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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의 여운깊은 책 읽기]세상의 유일한 기적

기자명 법보신문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 문학동네

헬렌 켈러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간절한 가정 아래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날에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사람들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는 그 전율어린 기적을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에는 번화가로 달려가서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할까 합니다.”(『사흘만 볼 수 있다면』 헬렌 켈러 지음, 이창식 옮김, 산해)

그녀는 정작 지상의 빛을 볼 수 있는 마지막 몇 시간은 신나는 코미디 공연이 한창인 극장으로 달려가고 싶다고 합니다. ‘불가능한 꿈’치고는 너무나 명랑합니다. 웃음소리가 왁자합니다.
암흑 속에서 살아오던 헬렌 켈러는 이 세상이 생기와 희망과 웃음으로 가득 찼으리라 짐작하면서 딱 사흘만이라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데,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이 세상은 어서 달아나야할 지옥입니다. 이를 테면 24살 꽃띠 아가씨 베로니카가 그렇습니다.
“닷새, 길어야 일주일 안으로 당신의 심장은 멈춰버릴 것이오.”

사는 게 너무 무의미해서 자살을 기도했다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살아났는데, 침상에 누워 힘겹게 눈을 뜬 베로니카에게 의사가 던진 말입니다. 다량의 수면제를 삼킨 바람에 심장이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었다지만 이건 너무 잔혹한 선고입니다. 천부적인 이야기꾼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을 읽는 내내 왜 자꾸만 헬렌 켈러의 에세이가 떠올랐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베로니카는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24년을 살아오는 동안은 매 순간마다 누구 때문에 힘들었고, 누구 때문에 괴로웠고, 누구를 위해서 살아왔고, 누구로 인해 절망했다고, 그래서 자신은 더 이상 살 가치를 찾지 못하여 목숨을 끊겠노라며 결연히 약을 삼킨 그녀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자기 앞에 닷새라는 짧은 시간이 덤처럼 던져지자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여느 때처럼 ‘누구’를 탓할 시간이 없습니다. 닷새 동안 만큼은 누구 때문이거나 누구를 위하는 것이 아닌 온전히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내야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핑계도 참 많습니다. 사는 것도 자기 아닌 누군가를 위해 산다고 큰소리치고, 누구 때문에 더는 못 살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사는 것도 실은 자기가 살고 싶어 사는 것이고, 누구 때문에 죽는다는 것도 결국은 자기 삶을 마치는 일입니다. 지금 사는 게 좀 고되고 억울하더라도 이 삶은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온전히 내 몫입니다. 세상의 유일한 기적은 내가 오늘을 무사히 마치고 내일 아침에 눈을 뜨리라는 사실입니다. 닷새를 살아내고 엿새째 아침에 눈을 뜬 베로니카가 기적을 맞이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미령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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