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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청심]가을은 문득 오고…

기자명 법보신문

법련사 주지 보경 스님

사람마다 한권의 경전이 있는데(我有一卷經)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不因紙墨成)
펼쳐보면 글자 하나 없지만(展開無一字)
항상 환한 빛을 놓고 있다네.(常放大光明)『화엄경』

일본 교토의 오바쿠사에는 경판이 모셔져 있는데, 이것이 일본 최초의 목각판이라 한다.
신도인 데츠겐은 목판에 불경을 새기는 불사를 하고 싶었다. 대략 7천장이 소요될 것 같았다. 그는 불사 자금을 모으기 위해 전국으로 화주를 나섰다.
어떤 이들은 많은 금화를 내놓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시일반의 동참이었다. 그렇게 십년이 지나자 대략의 자금이 모아져 일에 착수하려는 찰나에 ‘우지’강이 범람하는 일이 생겼다.(이곳은 지금도 녹차의 산지로 유명하다.) 데츠겐은 망설이지 않고 수재민들의 구제에 모은 돈을 써버린 후 다시 화주를 시작하였다.

몇 년이 흘러 돈이 어느 정도 모였을 때, 이번에는 전염병이 발생하여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그는 병자들 치료를 위해 또 돈을 전부 내놓았다. 이제 세 번째로 시주를 받으러 다녔다. 이번에는 별 문제없이 거의 이십년 만에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지금도 그 경전에 대해 이렇게 대물려가며 아이들에게 얘기한다고 한다.
“데츠겐은 경전을 세벌 만들었지. 처음 두 벌은 볼 수 없는 경전이지만 현존하는 세 번째 경전보다 훨씬 더 훌륭하단다.”

나는 출가를 비교적 일찍 했기 때문에 강당 일 년에 선방 물도 한철 먹고 나서 군대에 갔다. 3년 복무를 마치고 인사를 드렸더니 은사스님이 위의 게송을 기념으로 써주셨다. 근자에 13세기 일본의 한 선승이 기록한 옛 이야기들을 읽었는데, 데츠겐의 이야기를 본 순간 왜 그렇게 코끝이 찡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노자 『도덕경』 51장에 “도는 나옴이고 덕은 기름이고 물은 모습함이요, 세는 이룸이다.”(道生之 德畜之 物形之 勢成之)는 내용이 있다. 특히 ‘勢’라는 글자는 여러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자연 현상계를 지배하는 자연필연의 방향, 움직이는 기세’를 말한다. 감산대사(山 德淸, 1546~1623)는 이것을 ‘능핍(凌逼)’이라 풀었다. ‘힘을 가함’이다. 기운은 상생도 있고 상극도 있다. 이 ‘다그침’이 바로 천지만물의 변화를 이끄는 힘이다.

그런데 왜 ‘강약부동’(强弱不同)하는 것일까? 인간세는 높으면 뻐기고 군림하려 들어서 탈이고, 낮으면 낮은 만큼 기죽고 의기소침해져서 문제다. 그렇다고 또 끝없이 눌려 있지 만도 않다. ‘감정’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의 ‘이모션(emotion)’은 ‘움직이게 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동사 ‘에모베레(emovere)’에서 왔다.
해롭건 이롭건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정신을 움직이게 하는 충동적인 마음이다.
이 시대에 불교가 무엇으로 감동을 안겨야 할지 고민스럽다.

문득 벌레소리, 하늘도 키가 자라나 보다.

보경 스님 법련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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