 출가‘불자’이다. 그리하여 ‘불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불자’의 길에 들어선 첫 순간에 맹세한 계율의 실천을 주기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그래야만 ‘불자’이다. 혼자 점검하는 것은 ‘불자의 삶’이 아니라 ‘불교적인 삶’일 수는 있다. 스스로 ‘재자 불자’임을 자부하면서 법회에 참여하지 않는다던지, 스스로 ‘출가 불자’임을 자처하면서 포살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자가 모순이다. 계율을 받고 그것에 대한 정기적인 점검 절차를 하는 종교생활을 전제로 할 때에 비로소 ‘불자’라 할 수 있다.
결국 재가이던 출가이던 ‘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계율을 매개로 하는 승단 공동체를 전제로 한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불교승단은 모두 대승을 표방하는 ‘보살승단’이다. 그리고 이 승단은 ‘종단’이라는 이름으로 문화부에 등록되어 있다. 그러니 모든 ‘불자’들은 원칙적으로 종단에 소속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불자’라면 위에서 말한 ‘종교활동’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재가‘불자’에 한정해서 말해보면, 종단에 소속되어 있는 절(또는 공동체)에서 수계 절차를 밟고 또 주기적으로 거기에 참여하여 그 계율을 점검하는 그런 ‘종교행위’를 해야 한다. 이것이 외형적인 필요조건이다.

6. ‘불자’의 공동 목표

외형적인 최소한의 조건인 ‘불자’들이 모여서 하는 ‘종교활동’에서, 그것이 안거이던 혹은 법회이던, ‘불자’의 공동 목표란 무엇인가? 그것은 보살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깨달음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위에서 보았듯이 ‘불자’라는 용어의 역사성에서 기인한다. ‘불자’란 ‘보살승단’에 속한 구성원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불렀던 것이니까 말이다. 물론 이 승단에는 8월호 <3. ‘불자’에도 등급이 있다> 부분에서 언급했다시피 등급이 있다. 출가 ‘불자’가 1등이고, 재가 불가는 2등이다. 출가 ‘불자’는 정정취(正定聚)이고, 재가 ‘불자’는 부정취(不定聚)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정취(定聚)에 들지 못한 재가 ‘불자’들은 10악을 참회하고 10선을 행하여 언젠가는 출가 ‘불자’인 정취(定聚)에 들도록 서원해야 한다. 각자가 처한 업이 다르기 때문에 현실적인 출발도 다른 것이다. 그러나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에는 차이가 없다.
‘불자’의 공동 목표로 다시 돌아가자. 이 목표는 ‘보살승단’의 이념과 직결되어 있다. 그 이념의 핵심에는 법성(法性; dharmatā) 사상이 깔려있다. 중생의 심신작용에는 불생불멸하며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본바탕이 있는데 이 본바탕을 대승불교에서는 법성이라 한다. 중생의 본바탕인 법성에는 불가사의한 영험과 청정한 지혜의 기능이 있다. 이런 본바탕이 펼쳐지는 세계를 화엄의 교학자들은 ‘법계(法界)’ 또는 ‘진계(眞界)’라 한다. 한편 남종선의 선사들은 그 법성을 ‘주인공’ 또는 ‘부모가 낳아주기 이전의 나의 본 면목’ 또는 ‘당체’라 이름 하기도 한다.
대승을 표방하는 한국의 승단은 역사적으로 이 사상에 기초해 있다. 첫 새벽에 종성을 보자.

