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창간 20주년 초청대법회]조계종립 기본선원장 지 환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하늘에 구름 지나도 흔적 없듯
진공의 참 마음은 본래가 청정

(죽비를 들어)이게 보입니까.
(죽비를 치며)이 소리가 들립니까.
지금 이렇게 보고 이렇게 듣는 이 자리는 여여한 것입니다.

임제대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금일다반용처 흠소십마(今日多般用處 欠少什)
지금 여러 가지로 작용하는 이 자리에 모자라는 것이 무엇인가?
육도신광 미증간헐(六道神光 未曾間歇)이라
안이비설신의 여섯갈래의 신령스러운 빛이 잠시도 쉰 적이 없도다.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자리가 이러한 자리입니다. 참마음자리가 바로 이러합니다.
황벽선사께서는 참 마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은 한마음일 뿐 거기에 다른 어떤 법도 없다. 이 참 마음은 본래로부터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으며, 푸르거나 누렇지도 않다. 정해진 틀이나 모양도 없으며, 있고 없음에 속하지도 않고, 새롭거나 낡음을 따질 수도 없다. 또한 길거나 짧지도 않고, 크거나 작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한계와 분량, 개념과 언어, 자취와 상대성을 뛰어넘어 바로 그 당체 그대로일 뿐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곧 어긋나 버린다. 이것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끝이 없으며 재볼 수도 없다. 이 한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니 부처와 중생이 새삼스레 다를 바가 없도다.”
또 말씀하시기를
“본래 부처인 참 마음자리에는 실로 그 어떤 것도 없다. 툭 트이고 고요하여 밝고 오묘하며 안락할 따름이다. 스스로 깊이 깨달으면 당장 그 자리이므로 원만구족하여 다시 모자람이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좀 쉽게 정리하여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참마음, 이 자리는 생긴 것도 아니고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불생불멸이다 그 말이지요. 우리가 이 육체로 볼 때 내가 태어났다가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생명의 근원인 참 마음자리는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죽으면 그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어도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태어났다고 해서 그 참 마음 자리가 새로 생긴 것도 아닙니다. 또 죽었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진공이기 때문이지요. 생명의 참 모습인 진공이 묘용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텅 비어 있으면서 거기에 한없는 공덕이 원만하게 있는 그 자리다 하는 것입니다.

참선은 번뇌가 있다고 생각해 닦는 게 아니라
번뇌 없는 자리를 명확하게 보는 것

나의 참모습인 진공의 참마음은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그 참 마음, 본연의 근본자리에서 보면 이 우주도 참마음의 힘으로 운행되고 있습니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풀이 스스로 자라고 나무가 잎이 피어 푸르게 되는 이런 것들은 우주 대생명의 힘 참 마음의 힘으로 우주 대 생명의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대 조화, 지혜, 자비, 능력을 완전하게 구족하고 있는 참마음, 우주 대생명의 힘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대 조화 속에서 이 힘이 묘하게 잘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망상들이 끼어 들면 이 조화가 깨져서 몸에는 병이 생기고 마음에는 갈등이 생겨서 괴로운 것입니다. 이 대조화의 흐름과 우리가 하나가 되면 우리는 바로 깨달음의 삶, 참다운 행복의 삶, 해탈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볼 때 나와 세계가 따로 따로 별개로 존재하고 있는 것 같지만,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마음 따로, 우주 따로인 것 같지만 실제로 깨달은 안목으로 보면 마음 따로 우주 따로가 아닙니다. 우주를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법계(法界)라고 합니다. 우주라는 말보다 법계라는 표현이 더 넓고 깊은 표현입니다. 우주 즉, 법계가 우리의 참마음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몸 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마음이 바로 우주고 법계라는 말입니다.

양자물리학에 따르면, ‘정신’이 없으면 우주는 존재할 수 없고, 정신은 그것이 인식하는 대상을 실체로 만들어냅니다. 양자물리학자들이 지난 80년 동안 이룬 대단한 공로와 발견은 인간의 마음에 측량할 수 없는 창조력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부처님을 비롯하여 카네기, 에머슨, 셰익스피어, 베이컨, 크리슈나무르티, 라즈니쉬 등 위대한 사람들이 한 말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더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과학자들이 밝혀내고 있는 것입니다.
제임스 레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유한한 몸이 자신의 전부라고 여기지만, 우리는 몸이 아니다. 현미경으로 보기만 해도 우리는 에너지장이다. 에너지에 관해 우리가 아는 내용을 보자. 양자물리학자에게 가서 ‘이 세상을 창조한 주체가 뭔가?’ 라고 물으면 양자물리학자들은 ‘에너지’라고 말한다. 그럼, 에너지란 뭔가, 에너지는 ‘창조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늘 존재했고, 이제까지 존재했던 모든 것이 곧 에너지다. 에너지는 창조되거나 파괴되지 않는다.’” 아까 말한 생멸이 없음을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과학 문명도 이 참마음에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는 묘한 내용을 과학적인 원리로 규명해서 발명한 것이지 전혀 없는 것을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현대 과학문명이 얼마나 발달돼 있습니까. 컴퓨터만 해도 시공을 초월해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발달된 과학문명도 끊임없이 더 발달해 갈 것입니다.

