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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서 달을 보다]전 동국역경원장 월운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역경은 부처를 닮아가려는 불자들의 지표

64년 종단 3대 사업으로 출발
40여년 만에 한글대장경 완간

남양주 봉선사의 겨울이 유난히 차갑다. 봉선사 조실 월운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별채 앞마당에는 찬바람만 가득하다. 조실당에 걸려 있는 ‘다경실(茶經室)’, ‘능엄대도량(楞嚴大道場)’ 두 개의 현판도 유달리 외로워 보인다.

동국대, 역경원, 월운 스님. 이 셋은 셋이 아닌 하나였다. 불자라면 그 누구도 동국대를 떠난 역경원도, 역경원을 떠난 월운 스님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이 순간은 아니다. 동국대는 역경원장 월운 스님을 일방적으로 해임했고, 역경원 조차 단일 원이 아닌 ‘불교학술원’과 통합할 태세다. 불자들로부터 ‘역경보살’이라는 칭송까지 들었던 월운 스님의 심기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기에 충분하다.

방문을 열자 300여권의 한글대장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월운 스님은 ‘난 지금 천강에 비친 달이 아닐텐데…’라 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벽 한 면을 가득채운 한글대장경을 어루만지며 의미 깊은 한마디를 건넨다.

“이 대장경도 한 번 더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데…”
고려 때인 1236년 시작해 1251년 완성된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주지하다시피 국보 32호이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그러나 그 대장경은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이 방에 진열돼 있는 부처님 말씀은 그 한문대장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한글대장경이다. 1964년 역경원 개원식과 함께 번역불사가 시작돼 2001년 완간됐다.

이것은 원력이며 신심 그 자체다. 고려시대의 불심과 현 시대의 불심이 하나 되어 탄생한 대장경이며, 한국문화의 꽃이요, 불교의 정수다. 이 꽃을 만개하게 한 장본인이 바로 ‘역경보살’ 월운 스님이다.

고려-현재 불심의 소통 위해
후원회 조직해 24억 원 모연

월운 스님의 말씀에 따라 잠시 과거 ‘역경’의 시간으로 거슬러 가보자.
현 조계종과 태고종의 분규가 갈무리 된 직후인 1962년 지금의 대한불교 조계종이 출범했다. 당시 조계종은 도제양성, 포교, 역경을 3대 사업으로 선포했으며 그 선언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도제양성과 포교와는 달리 역경은 어려웠지요. ‘팔만대장경 보고 싶으니 제발 좀 한글로 번역해 달라’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수요자도 없는데 공급자가 ‘이건 꼭 필요한 거야’라며 나선 겁니다. 그러니 당장 역경 할 장소도, 인재를 양성할 곳도 마땅히 없었던 겁니다.”

역경불사 선포 3년째인 1965년 우여곡절 끝에 당시 초대종정인 효봉 스님과 김법린 동국대 총장, 그리고 운허 스님의 합의에 따라 동국대학교 부설로 역경원이 설치됐다. 조계종 중점 사업인 역경불사를 하는데 있어 역경원이 동국대 부설 기관으로 설치된 데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역경불사의 원만한 회향을 위한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지요. 당시 종단 상황은 안정된 형국이 아니었으니 종단 대소사에 흔들리지 않도록 방편을 썼던 겁니다.”

이후 초대 역경원장인 운허 스님(1964~1979년), 2대 원장 영암 스님(1979~1987년), 3대 원장 자운 스님(1987~1992년)이 역경에 매진했다. 특히 월운 스님의 은사인 운허 스님과 석주 스님의 원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1980년까지 80권을 출간했는데 완간 출간된 대장경이 318권인 점을 감안하면 경이로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석주 스님이 대장경 유통을 맡아주셨는데 그 일이 정말 고된 일이었습니다. 번역 보다 더 힘든 일이었지요. 흔히 우리가 말하는 개발도상국 시절 아니었습니까? 각자 자기 살기도 어려울 시국에 대장경을 보급하고 재원을 마련하려 했으니 그 고충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어요.”

평소 “다시 태어나도 역경을 할 것”이라는 원력을 밝힌바 있는 운허 스님처럼, 석주 스님 역시 입적 전 동국역경원 개원 40주년 기념법회에서 역경불사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지원을 당부한 바 있다.

“어둠 속에 보물이 있다 해도 등불이 없으면 알아볼 수 없다. 부처님 말씀을 전해주는 이가 없으면 아무리 지혜로워도 알아볼 수 없다.”