원차종성 변법계 철위유암 실개명
願此鍾聲 遍法界 鐵圍幽暗 實開明               
삼도이고 파도산 일체중생 성정각
三途離苦 破刀山 一切衆生 成正覺
나무비로교주 화장자존 연 보게지금문 포 낭함지옥축 
南無毗盧敎主 華藏自尊 演 寶偈之金文 布 琅函之玉軸
진진혼입 찰찰원융 십조구만오천사십팔자     
塵塵混入 刹刹圓融 十兆九萬五千四十八字
일승원교 『대방광불화엄경』  
一乘圓敎 大方廣佛華嚴經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첫 새벽에 내는 첫 소리이다. ‘법계(法界)’, ‘법계성(法界性=法性)’ ‘비로자나 부처님’, ‘심(心)’, ‘정각(正覺)’, 이것이 기본이다.
『화엄경』에서는 본바탕인 ‘한마음’ 위에서 소위 12지(支) 연기가 펼쳐진다고 한다. 연기법이 펼쳐지는 공간이 법계(法界)이다. 연기되는 현상 각각은 모두 공하고 무상하지만, ‘한마음’은 본래의 바탕이므로 영원하다. 연기의 소산인 ‘현상’에 휘둘리지 말고, 본바탕인 ‘한마음’을 각자가 저마다 몸소 체험하여, 그 본바탕에 갖추어진 불가사의한 능력을 꾸밈없이 사용하면서 세상살이하자는 것이 ‘보살승단’ 궁극 목표이다.
그러면 본바탕을 어떻게 하면 체험할 수 있을 할까? 그것은 ‘무심’해야 한다. ‘무심’해야만 본바탕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선행된 인상’을 가지고 사물을 인식한다. 이런 인식 방법으로 인해 생긴 지식에는 대상 즉 경계가 있다. 이 대상인 경계는 선행된 인상과 매개되어 우리들의 의식 활동 속에 표상된다. 이런 원초적인 순환 구조 때문에 본바탕은 ‘인식’의 방법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 본바탕을 개별적 ‘존재자’ 내지는 ‘존재 현상’의 일종으로 간주하여 대상화 하는 동시에, 선행된 인상의 구성체인 ‘이성’을 매개로 하여 본바탕을 인식하려고 한다. 잘 못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본바탕은 ‘존재’ 그 자체이지 개별적 경계 즉 ‘존재자’는 아니다. 오히려 개별적 경계를 경계이게 해주는 그 무엇이다. 이것은 우리가 ‘무심’할 때에 무매개적으로 우리 앞에 드러난다. 체험하는 게 아니라, 체험되어지는 것이다. 이런 체험 위에서 각종 연기 현상이 무상한 줄을 알아, 거기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 본래 청정하건만 무상한 현상에 휘둘리는 원인은 ‘어리석음’ 때문인데, 시간을 한정하지 말고 쉼 없이 ‘어리석음’을 제거해야 한다. 설사 금생에 안 되면 내생에, 그렇게 하기를 세세생생에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대승의 ‘보살사상’은 종교와도 맞닿아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어리석음’이 제거 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교종과 선종이 갈라진다. 남종선의 전통에 있는 당나라 선사들은 ‘관조(觀照)하라’ 하고 송나라 선사들은 ‘화두(話頭)에 집중하여 일체의 사량 분별을 쉬라’고 한다. 반면 화엄에서는 ‘관법(觀法)을 바탕으로 보살도를 실천하라’고 한다. 즉 6바라밀 내지는 10바라밀 더 나아가서는『화엄경』에 펼쳐지는 보살행을 실천하라고 한다.
법신의 상주를 믿는 보살승단에서 보면, 역사적인 석가모니와, 그의 말씀과, 그의 제자들만을 3보라고 고집하는 남방 상좌부의 전통은 아무래도 편협하게 느껴진다. 그들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살승단의 ‘불자’는 법신 부처와 대승을 이어가는 보살 승단에 귀의한다.
이런 법신을 믿는 ‘불자’에는 재가도 있고, 출가도 있다. 법성을 신앙하고 실천하는 점에서는 두 ‘불자’들이 모두 같지만, 절에 살면서 보살행을 하느냐, 가족과 함께 살면서 보살행을 하느냐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차이는 인간들 각자 저마다 가지고 있는 ‘생명운동의 긴 역사’ 속에 놓인 과정상의 차이이지 본질적인 차이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먼저 바른 공동체에 입단한 출가와 재가가 동등할 수는 없다. 재가 ‘불자’는 출가 ‘불자’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지도를 받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법회에 동참하여 정기적으로 대승계를 점검하는 일이다.

