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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서 달을 보다]전 조계종 교육원장 여천 무비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내가 곧 부처임을 자각하라

삼일 닦은 마음 천년보배 일구에 마음 동요해 출가
50년 정진 속 대강백 우뚝 카페 ‘염화실’로 人佛사상 펴

여래가 걸림 없는 청정한 지혜의 눈으로 온 법계의 모든 사람들을 두루 살피시고 말씀 하셨다.

“신기하고 신기하도다. 모든 사람들(衆生)이 여래의 지혜를 다 갖추고 있구나. 다만 어리석고 미혹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구나.(奇裁奇裁 此諸衆生 云何具有如來智慧 愚癡迷惑 不知不見)”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나오는 이 일구는 ‘일체중생이 다 부처’라는 뜻이다. 전 조계종 교육원장 무비 스님 역시 여기에 입각, 인터넷 전법도량 ‘염화실’을 통해 ‘사람이 곧 부처(人卽是佛)’라는 ‘인불’사상을 펼쳐 보이고 있다. 그간의 ‘참 나’찾기 등과는 또 다른 맛과 힘이 느껴진다.

어렸을 당시 한 동자승과의 만남에서 전해들은 ‘삼일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년 탐낸 재물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라.(三日修心千載寶 百年貪物一朝盡)’는 말이 가슴에 닿아 출가를 결심했던 스님은 1958년 부산 범어사에서 여환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전강, 효봉, 성철 등의 문하에서 수행하며 선의 진면목을 맛보는가 하면 관응, 탄허, 운허 등 당대 선지식으로부터 경전의 심오한 세계를 하나씩 터득해 갔다. 한 절, 한 스승에만 머물지 않고 선재동자처럼 훌륭한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공부한 강사라는 ‘통방학인 남행강사(通方學人 南行講師)’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무비 스님은 1976년 처음 통도사 강주로 초빙 받았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탄허 스님은 자신의 강맥을 이었다는 의미로 ‘살수(撒手)’라는 법호를 내렸다. ‘살수’란 ‘손을 뻗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게 귀한 것이 아니니, 절벽에서 손을 놓아 버려야 대장부(得手攀枝未爲貴 懸崖撒手丈夫兒)’라는 글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무비 스님은 ‘살수’라는 어감이 날카롭고 드세 ‘여천(如天)’으로 바꿨다. 법호는 여천(如天)이요 법명은 무비(無比)다. 현재 범어사 염화실에 주석하고 있다.

2003년 7월 척추 염증을 치료하기 위해 수술을 받던 중 신경계 일부가 손상되면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스님이다. 지금도 하반신이 그리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정진의 정진을 거듭하며 『임제록 강설』, 『화엄경 완역』(10권), 『법화경』(상하), 『금강경 오가해』 등의 역저를 내놓고 있다.

‘사람이 곧 부처’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연유가 무엇보다 궁금했다.
“일체중생이 다 부처인데 무명에 가려져 있을 뿐이라는 말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부처가 따로 있다 생각합니다. 점잖고, 자비심 많으며 그윽한 미소를 가져야만 부처라고 생각합니다.”

무비 스님은 일체중생이 다 불성을 갖고 있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불성, 성품, 진여 등에 관한 개념은 어떻게 가름하고 있을까?

“경전에도, 전하고 해석하는 사람의 사상이 일부 배어 있습니다. 어록은 경전에 비해 좀 더 자유분방한 자신의 소리가 담겨 있지요. 경전이나 어록을 통해 나오는 진여, 불성, 자성, 성품 등의 이러한 개념은 모두 같은 말이라 보아도 무리가 없습니다. 하나의 법을 백 가지, 천 가지 이름으로 한다 해서 그 법이 다른 게 아니거든요. 분명한 것은 그러한 개념도 자신을 떠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당신이 곧 부처라는 출발점에서 시작해야 그러한 개념도 이해할 수 있어요.”

무비 스님은 『법화경』 방편품에 나오는 구절을 일례로 들었다. ‘아이들 장난으로 풀이나 나무, 붓, 혹은 꼬챙이로 부처님 모양 그린 이들도 공덕을 점점 쌓아 큰 자비심 갖춰 모두 성불하였다.(乃至童子戱 若草木及筆 或以持爪甲 而畵作佛像, 如是諸人等 漸漸積功德 具足大悲心 皆已成佛道)’

“이 뿐만이 아닙니다. 산란한 마음에서도 꽃 한송이 일심으로 부처님께 공양하면 성불한다 했어요. 삼아승지겁을 닦고 닦아야만 부처가 된다고 생각하면 요원한 일입니다.”

