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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특별기고] MB정부규탄 불교도대회를 보고 [3]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08.09.22 14:41
  • 댓글 0

경제·사회·생태 대변동 시기 불교적 사유에 해답이 있다

나는 그 기조연설에서 ‘촛불의 풍류와 화엄개벽’을 주제로 전세계를 향해서 말을 건넬 터이다. 어찌 할 터인가? 대세(大勢)다. 거스를 터인가?
함께 타고 갈 터인가?

셋째, 세계문명사의 중심은 분명 대서양에서 동아시아·태평양으로 이동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로트르담허브에서 한반도 삼면해안의 동로트르담허브로 이동하고 있다. 수많은 전문가들의 일치된 단언(斷言)이다. 이제 이 한반도는 지나간 역사 속에서 민족이 겪어야했던 976회의 외국 침략속에서도 끝끝내 지켜왔던 고대적 삶의 기억과 미래를 향한 눈부신 이상을 결합하는 ‘성스러운 컵(聖杯)’을 인류와 세계 앞에 제시해야 한다.
경제생활의 경우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신시(神市)’다.
칼·플라니 개념으로는 ‘호혜시장(互惠市場)’이다.
고대 아시아시장에 엄존했던 ‘호혜와 교환과 획기적 재분배’의 시장시스템의 눈부신 부활말이다.

불교는 새 시장원리의 근원

아메리카 세계시장개척의 화살은 바로 이 동로트르담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호혜시장의 창조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물론 ‘신시’의 이념은 옛 한민족의 신화적 고향인 1만4천년전 파미르의 ‘마고성(麻姑城)’의 ‘신시신화’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바로 이 신시의 원형은 당대 천문학에 의해 관측된 성운군(星雲群)인 천시원(天市院)의 천시네트워크(天市群)의 우주적 생성원리인 팔여사율(八呂四律) 즉 여성성·혼동성이 여덟에 균형성과 질서가 넷이고 이상한 비율에 있었다.
칼·플라니조차 감지할 수 없었던 바로 이같은 우주원리에 토대한 신시가 이제부터 우리의 네오·르네상스운동과 함께 우선은 동아시아, 나아가 온 아시아,유라시아, 아메리카와 유럽, 그리고 온 세계인이 모두 참가해서 건설해야 할 새로운 영적 생명경제다.
팔여(八呂)는 몰아치는 바람이니 혼돈성이다. 바로 이것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 사이의 사랑이요 모심이요 섬김이요 서로가 서로에게 돌아감이니 바로 호혜(互惠)다.
그리고 교환은 사율(四律)이다. 사율이란 동아시아 고대인과의 우주율격이자 질서의 원칙인 동서남북이나 태양·소양·태율·소율 등 사상(四象), 사단(四端)이니 소비와 공급, 유목계와 정확계, 그것을 관할하는 체제의 단군계(檀君系)와 임검계(臨檢系)등을 연결하는 네거리의 질서(피타고라스의 이른바 ‘Tetractis’를 중심으로 한 엄정한 사각(四角)거래다.

세 번째 획기적 재분배는 복잡하다. 호혜 즉 팔여의 혼돈적 사랑 또는 모심과 교환 즉 사율의 질서와 율격과 엄정한 거래관계 사이의 상생이나 상극관계 밑에 숨어있다. 새질서로서 그것이 현실화 할 때는 바로 이 같은 드러난 차원에서의 호혜의 팔여와 교환의 사율 사이의 이러저러한 상호관계상의 여러쌍의 ‘혼돈적 질서’나 ‘기우뚱한 균형(분명 균형은 균형이로되 어느 한쪽에 중심이 더 가있는 기우뚱한 상관)’이 발생하게 된다.
공산당식의 평균적 평등은 죽은 균형이거나 머릿속의 유치한 관념적 균형이지 산균형이 아니다.

바로 이 원리는 ‘화백’이 역시 단하(壇下)의 팔여의 시끄러운 군중의 비판이나 제안과 단상(壇上)이 사율의 수렴적인 지도부의 접수나 방향제시, 대책 제안 등과의 살아있는 관계로서의 ‘직접-대외사이의 기우뚱한 균형(직접중심의)’의 원리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동아시아와 한반도에서 창조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이것을 불교와 연관시키려면 어떻게 될까?