7. 두 불자들의 기본적 ‘종교생활’

출가를 한 ‘불자’들은, 안거(安居; vārșika)라 하여 여름과 겨울에 1년에 두 번 씩 각 3개월간 집단생활을 한다. 물론 이 집단생활 중에는 가정생활을 할 수 없다. 그 기간 중 그믐[新月]과 보름[滿月]날에는 한 자리에 모여 자신들이 수지한 계율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를 점검한다. 이것을 포살(布薩; uposatha)이라 부른다. 그리고 가정생활을 하는 ‘불자’들은 이런 출가 ‘불자’들이 전적으로 수행에 매진할 수 있도록 여러 물자를 댄다. 반면에 그들로부터 좋은 말씀을 듣는다.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는, 대승을 믿는 ‘불자’ 중에서 ‘출가 불자’를 한자로 ‘중(衆) 승자’를 써 ‘僧’로 표기했고 다시 한국말로는 ‘스님’이라 불렀다. 봉건왕권 시대에는 ‘출가 불자’인 스님에 대해서는 특별히 대접했다. 중국에서는 종교지도자, 예를 들면 불교의 스님이나 도교의 도사님들은 반드시 출가를 전재로 하기 때문에 ‘딴 세상에 사는 손님[方外之客]’이라 하여 세금과 병역에 특별한 혜택을 주었다. 물론 이런 혜택이 주어지는 만큼 출가에 대한 통제권 소위 허가권이 조정에 있었다. 그 허가를 표하는 국가 자격증이 도첩(度牒)이다.
이제 대한민국에는 그런 봉건왕권은 어찌했든 무너지고, ‘민주(民主)’ 국가가 건국되면서 동시에 승려에 대한 혜택도 통제도 사라졌다. 따라서 특정 종교를 믿는 국민이 주인이 되어서 종단이나 교단을 만들고, 자신들이 믿는 교리와 구성원의 합의에 의해서 모든 것을 움직인다. 현재 한국에서 스님이 되려면, 대한민국은 ‘민(民)이 주(主)되는’ 국가이기 때문에, 스스로 ‘나 홀로 스님’을 해도 되고, 단체를 구성하여 ‘단체의 스님’이 되어도 된다. 단체 중에는 문화부에 ‘종단등록’을 마친 조계종이나 태고종이나 진각종 등도 있고, 물론 종단 등록을 안 한 불교신앙 단체도 있다.
한편, ‘재가 불자’는 역사 및 교리적으로 볼 때에 신앙적으로나 조직 운영에서 ‘출가 불자’의 지도를 받게 되어 있다. ‘재자 불자’는 ‘출가 불자’가 생활하는 소위 절에 소속되지 않은 자체만의 별도의 단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어서는 ‘별개의 단체’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남묘호렌게교’를 암송하는 창가학회 SGI는 ‘전통적인 불교’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 물론 ‘별개의 단체’라고 해서 의미 없는 것도 아니고 무가치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그 자체만으로 불법(不法)이라 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을 대승의 ‘불자’ 단체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이비(似而非)’ 단체이다. 한자의 말 뜻대로 ‘유사하기는 하지만’[似], ‘아닌 것[非]’이다.
‘출가 불자’들은 자신들이 소속되어 있는 종단의 종교시설(예를 들면 절)에서 생활하면서 수도를 한다. 반면 ‘재가 불자’들은 나름의 가정을 가지고 그 속에 살면서, ‘출가 불자’가 상주하는 절을 보호 하고 지원하면서 그들의 지도를 받으며 ‘종교생활’을 한다. 출가자는 ‘전업’이지만, 재가자는 ‘겸업’이다. 그러다보니 자연 수행의 집중도나 성취도 나아가서는 각 불자 집단에 요구되는 의무나 권리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교리적이고 역사적인 배경과 또 불교의 근본정신을 이해하게 되면, ‘출가 불자’와 ‘재가 불자’가 각각 서로 어떻게 처신해야할 지에 대한 일정한 방향과 기준이 나온다.
끝으로 ‘종교생활’에 대해서 부가하기로 한다. 소위 ‘종교생활’을 함에 있어 재가와 출가를 막론하고 ‘불자’들의 내면적인 목표에 대해서는 <6. ‘불자’의 공동목표>에서 밝힌 대로이다. 여기에선 그 외형적인 생활을 살피기로 한다. ‘출가 불자’의 기본이 되는 외형적 ‘종교생활은’ 기본적으로 안거와 포살이다. 한편 ‘재가 불자’ 기본적인 종교생활은 ‘출가 불자’들이 제대로 ‘종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물자를 대고, 일정한 시기에 그들 뵙고 말씀을 듣는 일이다. ‘재가 불자’들의 이런 ‘종교생활’은 소위 ‘법회’에 참여하는 형식을 통해서 행해진다.
‘재가 불자’들의 종교생활인 ‘법회’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각 개별 사원별로 석가부처님 탄신일, 출가일, 성도일, 열반일 등 4대 경축법회가 있고, 각종 특별법회로는 백중법회, 방생법회 등이 있고, 매월마다 음력 초하루 보름, 그리고 각종 관음재일 지장재일 약사재일 산신재일 등이 있다.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일요법회도 있다. ‘재가 불자’로서의 ‘종교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형식적으로 몇 회를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정론화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출가 불자’가 거주하는 ‘절’과 ‘관련을 맺고’, 그곳에서 행하는 법회에 ‘본인이 직접’ 동참하여 ‘종교생활’을 해야 한다. ▣    <2008.08.22.>