운허 스님의 역경 원력을 고스란히 이어 받은 월운 스님은 1993년 말 제4대 동국역경원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1994년부터 정부로부터 매년 3억5000만원씩 6년간 지원을 받아 내 2001년 한글대장경 318권을 새롭게 탄생시켰다. 이후에도 완역된 한글대장경의 수정을 위해 다시 매년 4억씩 8년간의 지원을 얻어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역경후원회를 조직해 불자들의 성원도 이끌어낸 결과 지금까지 모은 후원금만도 24억 원에 이른다.

운허 스님 등의 선각자가 ‘역경’이라는 씨앗을 심어 묘목으로 성장시켰다면 월운 스님은 그 묘목을 거목으로 길러낸 인물이다. 그 나뭇가지에 달려 있는 318권이라는 대장경 열매는 현대인은 물론 후학들에게도 부처님의 감로즙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실을 맺기까지의 15년 여정은 외롭고 고난 했다.

정부 지원금에만 의존하지 않았던 스님은 재원 확보를 위해 운허 스님과 석주 스님이 그러했듯이 전국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사찰이나 단체로부터 법문을 요청 받아 간 자리에서도 ‘1천원 보시’를 강조했던 스님이다. 주위 지인들로부터도 “역경 안 해도 도인 한명 나오면 만사형통인데 왜 그 고생을 하느냐?”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한 때는 핀잔만 듣는 내가 누구인가 자문해 보기도 했습니다. 혹, 명분 없는 일에 공연히 나서 고생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허탈함도 있었지요. 그러나 선인들이 종단 사업지표로 삼고 이 일을 시작하신 뜻을 헤아려보았지요. 선인들이 그토록 애썼던 불사를 재 자신이 어렵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중단할 수는 없었지요.”

1년에 책 5권, 7권을 내면서 점차 선인이 말한 역경의 중요성을 체득해 갔다.
“한글대장경이 주는 궁극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선은 깨달음입니다. 부처님을 닮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지표(指標)가 되어주고자 하는 겁니다. 하지만 대장경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불법의 바다에 배 한척 띄워 노를 저어가 보세요. 사유의 그물이라도 던져 보면 그 바다 속에서 알알이 빛나는 진귀한 보물들을 누구든 건져낼 수 있습니다. 손에 든 보물을 활용하는데 따라 시, 수필, 소설, 철학, 건축, 음악, 미술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대장경은 법의 보고요, 철학의 보고며 문화 예술의 보고입니다.”

새 대장경 출간, 해임으로 좌절
후원 손길만은 끊기지 않기를

따라서 월운 스님은 대장경의 대중화를 위해 한 발 더 나아갔다. 현 대장경에서 오탈자도 발견되었지만 무엇보다 가로쓰기와 세로쓰기가 혼용되어 있고, 글자도 너무 작아 보는 이로 하여금 약간의 인내심을 요구하기에 새로운 대장경 출간 원력을 세운 것이다. 당초 계획한 바에 따르면 318권의 대장경을 450권의 아담하고도 예쁜 대장경을 선보이고 싶었다고 한다. 물론 이 규모의 대장경을 발간하려면 1000부 단위로 1질을 발간하는데 만도 약 16억 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우선 모든 출가승이 이 불사의 화주가 되어 많은 불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달라 했어요. 불자들에게는 역경 불사의 후원인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고요.”

교구본사를 중심으로 한 각 사찰이 역경원 후원 사찰로 선포하고 각 불교대학 역시 역경원에서 간행한 간행물을 이용해 줄 것도 요청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경전의 중요성에 대한 불교계는 인식은 터무니없이 낮다. 이 불사도 회향하는데 까지는 지난 한글대장경 완간 만큼이나 어려운 여정이 예정돼 있다.

 

월운 스님이 이처럼 많은 고난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선인의 뜻을 잊지 않고 난제들을 하나씩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스님만의 독특한 기질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은사 운허 스님은 제자의 심성을 간파한 후 역경에 매진하라는 말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전해 주었다고 한다.

‘시비의 바다에 몸을 던지고, 표범과 호랑이가 득실거리는 가운데서도 걸림 없이 행하라(是非海裏橫身入 豹虎彙中自在行).’
산사 주련으로도 가끔 보이는 명구인데 주련에는 다음 글이 뒤따른다. ‘옳고 그름을 갖고 나에게 판단하라 말 것이니, 평생 내 뜻대로 살아감에 상관하지 말아라(莫把是非來辨我 平生穿鑿不相間).’