화엄경 십지품(十地品) 거의 전체에 이 사상들이 이렇게 저렇게 다양하게 펼쳐져있으니 그 가장 쉬운 상상적 표현이 ‘달이 천개의 강물에 서로 다르게 비친다(月印千江)’이다.
혼돈한 다양성, 차이, 복잡성, 개성들이 천개의 강에, 질서의 엄정한 한 근원적 원리가 달에 연계되어 살아 생동하는 관계망 자체가 그것이다.
불교는 바로 현대 세계가 꿈꾸고 요구하는 새로운 삶 새로운 시장원리의 근원이기도 하다.
나는 중앙아시아의 키르키스, 그 이서쿨호숫가의 옛시장 ‘야르미르크트’에서 옛 원형을, 그리고 베트남 후예의 강가에 있는 동바시장에서 현대의 바로 그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조국은 근사치가 있는 호혜시장의 한자리 새로운 모습을 희미하나마 본 일이 있다.

 
김지하 시인은 경제·사회·생태 등 인류 대변동의 시기에 대한 대응책은 불교적 사유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바탕은 바로 선(禪)이라는 게 시인의 설명이다.

생태계 파괴가 잘하는 짓인가

생명의 네가지 특성인 관계성, 다양성, 순환성, 영성이 다 살아있는, 그러나 가지가지 수많은 형태로 다양한 소비자와 상품들과 복잡한 조건 속에서 생산-유통-소비의 총괄적인 ‘개체-융합’의 원리를 통해 ‘탈상품화(脫商品化)’와 ‘재상품화(再商品化)’, ‘가격다양성’과 ‘협의가격’등을 통해서 새시대의 ‘신시’는 새로운 형태로 살아날 것이고 그 출발과 과정과 결과에서 마치 우리 옛 삶의 ‘계(契)’와 ‘품앗이’ 같은 내부공생(內部共生·endosymtiosis)의 경제사회적 호혜가 실현될 것이다.
다음 기회에 상세히 말하겠거니와 이 모든 것이 동학의 ‘만사지(萬事知)’원리와 함께 근원적으로는 대화엄(大華嚴)사상 안에 영롱하게 웅변적으로 표현되고 압축되어 있다.
놀랍고 또한 놀라운 일이다.

어찌할 터인가?
C.E.O.의 능력과 시장과 경제에 밝다는 현정부의 전문가들은 어찌할 터인가?
동풍(同風)이 불고 있고 아메리카를 팔아 아시아를 사라는 월가의 휘파람소리가 들려오고 유라시아 관통철도 TSR과 TCR이 거의 완성되어 경의선 연결만을 기다리고 있고 조선(造船)산업이 세계 제1위인 나라에서, 삼면이 바다인 나라에서 오대양 육대주로 나아가는 해양경제시대를 열 생각은 하지 않고 딱 무지랭이 시골학자모양 별 볼일도 별 이득도 없는 대운하 토목공사로 생태계와 기후조건만 파괴·악화시키려드는 것이 과연 글로벌시대의 경제전문가로서 잘하는 짓인가?
어쩔 터인가?

일본의 모든 생활협동조합, 거의 모든 환경운동, 그리고 지난 20여년간 동남과 서남아시아 10여개국과 줄기찬 전방위 민중교역을 해온 그 연대회의가 불초 본인의 제안과 메시지, 슬로우건 등을 전원일치하에 받아들여 ‘아시아호혜시장을 위한 민중기금’부터 논의하는 아시아 및 세계호혜경제회의를 올해 11월 8일 후구오까에서 개최한다. 물론 한국의 생협도 참가한다.
그 슬로우건은 ‘호혜를 전면에, 교환을 일상으로, 재분배를 준비하며’이다.

이 역시 침뱉듯이 튕겨버릴 것인가?
또 다시 빨갱이라고 모략중상 할 것인가?
이 11월 8일 아시아 및 세계회의 기조연설 2시간을 또 물론 본인이 해야된다.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여지없이 패망하고 모든 공동체와 협동운동도 거의 해체단계다.
‘몬드라곤’, ‘기브츠’, ‘야마기시’는 이미 끝났다. 오직 개체성과 호혜에 기초한 융합원칙으로 ‘모사브’만 살아남았다.
아메리카의 장기화되어가는 스테그플레이션과 슈퍼버블은 불길하다. 회복된다해도 긴긴 현상유지의 유착, 스텔메이트시대가 오리라 한다.