재가 불교 철학을 위한 시도적 논의 -추가분
8. 나의 입장

불교는 역사적으로도 기원전 5세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긴 세월을 걸쳐 전개되어 왔고, 또 공간적으로도 인도를 비롯하여 아시아의 여러 곳에 전파되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하여 불교의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매우 난해하다. 게다가 학문이 넓지 못한 나로서는 인간적으로 한계가 있다. 이런 이유로 어느 경우이건, 나는 불교의 무었을 논함에 있어 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나 자신이 수용하고 있는 철학적 입장을 분명하게 함으로서 나와는 다른 다양한 논의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면 나의 입장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의 게송으로 대신할 수 있다.

南無毗盧敎主, 華藏慈尊, 
演寶偈之金文, 布琅函之玉軸,
塵塵混入刹刹圓融, 十兆九萬五千四十八字,
一乘圓敎, 大方廣佛華嚴經.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번역; 연화장 세계에 계시는 자비하신 존자께서는 보배로운 게송으로 금쪽같은 말씀을 연설하시고; 옥으로 만든 함 속에 간직된 옥축의 경전을 펼치셨는데; (그 진리는) 미세한 먼지 속에도 들어 있고 곳곳의 무수한 온 세계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습니다. (그 문자는) 10조 9만 5천 4십 8개의 글자로 이루어졌고 (그 내용은) 일불승을 표방하는 완전한 가르침입니다. 저는 이제 그 『대방광불화엄경』에서 표방하는 말씀에 귀의합니다.

그 말씀에 귀의한 불자들이여!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고자 한다면
온 법계가 ‘한 마음[一心]’위에서 緣起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관찰하시오.

9. 교단의 구성

여기에서 말하는 ‘교단’이란 역사적이며 현실적인 믿음의 공동체를 말한다. 이 ‘교단’을 구성한 집단들은 크게 출가 불자와 재가 불자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출가 불자는 다시 수행의 정도에 따라 ‘성중’과, 그 ‘성중’을 스승을 따라 다니면서 수행하는 ‘권속’으로 구성된다. 자세한 용어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聖衆; 성문이나 연각이나 보살승에 속해 있는 4果(向) 또는 解脫僧.
      (例文; … 巳時佛供의 <茶偈>에 나오는 “供養十方調御士, 演揚淸淨微妙法, 三乘四果解脫僧, 願垂哀納受, 願垂哀納受, 願垂慈悲哀納受.”; 또 <七頂禮>의 “至心頂禮供養 千二百 諸大阿羅漢 無量慈悲聖衆)