확고한 의지가 섰다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뜻이 담겨 있다.
“시비에 휘말리지 않으면 좋겠지요. 하지만 시비를 피한다고 능사가 아니고, 호랑이 있다 해서 숨어 봐야 그 공포까지 감출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시비가 밀려오면 헤쳐가고, 호랑이가 나타나면 그 자리서 때려 눕혀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을 전하겠다는 원력과 사소한 핀잔과 고난에도 뜻을 굽히지 않는 용맹이 있었기에 지난 대장경 불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월운 스님은 틈나는 대로 직접 변역 작업에도 매진해 『염송설화』, 『원각경주해』, 『금강경강화』 등의 다수의 저서도 선보였다. 월운 스님은 팔만대장경 번역 불사를 하며 무엇을 얻었을까? 『금강경』의 ‘공’일까, 아니면 『화엄경』의 ‘무애’일까!

“선가에서는 반연이다. 경계다 하는 말로 예를 듭니다. 저는 ‘멈춰라’, ‘STOP’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바르지 못한 내 감정을 멈출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상대방이 걸어오는 시비에 분노가 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그 분노를 내 자신이 당장 멈출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쉽게 말하면 컨트롤을 해야지요.”
월운 스님은 나아가 가치기준이 상충했을 때 공동선의 방향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라고 언급했다.

“부처님은 우리의 길흉화복이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용심(用心)과 반사(反射)로 되돌아오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순간순간에 밀려든 경계를 어떻게 타파 해 가느냐인데 이는 어떤 견해로 보고 어떤 결정을 내려 행동에 옮기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부처님 법에 따른 정견을 갖췄다면 그 결정 역시 부처님 법에 맞아 떨어져야 할 것입니다. 내 가족은 물론이고, 내 이웃과 국가, 세계를 위한 대 결정이라면 부처님 말씀에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가치기준이 상충했을 때 공동선을 향한 결정을 내리라고 당부합니다. 용심과 반사는 결코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내 마음을 어떻게 쓰고 그에 따른 과가 어떻게 오는지를 안다면 모든 수행에 큰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불제자라면 정인(正因) 정과(正果)의 인과법칙을 알고 믿어야만 합니다.”

명약도 쓰지 않으면 소용없듯
매일 독경하는 습관 익숙해져야

월운 스님은 불제자로서 수행에도 힘쓸 것을 주문했다. 좋은 약도 먹지 않으면 소용이 없듯이 매일매일 일과를 정해놓고 매진하라는 당부다. 월운 스님이 말하는 수행이란 ‘문사수(聞思修)’다. 특히, 매일 새벽이나 저녁에 경전 펼치는 것을 습관이 될 정도로 부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라고 당부했다.

월운 스님은 지난 해 한 법석에서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전하며 “역경원에서 물러나게 되니 도연명의 심정과 함께 그 분이 느꼈을 홀가분함도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다”며 지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

‘구름은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날기에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雲無心以出鳥 倦飛而知還).’

그러나 불자들의 마음에 이 시는 귀거래사로만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한글대장경 불사에만 매진해 온 80세의 ‘역경보살’에게, 정부 보조금만으로도 여의치 않아 후원회까지 조직해 24억 원을 모금한 스님에게 우리가 안길 것은 정녕 ‘해임’이라는 싸늘한 인사조치 하나뿐일까? 조계종도 자문해 보아야 한다.

현재 ‘역경’은 종단의 3대 중점불사 중 하나인지, 아니면 이미 ‘역경불사’는 1964년 7월 열린 동국역경원 개원식과 함께 외면했는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조계종의 중점사업은 ‘도제양성’과 ‘포교’ 단 둘 뿐인 듯하다.
전 역경원장 월운 스님의 법복에 또 한 번의 찬바람이 스쳐가는 순간 한마디 던져졌다.
“나는 나일 뿐이야. 불자들의 역경 후원 손길마저 끊어져서는 안돼요.”
스님은 ‘지친 날개’라 했지만 아직도 ‘역경’을 향한 비상의 힘은 비축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종단과 동국대가 지혜를 발현한다면 월운 스님이 날 수 있는 창공을 조금 더 열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월운 스님은
1928년 경기도 율동 용산리에 태어나 1949년 운허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56년 해인사 강원을 졸업하고, 1957년부터 61년까지 통도사 강사를 지냈다. 1965년 조계종 역경위원에 선임됐으며 1979년~1993년까지 중앙승가대 교수를 역임했다. 1993년 동국역경원장에 취임한 이래 한글대장경 사업에 전념해 고려대장경의 한글화를 선도했다. 역경보살로 칭송 받는 스님은 현재 조계종 제25교구본사 봉선사 조실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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