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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청심]지혜의 불씨

기자명 법보신문

거금도 금천선원장 일선 스님

숲에는 스산한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빈 가지들 사이 고욤나무에는 붉은 감 하나마다 부처님, 온통 진실을 드러내며 거룩한 만다라를 펼치고 있다.

항구에는 정박해 놓은 크고 작은 배들이 물결을 따라서 오르고 내리면서 부딪혀 내는 소리가 마치 오케스트라를 듣는 듯 황홀하기만 하다. 뜰 앞에는 국화가 지고 있는데 한 줄기 차가운 서풍은 웬일로 처마 끝 풍경을 자꾸만 흔들어대고 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스쳐가는 모든 인연들은 성품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지나간다.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 가지 일에 허물이 없다”고 했는지 모른다.

온 종일 하는 일은 범부와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 때론 바쁘고 힘들 때도 있지만 본분사를 드러내는 일이어서 한 치의 오차를 허락하지 않는다. 아직 남아있는 업력을 따라가지 않고 녹이는 일이지만 예전같이 크게 힘쓸 일은 아니어서 수월하지만 조금도 방심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고인들의 지나온 행로가 이와같이 철저했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사람은 온 종일 이일을 밝히고 드러내고 쓸 뿐 달리 하는 일이 없다. 때론 불전에 나아가 예불하고 불공하며 축원하지만 모든 인연들이 이와같이 함께 기쁨을 얻어 행복해지기를 발원한다.

오직 성품을 밝혔느냐에 있을 뿐 달리 어떤 허세나 수행의 거품을 허락하지 않는다. 눈앞의 경계나 한 생각에 미했을지라도 뒷생각을 바로 돌이키면 의젓한 부처이기 때문이다. 본래 가지고 있어서 조금도 부족하지 않으며 뭐라 이름 지을 수 없어 부처라 하고 마음이라 하며 때론 가지가지 이름이 생겨나지만 일체 상이 상이 아닌 줄 깨달으면 아무런 흔적도 없어 참 생명이 이렇게 그윽하니 만 가지 일에 아무런 허물이 없다. 오늘도 이러하고 내일도 이러해서 특별한 일이 없어 진실하게 살아갈 뿐이다.

세상이 어려운 것은 그 동안 탐욕스럽게 살아온 공업의 결과이니 기꺼이 받아들이고 함께 고통을 나누어 이겨내야 하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모든 것을 자기 일로 받아들이고 나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오직 살아있다는 감사와 더불어 이웃들을 생각하는 자비심의 발원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눈앞에는 삶의 희망이 뚜렷하게 되고 마치 꺼진 불씨가 되살아나는 것 같다. 다만 여기에 자꾸 풀무질을 멈추지 않으면 어느덧 한 무더기 불덩어리가 되어 마침내는 온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남음이 있음을 알게 된다. 자기야말로 참으로 보배다. 자기 안에 부처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치 앞을 볼 수 없어 차디찬 어둠속이지만 포기하지 말고 그 속에서 지혜의 불씨를 찾아야 한다. 손을 이리저리 뒤적이는 순간마다 바로 광명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백장스님은 위산 영우스님에게 화로에서 불씨를 찾아낼 것을 요구 하였다. 제자는 찾아도 없다고 하였다. 이에 스승은 직접 화로를 뒤적이며 작은 불씨 하나를 찾아서 보여주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다그치니 곧 깨달았다. 불씨는 그저 불씨가 아니었던 것이다. 춥다고 움츠리지 말고 손을 호호 불어보고 두발을 동동 굴려보자 움직이는 곳마다 불씨가 살아날 것이다.

자기를 너무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자기 내면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무명의 어둠 속에서 한 톨의 불씨를 찾아내야 한다. 이 작은 불씨가 결국에는 자기를 밝히고 세상을 밝히는 지혜의 불씨이며 시절인연을 만나면 부처를 이루기 때문이다.

한 무리 철새가 한일자를 그으며 뱃머리를 지나간다.

거금도 금천선원장 일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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