‣眷屬; 출가 수행하는 과정에 있으나 과위를 아직 증득하지 못한 출가 수행자.
      (例文; … 某某菩薩與其眷屬)

‣在家佛子; 가족 공동체에서 살고 있는 신자.
      (예문; 석가부처님 열반 당시에 장례를 담당했던 재가자들)

‣승보와 승단의 차이점; 대승불교에서 불자들은 출가나 재가를 막론하고 佛殿(혹은 塔殿; stuūpa)에 모여 ‘齋; upoṣadha’를 올리는데, 그 때의 ‘茶偈’에 나오듯이 (1)十方調御士와 (2)演揚淸淨微妙法과 (3)三乘四果解脫僧에게 헌공한다.
3보 중의 하나인 ‘승보’와 ‘승단[역사적 현실적인 믿음 공동체]’은 범주가 다른 分類支이다. ‘승보’는 이념적 범주이고, ‘승단’은 현실적 범주이다. 이 두 범주의 이해를 보다 더 돕기 위해 이 두 범주 개념을 대비해 보면, (1) ‘승단’의 범주에 들어가면서도 ‘승보’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2) ‘승보’의 범주에 들어가면서도 ‘승단’의 범주에 안 들어가는 경우도 있고, (3) ‘승단’에 들어가면서도 동시에 ‘승보’인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이해를 돕기로 한다.
첫째, ‘승단’의 범주에 들어가면서도 ‘승보’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를 먼저 보자. 역사적으로 현실적인 교단에 소속되어 있는 ‘출가승’ 중에서 아직 일정한 수행의 경지인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4果와 4向, 그리고 해탈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수행의 과정상에 있는 승려 들’도 있다. 즉, 출가 불자인 승단에는 ‘과위를 증득한 승려들인 聖衆’도 있고, 아직 그런 과위를 증득하지는 못했지만 ‘성중’을 따르면서 수행하는 ‘眷屬; parivaāra’들도 있다. 이 의미는 범어나 팔리어 불교문헌에서 ‘世俗僧伽; sammutisamgha’와 ‘聖衆; āryasamgha’을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을 상기하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둘째, ‘승보’의 범주에 들어가면서도 ‘승단’의 범주에 안 들어가는 경우를 보자.
이 경우는 재가 불자의 철학적 모색을 하는 본 포럼의 주제와도 관련된다. 재가 불자는 ‘교단’적으로는 출가 불자인 ‘승단(즉 세속승가)’에는 속하지 못한다. 물론 ‘교단’의 일원으로는 들어간다. 그런데 문제는 초기불교의 경우에도 재가 불자 중에서 4향, 4과에 성취한 사례들도 있고, 특히 보살승을 표방하는 대승에서는 재가 불자 중에서 해탈에 드는 경우도, 적어도 경전의 文面上으로는, 허다하다. 단순화시켜서 말하면, 과위를 증득한 사람이면 ‘승보’이다. 여기에는 출가 불자이냐 재가불자이냐에 관계없다. 심지어는 불자냐 아니냐와도 무관하다. 연각승을 인정하는 화엄교학에서는 그렇다. ‘一乘’을 표방하는 화엄에서는 ‘會三歸一’이라고 해서 성문, 연각, 보살을 ‘한 배; 一乘’를 탄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위에서 발표자는 ‘승보’는 이념의 범주에 속하고, ‘승단’은 역사적 범주에 속한다고 했던 것이다.
셋째, ‘승단’에 들면서 동시에 ‘승보’인 경우를 보자.
출가 집단인 ‘세속승단’에 속해 있으면서 과위를 증득한 불자가 이 경우에 속한다. 한국의 경우는 ‘과위 증득’이라는 말 대신 선불교의 영향이 큰 관계로 ‘깨달음’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출가승단에 속해 있으면서 ‘깨달은 분’이 여기에 속한다. 이 경우, 대개는 한국의 각 종단에서 받드는 ‘종조님’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고, 각 산문의 방장 스님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고, 종정 스님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고, 소위 ‘한 소식’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스님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10. 교단의 구성원이 되는 길

