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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겐 역경이 佛恩 갚는 길이었죠”

기자명 법보신문
  • 교계
  • 입력 2008.12.20 12:45
  • 댓글 0

동국역경원장 월운 스님 이임법회 현장
역경불사 도와 준 5000여 불자들께 감사
“팔십 노인 꺾는 개혁 잘 되겠나” 비판도

“오늘 봉선사에서 나오면서 역경원을 만드셨던 우리(운허) 스님 영정 앞에 절을 하고 역경원 소임을 그만두게 됐다고 고하고 나왔습니다. 15년간 맡았던 역경원장에서 물러나는 과정이 갑작스럽고 깔끔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더라도 역경원에 대한 불자들의 관심과 지원이 끊이질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2월 19일 오후 2시 동국대 정각원에서는 평생 역경의 길을 걸어온 팔순의 노스님이 200여 대중들 앞에서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연말이면 으레 있었던 역경 후원회 송년법회가 역경원장 스님의 이임식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지난 12월 8일 동국대가 역경원장 월운 스님에 대한 일방적인 해임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이날 정각원에는 그동안 원장 스님을 도와 역경불사에 참여했던 역경원 직원들과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줬던 불자들, 그리고 역경원장으로서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기 위해 은사 월운 스님을 모시고 정각원을 찾은 봉선사 주지 인묵 스님과 봉선사 스님들 20여 명을 비롯해 법당 안은 200여 명의 대중들로 빼곡히 들어찼다. 그러나 정작 대학을 책임지고 있는 이사나 총장 등 학교 행정 관계자들은 법회가 끝날 때까지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역경원 한 직원은 지난 15년간 월운 스님이 혼신의 열정을 쏟아 부었던 노력들을 소개했다. 지난 1993년 11월 제4대 역경원장으로 취임한 뒤 다음해인 1994년 정부로부터 매년 3억5000만원씩 6년간 지원을 이끌어냄으로써 2001년 마침내 한문의 틀에 갇혀 있던 고려대장경을 한글대장경 318권으로 새롭게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했다. 또 한글대장경이 완역된 뒤에도 잘못된 내용을 잡기 위해 정부부서로부터 다시 매년 4억씩 9년간의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도 스님의 각별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털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지난 1995년 7월 강남 봉은사에서 역경원 후원회를 발족해 불자들의 후원을 이끌어냄으로써 첫해 4600만 원이였던 후원금이 조금씩 늘어 지난 몇 년 전부터는 매년 2억원 가까이 됐고 그렇게 지금까지 모금된 후원금이 모두 22억이 넘는다고 했다. 수많은 법회에 나가 법문 한 뒤 직접 전단지를 나눠주며 역경사업에 동참하라고 권유했던 역경원장 스님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특히 스님은 그동안 선문염송을 비롯해 전등록, 능엄경, 원각경, 석가여래행적송 등 수많은 경전들을 번역했고 지금 80의 연세에도 밤잠을 설쳐가며 역경에 매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큰스님을 떠나보내게 돼 비통하기 이를 데 없다며 그 직원은 끝내 눈물을 떨구었다.

이어 ‘역경보살’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평생 경전번역의 삶을 살아왔던 월운 스님이 마지막 역경원장 자격으로서 대중 앞에 섰다. 이미 학교 측의 해임 결정에 따라 비록 공식적인 역경원장은 아니었지만 이날 법회에 참여한 대중들에게 스님은 여전히 역경원장이었다. 스님은 이날 끝내 법상에 오르기를 거절했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소감을 얘기하는 자리니까 서서 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탓에 청법가도 없었고 입정도 없었다.

스님은 “원래 오늘이 삼장법회 날인데 상황이 급변해 고별의 말씀을 드리게 됐지만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다”며 도연명(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대한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옛날 중국의 도연명이라는 분이 저처럼 시골 선비인데 당시 마을에 불한당 같은 청년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 어른이 그가 잘못할 때마다 즉석에서도 혼내고 불러서도 혼냈더니 그 늙은이 자기나 잘하지 남 일에 간섭하느냐며 벼르더란 거예요. 그 때도 요즘처럼 엉덩이 뿔난 녀석이 있었던 게지요. 그런데 나중에 도연명이 조그만 관직을 맡게 됐는데 때마침 그 녀석이 높은 관직을 사서 도연명에게 공문을 내려 보냈어요. 특별감사를 할 테니까 대기하고 있으라고. 이 때 도연명이 ‘나는 쌀 몇 말을 위해 소인(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개탄한 뒤 사직서를 올려놓고 떠나가며 쓴 글이 바로 귀거래사입니다.”