첫 걸음을 잘하라는 설명이다.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 이전에 내가 부처라는 생각을 먼저 해 보라는 말이다. 무비 스님은 무아(無我)와 일물(一物)의 경계도 혼돈하지 말고 잘 살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선어록에 유독 많이 나오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유일물(有一物) 즉 ‘한 물건이 있다’이다. 내가 없다 해서 나 자신을 제거하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어디 갖다 버리는 것쯤으로 아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당체즉공(當切卽空). 즉, 이렇게 말하고 듣고 보고 하는 이 자리에서 그대로 없는 것으로 보아 당체 그대로가 공인줄 알라는 것이다. 청허휴정 선사만 해도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본래부터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생긴 것도 아니요 일찍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 이름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고 했다.

“이 자리에도 한 물건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듣는 한 물건이 분명 있다 이겁니다. 누군가 ‘무비’하고 부르면 ‘예’하고 대답하는 한 물건이 있는데 피곤하면 잠을 잘 줄도 압니다. 지금 이렇게 마주하고 앉아 있는 이 자체도 불가사의 한 일입니다. 무아이고 윤회지만 당체즉공 하는 이 일물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무조건 무아라 하니 일물조차 필요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긋나도 한 참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가 수행을 통해 얻으려 하는 ‘깨달음’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무비 스님은 큰 도를 이뤄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법이고, 만 가지 행을 해도 도에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 되려는 것도 좋지만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될 수는 없기에 ‘사량분별’만이라도 제대로 해 삶을 영위하자는 제안을 내놓고 있다. 사량분별이든, 깨달음이든 그것을 관통하는 것은 역시 연기와 중도, 그리고 공(空)이다.

“양쪽에 산을 두고 흐르는 강물이 있어요. 배는 물을 따라 가야 하구에 닿을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쪽 산이 좋다고 끌려 다니면 배는 제 갈 길을 갈 수 없지요. 중도란 뱃길을 따라 유유자적하게 흘러가는 배와 같습니다. 뱃길 양쪽으로 두 산이 분명 있지만 그게 길이 아님을 알아야 하며 그 산이 없는 줄도 알아야 합니다.”

무비 스님은 중도와 공을 이해하는 데 있어 ‘양면성’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선이다 악이다 하는 이분법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있음과 없음에 걸리지 않고 부정과 긍정을 동시에 갖고 있는 안목을 가지면 중도적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쌍차쌍조(雙遮雙照) 차조동시(遮照同時)의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면 누구나 다 부처라는 말이다.

꽃 한송이 올려도 부처 삼아승지겁 성불은 요원
연기-중도 이치 알면 사량분별 삶도 멋진 일

“영명연수 선사가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에서 말했지요. 물에 비친 달그림자의 도량을 건립하고 본성이 텅 빈 세상을 장엄하라.(建立水月道場 莊嚴性空世界) 이 범어사도 분명 실제로 있는 도량이지만 물에 비친 그림자로 알아야 해요.”

영명연수는 ‘그림자와 같은 법회에 예배하고 동참해 도량을 거닐되 발은 늘 허공을 밟아라.(禮拜影現法會 行道足虛空)’ 고 했다. 이 뿐인가. 환화와 같은 공양을 장만해 그림자 같은 여래에게 공양을 올려라(羅列幻化供具 供養影響如來)고도 했다. 무비 스님의 중도관은 계속 이어졌다.

“법에 있어서도 설할 게 없지만 열심히 설하고 부지런히 전해야 합니다. 다만 설하되 설할 것이 없음을 알고 해야 합니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구도 그림자요 메아리일 뿐이지만 정성을 다해 공양해야 합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그림자인줄은 알아야 하지요. 공양을 받는 여래도 그림자이니 그런 여래에게 환화(幻化)인 공양을 올리는 바 없이 올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율배반의 논리가 아닙니다. 중도 그 자체입니다.”