여기에서는 한국이라는 구체적인 현상을 염두고 논의를 해보고자 한다. 교단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불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불자에는 교단에 속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1) 출가 불자가 되는 길
현실적으로 한국에는 불교의 ‘종단’이 있다. 출가 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해당 ‘종단’에 가서, 그 ‘종단’이 정한 법규에 따라 승가의 일원이 될 수 있다. 각 ‘종단’들은 ‘원칙적’으로 일정한 이념을 공유하고, 일정한 행동강령 등을 공유한다. 일정한 이념이란 ‘경’과 ‘논’을 통해서, 일정한 행동강령이란 ‘계’와 ‘율’을 통해서 표출된다.
예를 들어 조계종은 『금강경』과『전등록』을 공동의 이념으로 표방하고, ‘비구 250계’와 각종 ‘율의’를 행동강령으로 한다. 한편 태고종은『화엄경』과  『금강경』을 공동 이념을 하고, ‘대승보살계’를 행동강령으로 한다. 이 두 종단의 차이는 여러 면에서 대비되지만 우선 승려들의 ‘결혼 허용 여부’로 구별 가능하다. 물론 현실적으로 각 종단이 과연 이념을 공유하고, 또 계와 율을 지키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념을 공유하고 또 행동강령을 점검하는 ‘시스템’이 있느냐 없느냐는 현실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시스템’이 없이는 궁극적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는가 아닌가에 따라 ‘참된 종단’과 ‘수준 낮은 종단’을 평가할 수 있다. 그러면 ‘시스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說法; dharmmaṃāroceti’과 ‘齋 혹은 布薩; upoṣadha’을 운영하는 것이다. 출가 불자들이면서도 일정한 시기에 모여서 위에서 말한 聖衆(혹은 불교 지도자)을 모시고 주기적으로 ‘설법’을 듣고 ‘재’를 지내는 ‘시스템’을 운영하지 않는다면, 참된 의미의  승단이라 할 수 없다. ‘참된 승단’이 없으면 ‘참된 교단’도 있을 수 없다.
조계종에서는 2008년부터 포살 재회를 비로소 부활시켰다. 이와는 달리 ‘설법’의 경우는, ‘선방’에서는 방장의 주도하에 ‘上堂法門’ 또는 ‘小參法門’ 등을 실시하고, ‘강원’에서는 講主의 주도하에 ‘上講’을 한다. 

2) 재자 불자가 되는 길
출가 불자들이 모여 사는 곳을 ‘절’이라 하고, ‘절’은 ‘종단’에 소위 ‘사암등록’을 하게 되어 있다. 재가 불자가 되는 방법은 ‘종단’에 ‘등록’된 ‘절’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출가불자들이 소속 교구 또는 본사가 있듯이, 재가 불자도 소속 ‘절’이 있다. 대부분의 생활은 가정을 기반으로 생업에 종사하면서, 일정한 날짜에 소속한 ‘절’에서 열리는 ‘법회’와 ‘재’에 주기적으로 참석한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소속된 사암을 근거지로 하여 ‘종단’이 公認하는 ‘3귀의 5계’ 또는 ‘보살계’를 수지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법회’를 통해서 이념을 다지고, ‘재’를 통해서 행동강령을 점검한다. 재가 불자들이 ‘재’에서 점점할 행동강령 즉 계는 ‘5계’ 내지는 ‘10선계’이다. 현실적으로 출가 불자들이 ‘설과’과 ‘포살’을 하듯이, 재가불자들은 절의 齋日에 출석하여 사시불공을 올리기 전에 『천수경』을 轉經하면서 <10악 참회>를 한다.
한편, 재가와 출가를 막론하고 ‘법회’를 통해서 다지는 이념은 ‘종단’마다 다르다. 이념이 같은데도 ‘종단’을 따로 차려 소위 ‘分宗’을 한다면 세속화 된 것으로서 ‘創宗’의 정당성이 떨어진다.
아무튼 ‘법회’를 통해서 이념을 다지는데, 大韓佛敎曹溪宗이 만약 선종이라면 선종의 이념이 있고, 만약 조계종이 禪敎를 竝合한 敎團이라면 선과 화엄의 이념이 있다. 마찬가지로 大韓佛敎眞覺宗에는 진각종의 이념이 있고, 大韓佛敎天台宗에는 천태종의 이념이 있다. 그 이념에 따라서 수행의 방법과 믿음 생활의 방법이 제시된다. 그러나 각각의 길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 ‘해탈’을 목표로 향해간다는 점에서는 평등하다.