스님은 도연명과 자신의 처지가 같지는 않지만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雲無心以出岫), 날기에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鳥倦飛而知還)’는 귀거래사의 구절이 요즘처럼 크게 와 닿을 때가 없었다며 이제 물러나게 되니 도연명의 심정과 함께 그 분이 느꼈을 홀가분함도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스님은 어려서 부모님 덕에 한학을 배울 수 있었고 은사인 운허 스님을 만나면서부터 경전 번역하는 일을 부처님 은혜 갚는 일로 알고 평생을 살아왔다고 했다. 특히 90년대 초 역경원장이 공석이었고 그로 인해 정부의 역경사업 지원 약속이 물거품이 될 상황에서 동국대 이사회 스님들의 간곡한 권유로 역경원장에 취임하게 됐던 당시 배경을 담담하게 술회했다. 또 역경원을 종단에서 운영해야 함에도 직원들 월급주고 사무실 내주는 동국대가 너무 고마워 단돈 1만원이라도 보태야겠다는 심정으로 역경 후원회를 만들고 불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려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지난 이야기들도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동안 도와주신 분들을 떠올리며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이번 학교당국의 처사에 대한 씁쓸함과 서운함을 끝내 감추지 못했다.
“개도 십년이 넘으면 그 집일을 다 압니다. 집에 불이 날 것도 재앙이 들어올 것도 다 압니다. 하물며 어찌 나라고 모르겠어요. 역경원과 무슨 원, 무슨 원 묶어서 하나로 뭘 만든데요. 다음 (역경원장을 할) 사람까지 다 임명해놓고…. 사정 얘기하면 다 이해할 텐데, 내가 무슨 욕심을 낼 거라고…. 과정이 깔끔치 않습니다. 팔십 먹은 늙은이를 꺾어버리고 개혁을 하면 많이 몰려올 거라고 생각합니까.”

스님은 그러나 “15년 동안 5000여 명의 많은 불자님들이 역경불사를 위해 20억을 넘게 보탰다고 하니 참으로 감사하고 그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서라도, 또 그 분들께 부처님의 복이 내려갈 수 있도록 조용히 정리하고 물러나려 한다”며 “부처님의 말씀을 오늘날의 언어로 옮기는 역경불사가 참으로 중요한 만큼 역경원에 대한 불자들의 관심과 지원이 계속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는 말로 역경원장으로서의 마지막 변을 마무리했다.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치는 불자들이 잇따랐다. 후원회 간부를 맡고 있는 한 거사는 “갑자기 이임법회를 해야 하는 상황이 어처구니없을 뿐”이라며 “스님을 찾아뵙고 여생을 동국역경원에 바쳐달라고 당부는 못할망정 이렇게 푸대접을 하다니 눈물이 난다”며 안타까워했다. 정각원장 종호 스님도 “원장 스님이 떠나게 되는 것을 어제 정각원에 걸린 현수막을 보면서 처음 알았다”며 “역경이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이고 귀가 먼 사람의 귀를 틔게 하는 일인 만큼 큰스님이 하신 크나 큰 역경불사는 후학들이 공부하는데 있어 두고두고 나침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찬탄했다. 봉선사 주지 인묵 스님도 “큰스님께서 후학들을 지도하면서도 틈만나면 경전을 펼쳐들고 번역하시는 것이 늘 봐오던 일상이었다”며 “그동안 하신 역경불사는 불교계는 물론 국가차원에서도 뜻 깊은 일로 기록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월운 스님은 이날 법회에 참석한 불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정각원 앞에서 기념촬영을 마친 뒤 오랜 세월 몸과 마음을 담았던 동국대를 뒤로한 채 스님의 ‘고향’인 남양주 봉선사를 향해 쓸쓸히 떠나갔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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