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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자를 베테랑불자로 알기쉬운 불교교리 - 불교의 지혜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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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론은 하나로 조화될 수 있다

반가운 비

저녁을 느긋하게 먹고, 볼썽 사납게 쑥 나온 배를 꺼지게 할 요량으로 산보를 하려고 문을 막 여는 찰나였습니다. 갑자기 창문을 드르르 닫는 소리가 주변에서 연거푸 들리면서, 동시에 하얀 빗줄기가 선보였습니다. 견우가 직녀를 만나는 기쁨이랄까, 상사병에 걸린 노총각이 목 메이게 기다리던 님 만나는 그런 황홀할 심정으로 참으로 오랜만에 방문하시는 ‘비’어른에게 인사드렸습니다. 다시 들어가 우산을 갖고 이런 기념비적인 순간을 기념하게 위해 일 보 일 보 내딛었습니다. 모처럼 습기가 동반된 바람은 건조한 느낌에 익숙한 살갗을 청량하게 해주었고, 길옆에 서 있는 가로수들도 이젠 살았다고 아우성치면서 바람과 비에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오는 소나기여서 그런지, 길거리에 상당수의 사람이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있거나, 아니면 신문, 비닐장판 같은 것으로 급한 대로 몸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이번만은 일기예보를 정확히 하지 못한 기상대를 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기상예측이 틀리는 건 언제라도 환영이라는 기색으로 보였습니다. 비 맞는 그 표정에 오히려 넉넉함이 배어있는 듯 합니다. 보통이라면 모두들 그놈들 밥만 먹고 날씨 관측하는데 그런 것도 못하느냐고 야단이었겠지만, 이번만은 예외입니다. 게다가 주위에 콸콸하고 소나기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 게 마치 내 통장에 현금 들어오는 소리인 것만 같아 그저 흡족할 따름입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산보가 끝나기도 전에 빗님은 바쁜 일이 있다고 하면서 훌쩍 떠나버린 겁니다. 하지만 곧 오겠다고 하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머지 않아 다시 빗님은 돌아왔습니다. 역시 빗님은 의리의 사나이입니다.



지식과 지혜의 비

최근에 이렇게 기분 좋은 비를 다시 한번 맞게 되었습니다.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주최한 원효, 설총, 일연에 대한 학술세미나에 가서 지혜의 비, 지식의 비를 흠뻑 맞았습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보통 거창한 학술대회는 그저 그런 인물들이 모여서 하나마나한 얘기나 씨부렁거리다가 막 내리는 게 일반적입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돈 많이 처바른 학술대회치고 들을 만한 내용을 발표한 게 없다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발표회에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상당히 고민했습니다. 주위 사람에게도 물어봤는데, “거길 왜 가? 알조 아냐? 그럴 시간 있으면 집에서 애나 봐”라는 대답을 들은 게 고작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저 나들이하는 마음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은 기상대가 소나기 예측하지 못했듯이, 제 예상도 빗나갔습니다. 물론 무슨 거창한 새로운 학설이 나오고, 무게 있는 고담준론이 오고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저 개인은 엄청난 지혜의 소나기에 몸과 마음이 다 젖어본 행운을 잡았습니다. 특히, 김형효 선생님의 발표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던 저에게 산뜻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분은 원효의 화쟁사상을 데리다의 해체철학으로 풀이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데리다가 누구냐 하면, 문화의 중심 프랑스에서 가장 잘 나가는 철학자 중에 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기존의 모든 철학적 주장을 해체하겠다는 야심 찬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서양철학과 원효의 접목 가능성

그 방법은 ‘차연’이라는 술어를 새롭게 만들어서, 이걸 통해 모든 주장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긍정하겠다는 겁니다. 부정을 하게 되면, 긍정할 수 없는 겁니다. 아니, 사나이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해도 정도가 있는 거지, 어떻게 그게 아니다 해놓고, 그게 이것이다 라는 말로 바뀐다고 주장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데리다는 이게 가능하다고 합니다.

제가 이 한 몸 잘 살려고 오만 가지 애를 다 쓰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죽어가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긍정이지만, 이것은 동시에 죽고 있다는 부정을 함축하고 있다는 게 데리다 주장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부정하는 게 동시에 긍정하는 쪽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이 주장은 이론을 부정하는 게 긍정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긍정하는 게 부정하는 것으로 연결되어, 모든 이론을 하나로 조화시킬 수 있다는 원효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는 겁니다. 저는 이 주장에 불교의 지혜가 서양철학과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의 싹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 날 밤, 집에 돌아오는 저의 발길은 유난히도 가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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