3) 제3의 길; ‘종단’에 들지 않고 불자가 되는 방법
나는 개인적으로 재가불자도 아니고 출가불자도 아닌 ‘제3의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3의 길’은, ‘해탈’에 도달하기 위해 ‘교단’에 들어가서 ‘聖衆’의 지도를 받으면서 동시에 ‘琢磨相成’하는 도반 대중들과 함께 수행하는 ‘교단’에 入團하여 수행하는 것에 비교해, 그 성취도가 떨어지고, 또 ‘邪道’로 빠질 위험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느 경우에도 그렇듯이, 특히 ‘제3의 길’을 가는 경우는 ‘시방에 상주하는 3寶’를 말 그대로 ‘보배로 삼아’ 자신의 수행을 점검해야 한다. 이 경우는 자기 혼자 점검하기 때문에 잘못하면 스스로에게 속기 쉽다. 그러나 불가능한 길은 아니다. 물론 이때의 ‘3보’는 ‘住持三寶’가 아니라 眞如法身을 근간으로 하는 ‘同體三寶’이다.
그런데 내 개인적으로는, 현재 한국에는 ‘종단’ 즉 ‘주지삼보’가 완전히 100% 非佛敎化된 타락된 집단이 아니라면, 또 내가 보기에 사실적으로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제3의 길’은 오늘의 현실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제3의 길’은 북한처럼 불교가 국가적으로 인정되지 않거나, 또는 역사적으로 ‘주지삼보’가 없는 곳에서, 또는 ‘주지삼보’가 회생불가능 할 정도로 타락한 경우에는, 그것도 가능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나의 머릿속에는 심정이 복잡하다. 왜냐하면, 부파교단과 달리 대승교단이 출현했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승의 불자들은 부파교단에서 수계를 하지 않았다. 물론 ‘結界; sīmābandha’도 함께 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 부파교단의 승단에 가서 ‘설법’을 듣지도 또 ‘재’를 함께 지내지도 않았다. 경이 달랐고, 논이 달랐고, 율이 달랐다. 3藏이 달랐다. 게다가 대승이 귀의하는 佛寶는 法身이다. 역사상의 석가세존도 ‘法身’의 ‘化身’으로 본다.
만약에 현재 한국의 불교 교단이, 상좌부와 결별을 하던 초기 대승운동의 상황이라면, ‘제3의 길’이 유효할지도 모르겠다. 또 대승불교의 본래 정신으로 복귀하기 위하여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면 역시 ‘제3의 길’이 유효할 지도 모르겠다. 진각종, 진언종, 불입종, 법화종, 천태종, 원불교를 창종한 ‘宗祖님’들은 창종 당시의 불교 상황을 스스로 그렇게 진단한 것은 아닌가? 대승불교의 ‘본래 정신’을 되살리자고 말이다. 그리하여 소위 불교적인 의미의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으로 볼 수는 없을까? 이들 종단을 창종한 ‘宗祖님’들은 조선을 거쳐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 건국 시기에 이르기 까지 ‘嗣資相承 해 온 역사적인 僧譜’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영조 때에 간행된 사암채영스님의 『불조원류』가 보여주다시피, 조선에 전승된 ‘僧譜’는 모두 태고보우를 중흥조로 하여 繼代하고 있다. 태고 1세, 태고2세 식으로 말이다. 조계종이 그렇고, 태고종이 그렇고, 또 이 두 종단으로부터 ‘分宗’한 종단이 그렇다.
‘제3의 길’을 가는 불자 중에는 다른 나라에 있는 ‘교단’에 소속한 재가 불자와 출가 불자도 현재 한국에는 존재한다. 스리랑카의 교단이나 태국의 교단에서 출가 수계를 받고 한국에서 불자로서 수행 정진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유럽이 미국에서 받는 경우도 있다. 또 드러나지는 않지만 일본에서 받은 경우도 있다. 이 경우도 역시 자신이 소속된 교단에 주기적으로 출석하여 ‘법회’와 ‘재’에 동참하는 것을 반드시 전제로 해야 한다. 