이것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참마음의 세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참 마음 따로 우주 따로가 아닙니다. 참마음의 세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를 우리는 부사의(不思議)한 세계라고 합니다. 참마음의 세계를 부사의 해탈경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참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참 마음이 뭐예요, 아까 죽비소리를 듣고 죽비를 보고하는 이 작용이 참 마음의 작용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고 그대로 듣지 못하고 나의 오만가지 고정관념이 포함돼서 내 식대로 보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면 참마음이 작용합니다. 다시 말해서 망상과 고정관념이 개입돼서 보더라도 참마음은 그대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육신으로 보지 말라, 나는 에너지다라고 했습니다. 참 마음은 아까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고 모든 한계를 벗어난 그런 자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진공, 텅빈 자리 이것을 진공이라고 표현합니다. 텅빈 진공. 진공은 텅 비고 아무 것도 없느냐, 진공은 텅 비었으면서 참마음의 진공은 동시에 온갖 조화와 온갖 묘용을 다 갖추고 있는 공이면서 유입니다. 무이면서 유인, 공이라는 측면에서 존재의 원리는 양변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없다는 측면에서 공이면서, 있다는 측면에서 묘유이면서 공인 것이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작용이 진공입니다.
이 참 마음자리, 진공의 참마음은 본래부터 청정이어서 번뇌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번뇌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실상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실체가 없는 구름이 하늘에 왔다 갔다 하는 모습입니다. 하늘에 구름이 왔다 갔다 한다고 하늘에 무슨 흔적이 있습니까. 흰 구름이 왔다 갔다 해도, 검은 구름이 왔다 갔다 해도 하늘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습니다. 이런 것처럼 우리의 참마음 자리는 번뇌에 아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번뇌가 공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번뇌가 있다고 생각해서 번뇌를 닦는다는 것은 참선이 아닙니다. 번뇌가 없는 자리를 보는 거예요. 그게 참선입니다. 공성인 참마음에는 번뇌가 없습니다. 번뇌는 공한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서 요약하자면 우리의 참마음, 존재의 실상은 텅빈 모습, 진공(眞空)입니다. 우리의 참마음 진공, 연기실상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져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연기실상인 텅 빈 참마음은 생겨나거나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온전한 생명의 흐름으로 지금 여기에 여여합니다. 우리의 참마음은 본래부터 청정이어서 죄도 없고, 더러워 질 수도 없는 청정한 자리입니다. 일체의 이원적 사고인 변견, 일체의 망념, 일체의 분별이 공한 상태로 절대고요, 삼매지요. 걸림 없는 대자유, 평화만이 여여합니다.

선에서는 본래성불, 본래부처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참마음이 부처라는 것입니다. 참마음은 이 순간에도 여여하므로 사실은 우리가 부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만 확인해 버리면 지혜와 자비로 한없는 능력을 발휘하며 자유자재한 해탈의 삶,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생명들이 연기적 진리생명이요, 참마음이 부처인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래부처고 참마음이 여여한 것인데, 그렇게 살지 못하고 중생으로 괴롭게 살고 있는 이유는 분별망상이고 미혹이고 착각 때문입니다. 미혹이란 말, 착각은 본래 그런 게 아니라고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혹의 꿈을 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과제이고 숙제입니다.

미혹의 꿈을 깨는 방법, 깨달음의 길이 무엇인가. 하나는 무심의 방법입니다. 무심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참마음의 내용을 믿고 이 삶 속에서 발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심이란 무엇인가. 마음 자체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심(無心)이란 마음자체가 없어 목석같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일체 분별망상심이 없는 것을 무(無)라고 하고 참마음의 신령스런 작용은 여여하다는 것을 마음(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적영지(空寂靈知)와 같은 뜻입니다. 모든 번뇌가 비어 고요한 마음, 텅빈 마음이 공적(空寂)이요 동시에 영지입니다.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드러나 신령스럽게 하는 작용이 영지(靈知)란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심을 목석같이 되어 아무작용도 없는 마음이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무심만 갖고도 불교를 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텅 비워버리고 무심이 될 수 있을까? 제일 좋은 방법은 화두의심을 간절하게 하여 화두 의심이 타성일편이 되어서 무심삼매, 은산철벽을 투과해야 이와 같은 진무심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생각을 일으키면, 분별을 하면 생멸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참 마음자리에 어긋나 버리므로 알음알이를 일으키지 말고 화두의심을 통해 분별심이 끊어지도록 하여 참마음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고 참마음이 여여한데
중생으로 사는 것은 분별망상·미혹 때문

화두는 참마음자리이기 때문에 화두의심을 하여 그 참마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그것과 하나가 되어 진무심이 된다는 말입니다. 화두의심을 통해 참마음과 하나가 되어 분별심이 사라질때 텅빈마음(眞無心)이 되고 바로 그때 그 참마음 자체의 빛, 부처님 지혜광명이 드러나고 연기의 이 법, 팔만사천 법문의 뜻이 온전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화두공부에 대한 자세한 말씀은 다음인연으로 넘기기로 하고 이만 줄이겠습니다.

