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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의 여운 깊은 책읽기] 늙은 무사, 울음을 터뜨리다

기자명 법보신문

『살다』오토가와 유자부로 지음/열림원

문상하러 갈 일이 갑자기 생겼습니다. 사실, 문상은 언제나 ‘갑자기’ 가게 됩니다. 한번은 날씨도 매우 사나운데다 내 개인적인 사정 또한 고약해서 조문하러 가는 마음이 영 가볍지 않기에 “하필 이런 때에 돌아가셨담..”이라고, 그야말로 천벌을 받을 투정을 내뱉었습니다. 이런 내게 엄마는 혀를 차시며 나무라셨습니다.

“가신 분이야 오죽 하셨을까... 산 사람 사정 봐주면서 떠나는 줄 아니?”
우리는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이유는 잘 모릅니다. 여러 종교에서는 인간이 태어나게 된 배경을 비장한 교리로 설명하고 있지만 ‘왜 태어났나’하는 물음에 딱히 달아줄 대답이 사실 없습니다. 일단 태어났으니 무조건 살고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내가 죽어서는 안 될 이유’를 대라면 그때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하다못해 내가 죽으면 법보신문사가 어떻게 갑작스레 이 칼럼의 대타를 찾겠습니까? 사람은 다 살게 마련이라서 그건 살아있는 사람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요, 세상은 내가 죽어 없어져도 언제 네가 태어나기는 했냐며 여전히 잘 돌아가지만 우리는 가슴속에 막연하나마 ‘내가 죽어서는 안 될 이유’, ‘내가 꼭 살아야 하는 이유’를 적어도 30가지쯤은 안고 살아갑니다. 온갖 구구한 이유를 갖다 붙여서라도 나만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죽음이란 건 아무튼 누구에게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게 틀림없습니다.

〈살다〉라는, 기막힌 제목의 책을 발견하고서 당장 주문하였습니다. 17세기 일본의 막부시대가 배경인 이 소설은 주군의 죽음과 관련한 하급 무사들의 순사(殉死)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아랫사람들에게 인품으로나 덕망으로나 위엄으로나 넉넉하였던 주군이 세상을 뜨게 되자 사람들이 술렁거립니다. 누가 그 뒤를 따라서 장렬하게 배를 그을 것이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이지요.

‘누구는 몇 명이 순사했다더라. 그런데 이번에는 몇 명이 순사할까?’
물론 순사를 한 무사의 집안은 그 충절을 인정받아서 자손에게 벼슬이 주어진다거나 녹봉이 조금 더 후하게 얹히기도 하나 봅니다만, 어찌 되었거나 애꿎은 생목숨들이 보란 듯이 제 손으로 배를 가르는 일은 그 시절 일본에서는 매우 상례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주인공 마타에몬이 순사를 거부했다는 점입니다. 당연히 가장 먼저 죽어야 할 사람인데 주변 사람들은 숱하게 죽어나가는 데도 살아있다는 겁니다. 한창 나이의 사위는 애당초 할복하였고, 십대의 팔팔한 아들마저도 아버지의 불명예를 털어버리려는 듯 자결하고 말았건만, 그래서 딸은 의절하고 병든 아내는 마음의 애처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건만, 마타에몬은 그래도 살았습니다. 그는 중얼거립니다.

‘내가 괜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니야.’
“너는 왜 안 죽고 아직도 살아있어?”라는 주변의 경멸과 냉담을 버텨내길 십여 년, 보랏빛 창포가 함초롬히 피어난 쓸쓸한 정원에서 그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사는 데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미령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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