11. 大乘의 聖衆에 드는 방법

1) 정정취에 드는 길
이 문제를『大乘起信論疏筆削記會編』(이하에서는 줄에서 기신론이라고 칭함)을 근거로 정리해 보겠다. 기신론에서는 ‘正定聚’들지 못한 중생들이 ‘정정취’에 드는 방법에 대하여 4종류의 ‘바른 믿음’과 5종류의 ‘바른 실천’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원컨대 내 마음 속에 분별하는 것을 없애서 시방 세계의 모든 곳에 널리 모든 선한 공덕을 실천하며 미래가 다하도록 한량없는 방법을 동원하여 고뇌하는 모든 중생을 구원하여 그들을 모두 열반의 즐거움을 얻도록 하겠다”라고 發願할 것을 제시하고, 자비를 베풀어서 급기야는 ‘非常的 실천 방안’도 제시해주고 있다.
이 방법을 따라서 수행을 하면, 그 수행의 결과로 재가 불자도 법신을 약간 체험할 수 있게 되고(=자신이 법신과 약간은 같아질 수 있게 되고), 자기 자신도 출가하고, 수행하여, 도를 이루고, 마침 내는 열반에 드는, 8相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 4종류의 바른 믿음; 진여, 불, 법, 승을 믿고 귀의하는 것.
‣ 5종류의 바른 실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지관 등을 닦는 것.
‣ ‘非常的’ 실천 방안; 마음이 약한 이들 중에는 자신은 사바세계에 살기 때문에 부처님을 친견할 수 없다고 스스로 고연히 걱정하는 자도 있다. 그 결과 4종의 믿음과 5종의 실천을 닦기를 포기하는 수도 있다. 이런 중생을 위하여, 그런 중생들에게는 “專念하여 타방의 부처님 나라에 환생하여 그곳에서 부처님을 항상 뵙고 수행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훗날을 기약하는 염원을 세우는 수행을 하라고 한다. ‘非常的’이라고 한 것은 발표자의 해석 용어이다.
이상의 내용을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에서는 (1) ‘관행’을 닦아서 비로법계를 깨닫는 동시에, (2)보현보살의 수많은 ‘行願’을 실천하라고 한다. 진수사문 정원법사(1011-1088)는 그 경을 중심으로 하여 수행에 필요한 일종의 매뉴얼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華嚴普賢行願修證儀』이다. 일종의 儀軌이다.

2) 정정취에 들어간 다음 ‘果位’를 체험하는 길
『華嚴經』의 3‘賢位’(10주, 10행, 10회향)와 10‘地位’에 들어가서 수행하는 것이다. 이 수행에 관한 매뉴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교하고 철학적인 ‘화엄교학’의 논의에 들어가야 하므로, 본 포럼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여기서는  ‘화엄교학’에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하여, ‘화엄교학’을 배워 수행하려고 하는 불자들에게 공부 순서만 소개한다. 공부 순서는『華嚴經隨疏演義鈔』에서 제시한 방법을 따라서 하면 되겠지만, 그 방법이 원체 방대하기 때문에 우선 ‘懸(玄)談’⇒‘三賢’⇒‘十地’를 밟는 것이 지름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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