무비 스님의 인불사상(人佛思想)은 이제 뚜렷하게 드러났다. 『화엄경』에서도 ‘마음과 부처, 중생은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고 했다. 무비 스님은 사람과 부처가 평등하기에 사람이 부처님이요, 중생이 또한 부처님이며, 부처님이 중생이고, 부처님이 또한 사람이며,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이란 것도 마음이니 마음이란 것도 사람이다. 한마디로 ‘사람이 부처’라는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자신이 부처인 줄 알고, 연기중도를 통한 공을 터득해 가며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살자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타인도 부처이니 받들어야 한다는 지론을 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현재 우리가 느끼는 삶에 출발하고 존재합니다. 자유, 평화, 행복도 사람의 삶 그 자체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겨보자는 겁니다.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길 때 내가 행복하고 당신이 행복합니다.”

따라서 무비 스님은 어떤 수행법이 좋은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한다. 수행법 이전에 자신이 어떠한 공부를 통해 어느 정도의 인식을 하고 있는지가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수행도 방편이기 때문이다.

“지공 선사의 『대승찬(大乘讚)』에서 ‘큰 도는 수행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 아닌데, 수행을 말하는 것은 범부를 위한 방편’ 이라 했습니다. 사실 깨달은 분들은 모두 하나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 했던 것은 연기와 중도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불교의 궁극적 가르침이란 현재 우리의 모습에서 완전함을 깨닫자는 것이고 또한 그 완전함을 발견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내세종교가 아니지요. 사실 이 도리에 입각해 상대방의 근기를 구분하지 않고 말한다면 지공 선사의 말 그대로가 맞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진실을 말해 주어도 알지 못하니 참선, 기도, 간경, 염불, 육바라밀 등의 방편을 써 보는 거지요. 삼아승지겁을 닦아야만 하고, 팔만위의와 삼천수행을 갖춰야만 한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한다면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지요. 이생에 이 정도 하고 내생에 또 하자? 내생에 사람으로 태어날 자신은 있습니까?”

수행도 방편일 뿐임을 강조한 스님은 이어 선사로서 갖춰야 할 8가지 선기를 꼽았다. 간소(簡素), 자연(自然), 탈속(脫俗), 유현(幽玄), 고고(枯高), 정적(靜寂), 변화(變化), 부동(不動)이다. 간소함과 탈속, 정적, 부동은 쉽게 납득이 갔지만 무비 스님이 말하는 자연과, 유현고고, 그리고 변화는 무엇을 말하는지 궁금했다.

“실컷 놀다가 누가 온다고 하면 좌복 펴고 앉아 경전 보고, 참선 흉내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을 의식해 조작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곤란합니다.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사람이 무엇이 아쉬워서 잘 보이려 합니까? 저절로 그러함의 삶! 참으로 멋진 삶입니다. 유현과 고고는 위엄입니다. 이 몸이 다 망가지고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오직 진실 하나만 남는다 했습니다. 세속 관점에서 아무리 크고 중요한 보물이라 해도 수행인에게는 한낱 지푸라기일 뿐이라는 당차고도 흐트러짐 없는 위엄이 배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수좌도 항상 변화해야 합니다. 딱 막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조금 아는 것 하나 갖고 다 아는 체 하며 남의 말은 일체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은 오만일 뿐입니다. 스스로 공부하며 변화를 모색해야지요. 그래야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갖습니다.”

무비 스님의 ‘인불’사상처럼 우리 모두는 부처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 조선시대의 청매(靑梅) 선사가 말했다.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보지 않으면 경전을 읽어도 이익이 없다.(心佛返照 看經無益)”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사족 - 수행은 발편일 뿐이다?

무비 스님이 말하는 수행방편설은 결코 수행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수행법 찾기에만 몰두하지 말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치부터 헤아려 보라는 역설이다.
혹여, 방편에만 눈을 돌리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근본 도리에는 접근조차 못하는 과오를 결코 범하지 말라는 뜻이다.


무비 스님은
부산 범어사에서 여환 스님을 은사로 출가, 해인사 강원을 졸업했다. 이후 해인사, 통도사 등에서 안거를 한 스님은 탄허 스님의 강맥을 이었으며 통도사, 범어사 강주, 조계종 승가대학원장, 조계종 교육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범어사 승가대학장으로 염화실에 주석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역저서로는 『금강경오가해』, 『법화경』, 『화엄경』, 『임제록 강설』, 『무비 스님이 가려뽑은 명구 100선』 시리즈 등이 있으며 인터넷 카페 ‘염화실’을 통해 불법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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