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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의 여운 깊은 책 읽기]상원사 선방의 겨울풍경

기자명 법보신문

『지허 스님의 선방일기』지허 스님 / 여시아문

“초겨울의 짧은 해는 서산에 비켜섰다. 큰방 앞에서 객이 왔음을 알리자 지객 스님이 친절히 객실로 안내한다. 객실은 따뜻하고 감자밥은 꿀맛이다. 무척이나 시장했던 탓이리라. 진부 버스정류소에서부터 줄곧 걸었으니 피곤이 온몸에 눅진눅진하다.”

『선방일기』는 산사에서 첫날밤을 맞게 되는 선객의 노곤함을 간결하기 그지없는 문체로 시작합니다. 이맘때면 항상 이 책을 펼칩니다. 그건 아마 거두절미하고 들입다 시작하는 산사 첫날 풍경의 저돌적인 매력 때문일 것입니다.

세속에서는 온갖 잡무를 마무리하고 일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들과 술잔을 나누느라 연신 분주하고 술렁이고 흥청댈 텐데 그 인연을 다 털어버리고 헐헐한 기분으로 바랑 하나 메고 산사로 찾아든 선객의 심정을 짐작해봅니다.

하지만 동안거 석 달을 지내려면 탈속의 기분에만 젖어있을 수 없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때로는 길게 통성명도 해야 하며, 장작도 패고 김장도 담급니다. 예전에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일을 하였는지는 따지지 않고 묻지도 않습니다. 그저 지금 저 사람은 나와 똑같이 도대체 재물이나 권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주제를 종일 붙잡고 석 달을 그렇게 오두마니 앉기로 결심한 사람이라는 동질감 하나면 그만입니다.

철학을 전공한 스님답게 길고 긴 겨울 석 달의 일기는 진지하고 무겁습니다. 하지만 자신도 그런 무게가 버거운지 스님은 종종 아이들보다 더 가뿐하고 천진난만한 선객들의 공모(共謀)와 힘겨루기를 들려줍니다. 은산철벽이라도 뚫을 기세로 화두에 몰입하면서도 저들은 밤마다 감자 서리하면서 낄낄거립니다. 사는 게 다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 곳만 보고 한 길만 걸어가는 외곬수의 인생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다가 넘어지면 그 김에 쉬었다 가는 것이 재가나 출가의 공통 모습인 것 같습니다.

뒷방 조실스님의 법문이 길어질수록 동안거도 깊어지고, 겨울이 깊어질수록 몸과 마음의 병이 깊어지는 선객은 끝내 바랑을 쌉니다. 잡을 수도 없고 잡아서도 안 되고 값싼 동정은 오히려 해가 될 뿐인지라 남은 사람들은 애써 무심합니다. 동안거 석 달 동안의 상원사에서는 인정(人情)이 그렇게 싸락눈처럼 흩날립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다. 그러나 이자정회(離者定會)를 기약한 이별이기도 하다. 선객은 어느 선방에서든지 또 만나게 된다. 선객으로 있는 한. 나도 바랑을 걸머졌다. 황금색 낙엽길을 밟고 올라왔었는데 은색의 눈길을 밟으며 내려가고 있다... 갈 길이 무척이나 바빠서일까. 반가이 맞이해 줄 사람도 곳도 없는데 대부분의 스님들이 걸음발을 빨리하여 우리를 앞질러 갔다....

우리는 월정사 층층계 밑에서 헤어졌다.
“성불하십시오.”
“성불하십시오.”
남방행인 그 스님은 월정사로 들어갔고 나는 월정사를 뒤로 한 채 강릉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
이미령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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