악질만세 대병겁 시대 온다

그대신 여기저기서 유누스의 그라민은행이나 사회적기업들, 쏘시얼벤처, 제4물결의 소기업체, 지역통화, ‘포틀라치’ 따위가 귀신불처럼 번득거린다. 조그만 조그만 징조들이다.
무슨 징조인가?
‘신시’다
어찌할 터인가?
그 밑 저류에 동학류의 개벽사상, 수만년 고대 아시아의 신화들과 함께 거대하고 심오한 불교적 사유가 깔려있음을 어찌할 터인가?
남쪽 운주사(雲珠寺)의 입구에 있는 ‘중장터’의 전설을 아는가?
불교우주론과 고대시장부활과 당취들의 서러운 민중적 희망의 관계를 아는가?
수많은 하급승려들의 비밀조직인 당취(當取)가 이씨 조선 500년간 1670건의 반정(反政)사건 중 70퍼센트에 모두 연루된 것만큼이나 수많은 지역의 오일장(五日場)과 난전(亂纏)상인조직들의 계, 품앗이원리에 입각한 상조회(相助會)등 공생(共生)조직에 깊이 연결되었던 숨은 불교스타일의 호혜활동의 역사를 과연 아는가?
모르는가?

뉴라이트쪽에도 경제사학은 분명 있을 터인데 그것을 몰라도 되는가?
동아시아, 동북아시아는 앞으로 2~3년 안에 정치, 경제, 사회적인 대변동(大變動)에, 그리고 7~8년 또는 적어도 10년안에 생활, 생태, 건강, 물, 의료, 생명과 환경, 기후변화 등에서 대혼돈(大混沌)에 빠지게 된다. 악질만세(惡疾萬世)의 대병겁(大病劫)이 반드시 온다.
이와 함께 누누이 얘기한 바와 같이 문화와 문명 대변동기에 깊이 들어간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왔다.
대안은 ‘화엄개벽’ 뿐이다.
어찌할 터인가?

넷째,
나는 지난 2006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한국도서전 초청과 나의 독일어판 시집 번역 출판기념회 참가 목적으로 프랑크푸르트에 갔던 길에 아주 탁월한 녹색사상가 한사람과 장시간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저 유명한 위르겐·몰트만 목사와 함께 성니콜라이교회에서 ‘생명과 한(恨)과 십자가’의 관계에 대한 공개대담을 나눈 뒤, 나의 오랜 친구 안드리아스목사의 인도로 만난 것이다. 미카엘·데비스, 참으로 우수한 생태학이론가였다. 녹색당고급간부였고.
내가 유럽과 독일녹색당과 생태학에 대해 높이 칭송하자 그는 단호히 잘라 말했다.

“녹색당과 생태학 모두 다 끝났다”
“왜?”
“녹색당은 두 번에 걸친 무원칙한 연정(聯政)으로 거의 모든 생태정치 아젠다를 보수, 진보 양당에 빼앗기고 남은 것도 형편없는 개량국의 정도로 그 내용이 묽어졌으며, 생태학을 수없이 많은 유파의 끊임없는 소모적인 논쟁으로 끌고 간 결과, 녹색당은 갈 길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생태오염과 기후혼돈이 나날이 심각해지는 이 때 녹색당과 생태학마저 그렇다면 절망 아닌가?”
“우리가 지금 부르는 노래의 제목은 절망이고 우리 자리를 떠도는 담론의 이름은 허무다!”
“무엇이 원인인가?”
“영성고갈이 문제다. 녹색도 생태학도 애초부터 너무 객관적 관찰의 과학에만 매달렸다. 맑시스트들이 유물론에 갇혀 숨막혀 죽은 것과 똑같다.”
“루돌프·바로의 영향력은 어찌되었나?
그는 객관적 생태학과 간디술이나 인디언영성과의 절충을 시도하지 않았던가?”
“루돌프·바로의 영향을 받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그를 호칭하는 사람조차 없다.”
“가장 절실한 이유는 무엇인가?”
“생태학과 영성 사이의 관계가 진정한 철학적 통일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절충이나 그때그때의 적당한 배합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제 와서 큰 모순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태학과 영성 사이의 배합이나 절충은 인생의 참다운 길잡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양자 사이의 진정한 철학적 통일을 원하는 것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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