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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때가 아니네

기자명 법보신문

[논설위원 칼럼]윤청광 방송작가

어느덧, 2008년도 저물어 세모가 가까워진 11월이 되었다. 소매 끝을 파고드는 찬바람이 더욱 차갑고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비록 계절 탓만은 아니다.

천민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에서 발생한 ‘금융파탄’ 쓰나미가 미국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 남미 등 전 세계를 덮쳐, 전 인류를 생활고의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던 이명박의 선거공약을 믿고,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준 대한민국도 미국발 ‘금융파탄’ 앞에 속수무책이다. 주식 값은 곤두박질치고 펀드 계좌는 깡통 계좌가 되고, 경기는 꽁꽁 얼어붙어 겨울이 오기도 전에 이미 엄동설한이 되어버렸다. 공장의 기계는 언제 멈추게 될지 모르고, 회사는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르며, 과연 직장을 언제까지 다닐 수 있는지도 불투명한 그런 세상이 되었다. 돈 있는 사람들로 흥청망청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최고급 백화점도 손님보다 점원이 더 많고, 손님을 태우지 못해 늘어선 빈 택시의 행렬이 1km나 뻗어 있다.

먹느냐, 굶느냐, 사느냐, 죽느냐, 세상은 온통 생계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데, 이런 판국에 종교편향을 규탄하고, 종교편향 앞잡이를 퇴출시키고, 그동안의 종교편향 행위를 사과하라는 불교계의 요구가 먹혀 들 리가 없다.
먹느냐, 굶느냐,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인데, 지금 우리가 불교의 역사와 전통을 외치고, 종교차별을 규탄하고, 종교편향 앞잡이들을 처단하라고 외친들, 이 요구에 공감할 국민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지난여름 그 뜨거운 뙤약볕 아래 20만 불자들이 토해낸 종교편향규탄의 함성은 미국발 ‘금융파탄’의 쓰나미가 삼켜버린 탓에, 시리(時利)도 잃고, 명분도 잃어,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때도 놓치고, 명분도 놓치고, 실리(實利)도 놓치고, 공감도 놓친 상황에서 그래도 체면 때문에, 오기 때문에, 당초 큰소리 했던 대로 전국 순회 규탄법회를 계속할 것인가.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이 말은 곧 “민심이 불심(佛心)이다”라는 말과도 같다. 이대로 주저앉거나, 이대로 물러나자니 참으로 억울하고 분하고 창피스럽고 부끄럽고 처량하고 씁쓸하고 답답하지만, 그렇다고 민심이 천심이요 민심이 불심인데 그 민심을 등져가며 오기를 부릴 것인가.

우리 불가(佛家)에서는 “때 아닌 적에 먹지 말라”는 게 불문율이다. 어찌 먹는 데에만 때를 가리고 지켜야 할 것인가. 무슨 일을 하거나, 우리는 ‘때’를 가릴 줄 알아야 한다. 나서야 할 때, 나서야 하고, 해야 할 때 해야 하며, 나아갈 때 나아가야 하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좌절이 아니요, 실패가 아니요, 패배가 아니며 훗날의 전진을 위한 지혜로운 선택일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이 시점에서 겸허한 자세로 버릴 것은 버리고, 털어낼 것은 털어내고, 이 무시무시한 생계위협의 공포 속에서 불안과 초조 속에 떨고 있는 이 땅의 중생들에게 과연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불교다운 위로와 해답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끝없는 욕망을 향해 브레이크 터진 자동차처럼 미친 듯 달려가던 저 천민자본주의와 서양종교의 가르침이 바로 ‘금융파탄’의 재앙으로 나타난 오늘, 소욕지족(少慾知足)과 자리이타(自利利他), 나눔과 베풂과 근검 절약과 인욕과 근면 정진의 실천을 다짐하는 불교의 가르침이야말로 바로 오늘 이 ‘금융파탄’의 위기에 필요한 처방이 아니겠는가.

『삼국지』를 읽은 분은 누구나 알겠지만 적벽대전에서 세가 불리함에도 크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동남풍이 불기를 기다린’ 지혜 덕분이었다. 때를 기다려 때에 맞는 공격을 감행한 덕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명박 정부의 종교차별이 아무리 미워도 불교가 길거리로 나설 ‘때가 아니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윤청광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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