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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의 여운 깊은 책읽기] 산초가 있어 세상은 살만하다

기자명 법보신문

『돈키호테』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시공사

17세기의 스페인은 반종교개혁운동과 합스부르크 절대왕조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말만 들어도 자유롭게 숨쉬기가 아주 어려운 시절임이 대번에 느껴집니다.
종교와 정치권력이 손을 잡으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꿈’입니다. 인간이 여느 생명체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아마 꿈을 꾸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신화와 전설을 무궁무진하게 낳으면서 각박한 현실을 꽃동산으로 가꾸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권력은 인간의 현실을 감시하고, 종교권력은 인간의 꿈과 미래를 조작합니다.

모험 기질이 넘쳐나는 자유롭고 낭만적인 소설가 세르반테스는 이런 세상을 버텨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감옥에 갇히자 그는 자기의 분신을 잉태합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사람이 바로 돈키호테 - 그러니까 돈키호테는 각박하기 그지없는 세상에게 꿈을 되찾아줘야 하는 인류애적인 숙제를 안고 태어난 것입니다.

편력기사에 관한 책을 너무 읽어 뺑 돌아버린 시골노인은 돈키호테라 자칭하며 꼭 자기만큼이나 늙고 초라한 말 잔등에 올라타고, 무식하지만 제법 현실 판단이 빠른 농부 산초를 시종으로 삼고서 세상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돈키호테가 얼마나 허황된 짓을 벌이고 다니는지는 굳이 이 두꺼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잘 알고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도 세상은 돈키호테의 편이 아닙니다. 그는 끝없이 사람들의 조롱을 받고 죽을 정도로 구타를 당하기 일쑤입니다. ‘미친 인간인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붙어 다니다 보면 땅 한 뼘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해서 따라나선 산초도 몰매를 맞긴 매한가지입니다.
하지만 산초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돈키호테의 편이 되어줍니다.

“주인님이 이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도 힘껏 끌어내 드리지요. 주인님의 명마 로시난테 위에 다시 올라타려고 애써보세요. 그 녀석도 기운 없고 슬픈 기색이 마법에 걸린 것 같네요. 그러고 나서 다시 한 번 모험을 찾아나서자고요. 일이 잘 안 되더라도 우리 속으로 다시 돌아올 시간은 있으니까요,”

우리에 갇혀 고향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어버린 돈키호테를 풀어주면서 하는 산초의 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임종의 순간을 맞는 돈키호테에게 이렇게 말을 건넵니다.
“주인님, 죽으면 안 돼요. 저의 조언을 들으세요. 그리고 오래 사셔야 해요. 이 세상에서 인간이 행하는 가장 큰 광기는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거예요.”(723쪽)

살벌하고 각박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자칫 아큐(阿Q)처럼 살던가, 그렇지 않으면 돈키호테처럼 살도록 내몰려집니다. 사실 돈키호테는 너무 괴짜라 그다지 닮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 사이를 서툴게 넘나들다가 돈키호테의 마지막 우군이 되어주는 산초를 보자니 어쩌면 그리도 뭉클해지던지요. 그러고 보면 산초 같은 사람이 있기에 이 세상은 살만한 것 같습니다.

이미령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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