화두공부와 인연이 약한 사람은 그 전 단계로 진언이나 염불을 일심으로 하여 진언삼매, 염불삼매를 통해 무념, 무심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방법은 관법(觀法)입니다. 모든 것들을 환(幻)과 같고 꿈과 같고 허공 꽃 같은 줄 관(觀)해 버림으로써 경계에 굴러가는 마음을 쉬어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의 마음상태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원각경』에서는 환(幻)인줄 알면 환을 여의게 되고 환을 여읜자리가 깨달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생각 일어 날 때마다 이것은 환이요 꿈같은 것이라고 알아차리어 관하는 것입니다.

또 반야심경에 나와 있는 오온이 공함을 관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참회하여 어두운 마음을 비우는 방법이 있고, 방하착(放下着), 즉 버리는 공부가 있습니다.

『신심명』에 나오는 것처럼 “중생의 삶 일체가 꿈같고 환상이고 허공 꽃 같음을 확실하게 믿어버리고 득실 시비 일체의 부정적인 생각, 분별을 그 순간에 일어나는 순간에 놓아버리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도 구체적으로 기법을 알아서 꾸준히 실습하면 시원한 상태를 맛 볼수 있습니다.

화두 공부 초심자는 이러한 방법들 중에서 자기 근기에 맞는 것을 실천하면서 화두 공부와 병행하든지 그 방법을 먼저하고 약간 득력을 한 후 화두 공부를 하든지 하면 화두 공부가 잘됩니다.

불자님들을 위해 바라밀행법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 허망한 고정관념, 망상을 깨어 버리고 진실한 참마음에 초점을 맞추어 참마음의 내용을 삶 속에 발현시키는 수행입니다.

첫째 밝은 마음으로 밝게 살자는 것입니다. 밝은 마음이란 참마음의 지혜광명으로 표현되는 긍정적 힘을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밝은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에 자유자재한 툭 트인 마음으로 시원시원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자비심으로 사랑하며 살자입니다. 우리의 참마음이 자비광명이기 때문에 자비심으로 사랑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자비심으로 사랑하며 살면 부처님의 위신력이 나타나고 공덕이 성취되며 행복한 삶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마음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참마음으로 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번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자입니다. 감사한 마음은 내 마음에 한없는 평화와 조화를 갖게 하고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내 앞에 현출시키는 신묘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에는 한량없는 공덕이 따르게 되고 부처님의 은혜를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보시·공양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받고자 한다면 보시공양은 필수적입니다. 보시공양으로 탐착과 이기적 응어리를 녹여 부처님 공덕세계와 하나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감사하다고 말로만 하면서 보시공양은 아까워서 못한다면 그것은 탐착, 애착, 이기적인 마음이므로 복덕의 문을 닫게 합니다. 특히 부처님 법이 널리 퍼지도록 법공양에 힘써야 합니다.

다음 다섯 번째로 찬탄하며 살자입니다. 찬탄행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한량없는 공덕을 갖추고 일체 중생을 자비로 건지시니 부처님 공덕을 찬탄하는 것입니다. 일체중생 또한 불성공덕을 갖추었으므로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찬탄하듯이 부모형제, 부부, 이웃등 일체 중생이 지닌바 공덕을 찬탄해야 합니다. 내가 분별심을 쉬고 참마음의 작용으로 대하면 사람사람이 부처님으로 보입니다. 여섯 번째는 존중하며 살자입니다. 존중하고 공경하며 예경행을 해야합니다. 예경이라는 것은 마음을 비우고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존경하고 공경하는 행입니다. 일체중생은 실로 중생이 아니라 그 본 면목은 불성이기 때문에 ‘부처님 예경은 중생예경, 중생예경은 부처님 예경’입니다. 수행의 귀결은 모든 생명을 부처님으로 보고 부처님처럼 존중하며 받드는 삶입니다.

일곱 번째는 참고 견디며 살자입니다. 살다보면  고난도 많고 힘든 일도 많습니다. 사바세계라는 말은 감인(勘忍)의 세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살아야 합니다. 인내, 인고, 인욕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주객이 사라진 텅 빈 마음으로 하는게 참된 인욕입니다.

마지막으로 우주 대 생명인 부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해 살자는 것입니다. 진인사 대천명이란 말도 이와 비슷한 뜻이 있지만, 부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하여 살자는 말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할 뿐 결과는 우주 대 생명, 부처님께 맡겨 버리면 그에 맞게 잘 되게 돼있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자기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할 뿐, 그 결과는 자기 분별의 계산으로 따지지 말고 부처님께 맡겨 버리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정리=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지환 스님은
서울고등학교 1학년 재학시절 룸비니 불교학생회 활동을 통해 불교에 입문, 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 시절 성철 스님을 만나 선 법문을 듣고 발심해 1967년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1969년 광덕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뒤 해인사, 백양사, 운문암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했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지리산 쌍계사 금당선원장을 맡았으며 현재 조계종 기본선원장을 맡고 있다.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