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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칼럼] 하나가 곧 열이다

기자명 법보신문

원융무애 사상은 더불어 살기 위한 진리
남을 인정하는 배려, 어느 때보다 절실

사물을 구별함에 있어서 시간의 간격으로 어제와 오늘이라 하거나, 공간적 거리로 이쪽 저쪽이라 하거나, 행위적 동작으로 시작과 끝이라 하나, 이런 규정은 사실 그 시점을 어디에 두었느냐에 따라서는 전혀 맞지 않는 규정이 된다. 오늘의 현재가 어제라는 과거에서 보았다면 현재가 아닌 미래인 것이고, 이쪽이라는 시발점도 저쪽에서 시발점을 삼으면 이쪽이 저쪽이 된다. 시작과 끝이라는 동작도 동작의 되풀이로 연속이 지속되면 끝의 동작이 바로 시작으로 환원된다. 이래서 사물의 깨달음을 일깨우는 불교의 가르침에는 ‘두 끝(실마리)에 떨어지지 말라[不落兩邊]’한다.

사람살이의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흔히 이르는 말이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라[易地思之]’하는데 이도 불락양변과 동일한 가르침이라 하겠다. 나라는 한쪽으로만 고집하고 사물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나와 맞서있어 나의 이익을 앗아가는 존재로 보인다. 그러기 때문에 나의 처지만을 굳게 세워 놓고 모든 행위를 방어자의 자세로 실행하니, 결국에는 사사건건 트집과 다툼으로 변하게 된다. 이런 고집을 일러 ‘아집(我執)’이라 하니 이 말을 풀이하면 나만의 고집이다. 이 나만의 고집은 나 이외의 남을 인정하지 않는 결과가 되니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회생활이 원만할 리가 없다.

사람살이의 어울림이 언제나 복잡하고 다양하여 서로의 이해관계로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21세기를 달리고 있는 현재의 사회는 지나간 세기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성으로 얽혀 있다. 요사이 흔히 쓰이는 세계화라는 말은 세계가 바로 하나의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수십억 명의 인구가 하나의 마을로 인식되는 지구에 사는 우리는 지난 세기의 어떠한 시대보다도 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평화라는 인류애의 실현을 바란다면 결국은 수십억 명이 하나라는 등식이 되어야 할 것이니 미세 먼지에 불과한 나라는 고집을 해서야 되겠는가.

여기서 화엄의 원융무애의 교리로 제시되는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이 바로 지구촌의 융화책임을 알게 한다. 여기서 많다의 다(多)를 10이라는 한정수로 놓고 풀어보면 이것이 진리임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1과 10은 서로 대칭되는 수의 개념이나, 1이 바로 10의 기본수치로서 10은 10개의 1로 구성된 것이니 1이 없으면 10도 없다. 그러므로 일즉십(一卽十)이자 십즉일(十卽一)이다.

이것을 공간적 개념으로 확대하면, 일진(一塵)의 극소한 먼지의 대칭으로 시방(十方)의 극대적 공간이 형성된다. 그러나 시방의 극대적 공간이 일진의 극소 공간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으니, 이를 ‘일미진주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하게 된다.

요즈음 한 나라의 좁은 국토 공간만이 아니고 세계라는 넓은 지구 공간까지도 어수선한 느낌이다. 어느 큰 나라의 경제적 틀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온 세계의 경제가 휘청거리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그 큰 나라의 저간의 몸가짐이 어딘가 자만했던 것은 아닌가. 큰 나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가 있어 큰 나라의 위세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니, 항시 작은 나라의 배려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작은 나라의 우리는 나도 큰 나라와 대등한 하나의 국가라는 긍지와 자부를 가지고 이 어려움을 이겨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서라도 나라 안의 각 구성원은 일즉일체, 일체즉일(一卽一切一切卽一)의 화엄의 융화로 다져야 하겠다.
요즈음 나라 안에 종교적 갈등을 보이는 면도 있는 듯한데, 이것도 화엄적 대승의 폭넓음으로 너그러이 융화 수용되기를 바란다.

이종찬 동국대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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